효원은 강모가 이 집을 떠나 만주로 갔다는 그 말을 들은 날로부터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이 조왕에 정화수를 올린 다음에는, 갓 지어 푼 밥을 강모의
밥그릇에 담아, 조왕단의 정화수 앞에 노았었다.
그 밥이 곧 강모였던 것이다.
먼 곳에 가서도 부디 배 곯지 말고, 무사히 돌아와 따뜻한 이 밥을 식기 전에
먹기 바라는, 마음 지극한 정성이 오붓하게 담긴 밥그릇.
그것은 출행한 가장이나 가족을 둔 집안의 아낙이 조왕에 반드시 갖추어
올려야 하는 기도 의례였다.
몸인 밥.
조왕님.
올에는 할머님이 작고허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방이 어둠침침하여 동이 트지 않은 섣달의 스무나흗날 새벽, 효원은
복받치는 설움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에 세정을 알아 줄 이 아무도 없고, 경망되게 무슨 말을 해서도
안되었지만, 부뚜막의 정화수를 떠놓고 아궁이 앞에 앉아, 한 해동안 살아온
나날을 누구보다 잘 헤어려 줄 것 같은 조왕신에게 저간의 사정을 말하는
효원의 심정은, 하늘에 계시다는 옥황상제 하늘님께 하소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추췌하게 앉아 뜻밖에도 새벽부터 눈물이 뜨겁게 치밀던 그 날이 저물고
참으로 한 해가 다 갔다는 생각이 절실해지면서, 하루가 지날 때마다 그만큼 더
귀는 바깥으로 열리고 날짜는 깊어졌다.
달도 없고 별도 없는 칠흑의 섣달 그믐날 밤이, 압록강 너머 두만강 너머
만주 석방에서 휘몰아 오는 칼바람 속에, 뼛속까지 얼어붙으며,
위이잉
깊어가고 있을 때
동고스름한 초가지붕이 시울을 순하게 내려뜨린 짚시락 아래.
남루하고 따뜻한 불빛들이 낮은 목소리로 젖은 듯이 번지고, 내일이 설날이라
들떠서 잠 못 이루는 아이들이 저희끼리 툭탁거리다가 그 문짝에 그림자로
비치는데, 어디 먼 데서 늦게야 오는 사람이라도 있는 집에서는 사립간에
두세두세 기척이 들리고, 벌컥 방문이 열리면 주황 불빛이 마당으로 쏟아지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어둠 속에 쓸리는 초가ㄹ 지붕들은 옹기종기 그저 정다운
뒷동산이나 어질고 순한 황소의 잔등이를 닮아 부드러운 그 시울을 아래도
숙이고 있다.
그러나 원뜸 이기채의 집 골기와 지붕은 초가와는 반대의 곡성으로 활처럼
벋어, 하늘로 얹혀 있는 것이, 흡사 천공으로 날아오르려는 검은 새의 날개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초가지붕은 땅에 순응하고, 기와 지붕은 하늘에 꿈을 두는가.
그러나 그 기와 지붕의 곡선은 '꿈'이라기보다는, 기세를 한없이 뻗치고자
하는 욕망과, 그 욕망을 하늘에까지 알리고자 하는 원망으로 떨고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원망이 아직도 하늘에 닿지 않은 암담함으로 처연히 그렇게
고개 들고 있는 것도 같았다.
온 집안의 기둥 있는 곳에는 등불을 걸어 놓고, 밤을 새워 설 준비를 하는
중에, 율촌댁은 자기도 모르게 대문간까지 나가 서 있곤 하였다.
오는가.
대문에 걸림 불빛은 겨우 저만큼까지 희미하게 비출 뿐 더는 가지 못하여,
불빛이 닿지 않은 고샅은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게 어두웠다.
저기 어느 중간에 등이라도 하나 더 달아 놓으면 좀 낫겄그마는.
묻어나게 짙은 어둠 속을 망연히 바라보는 율촌댁은, 다 떨어진 아들 강모가
지치고 힘없는 걸음으로 허적허적 걸어올 것만 같아, 그 길목 어두운 것이
마음에 걸리고 무거웠던 것이다.
원뜸은 지대가 높으니, 아랫몰만 들어서도 먼 발치네서, 온 집안에 섣달
그믐날이라고 불 밝혀 놓은 것이 눈에 들어와, 어둠 속에 눈물빛 선연하여,
아, 내가 집에 돌아왔구나.
안심이 될 것이언만.
강모는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에게 말 한 마디 귀뜸도 없이 훌쩍 떠나 버린 뒤.
그가 온 사람이었으면 어젯밤에 왔을 것이다.
할머니 청암부인의 하세한 소식이야 못 들어서 못 왔다 하더라고, 객지를
떠도는 나그네 거렁뱅이일망정 일년에 한 번 섣달 그믐날에는 고향을 찾아가고,
부모를 찾으며, 사람의 모양을 조금이라도 갖추고 사는 위인이라면 참으로 으레
이날만은 기어서라도 집으로 돌아오는 거이 도리일진대.
설령 덕석말이 조리돌림을 당하고 쫓겨났다 해도 이런 맹랑한 처사를 할 수는
없을 것이언만, 하물며, 남의 자식 된 도리로 제 부모를 버리고, 처자를
버리고, 무엇보다도 종손으로서 사당을 팽개치고 네가 과연 무엇을 찾아, 무슨
일을 하려고, 이런 천하에 다시 없는 패륜을 저지른단 말이냐.
이놈아, 할머님이 돌아가셨다.
이기채는 이윽고 자시가 기울어 새해로 들어선 첫머리에서 억장이 무너져
침음하며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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