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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11)

카지모도 2024. 7. 13.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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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탑거리

 

한없이 넓고 푸는 녹색의 지평선, 새로운 대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저는, 아직 불확실한 발길을 한 걸음씩 옮겨

디디었습니다. 기대와 설렘이 저를 이끌었습니다. 저 여명의 하는 높이

휘날리어 펄럭이는 일장기와 온 마을에 메아리치는 종소리는, 사람들의 가슴을

들먹이게 하지요.

우리 개척단 전원이 경건하게 희망에 가득 찬 아침 기도를 올리는 순간에도,

미래를 약속하고 예고하는 심장의 고동은 용솟음치는 맥박으로 뛰고 있습니다.

신천지를 이룩하자는 의기에 불타 우리는, 이 아름다운 낙토 이상 마을에서

단련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격려하는 시찰단과 봉사반의 발걸음도 아주 작고

붐빕니다.

마을 남쪽에는 우리 촌장의 이름을 따서 미나미 기소야마라고 이름 붙인

산봉우리 235고지가 위대한 모습으로 우람하게 서서, 지난날의 괴롭던 투쟁

자욱을 연상시키며, 무언의 힘으로 우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푸를 청공에 뜬 뭉게구름을 두둥실 끝없은 양떼의 무리처럼 피어 오르고,

여름 햇볕은 용서 없이 내리쪼여 살갗이 타는데, 익어가는 작물들은 무럭무럭

풍요롭게 자라고 있습니다.

잡초의 꽃 향기도 온통 들판에 가득하고 그윽하여, 가는 곳마다 꿀의 원천은

무진장이고요.

이곳 만주 사람들이 방목하는 풍경은 한가롭고 안온하여 화창하기

그지없습니다. 달콤한 바람의 선율에 작은 날개를 싣고 나풀나풀 춤추는

나비들의 가냘픈 무용과, 환희에 겨운 대자연의 무르녹은 정경은 눈길이 닿는

곳마다 벅차게 숨쉬고 있습니다.

평화향의 긴 하루에 감사를 싣고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석양은 내일을

기약하고, 드디어 이 무풍의 옥야도 밤의 장막에 싸입니다.

밤마다, 개척지에 있는 몸이 기쁘게 느껴지고, 하루의 일과를 다한 희열에

잠겨, 이런 것들을 얻을 수 있는 운명에 놓은 분들이, 하루 빨리 도만하시어

함께 일할 날을 어서 맞이하지자고 빌지않고는 도무지 견딜 수 없습니다.

꿈의 마을을 마움에 품고, 저는 야마도 나데시꼬(일본여자를 높여서 일컫는

명사)의 명예에 걸맞도록 강하고 바르게 잘해오고 있답니다.

"좋겠구만." 소화 15년 칠월 십오일자로 되어 있는 일본말 신문 '촌보'를

읽다 말고 철럭 집어던진 강태가 한 마디. 내뱉어 자르듯 말한다. 서창이 붉다.

"뭐라고 했어요?" 위칸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던 강모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바래 낡은 이 신문지 조각은 재작년 여름 것인데, 동문사

인쇄창에서 가져온 책들 사이에 끼여 있었다. 만주에 대해서 우선 알아야

한다고 강태는 책꾸러미를 빌렸던 것이다. "읽어 봐라. 멋지다." "멋지면

좋지." "지아화이따뚜이(거짓말투성이)." "인생이 거짓인데요 뭘. 목숨도

환상이고." "네가 시를 안 쓰는 게 이상해. 잃어버린 바이올린 대신 시를 써

보지 그러냐? 이제부터라도, 형설학회 독서구락부에다 가리방으로 긁어서

등사본을 돌려줄 테니." "거 좋은 생각이구만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잉크병을

두들겨 깰 일은 없겠지요." "꽃 속에 바늘이냐?" "시인이나 깡깽이나, 호박이나

수박이나." 강모의 음성이 비뚤어진다.

그는 봉천으로 오는 기차 속에서부터 오유끼 일로 강태한테 심정이 불편했던

것이다. 그 불편이 목욕으로 느껴지면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어긋장을 놓곤

하였다, 거기다가 아는 이 하나 없는 말리 타국의 떠돌이 벌판이라는 것이

강모에게 어느 알 수 없는 굴레를 벗겨 준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예전보다 강태를 대하는 품이 좀더 자유로웠다. "이거나 더 봐라.

읽어 두어야 앞으로 살 준비를 하지." 강태는 강모의 비딱함을 탓하는 대신

신문지 조각을 건네준다. 창문을 때려 치며 뒤집히는 바람 소리는 그 무서운

만주의 겨울을 할퀴는데, 누런 신문지 바람 소리는 그 무서운 만주의 겨울을

할퀴는데, 누런 신문지 속의 계절은 녹색의 무풍 낙원이다.

"대관절 여기엔 또 뭐가 난 겁니까?" "수즈에란 여자가 여기 현지에 무사히

안착했다는 인사 편지를 쓴 것이야. 일본으로." "만주에 왔나?" "무장 개척단의

일원이래. 광장하군. 홀리지 않을 수 없게 썼어." "누구 보라고?"

"내선일첸데 어디 일본 따로 조선 따로겠냐? 하지만 저희들 농촌 빈궁한

농사꾼들을 겨냥한 것 같애. 지금 그쪽 사정도 처참하거든. 노동자 농민이란

언제나 시대와 역사의 맨 밑바닥에 깔린 일차 생산자들 아닌가. 그 등짝을 밟고

전차는 지나가지. 착취와 억압의 전차." "도대체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그

환경을 개선할 수는 없는 겁니까? 짓뭉개 으깨지면서도 깔려서 죽지 도망은 못

가는 거예요? 형님 같은 혁명 열사가 끄집어내 주기 전에는? 오로지 비명을

지르거나, 이런 글에 속아서 개척단 따라 나서는 것밖에 못해요?"

"비웃지 마라, 무지 몽매의 비극이지." "하기는, 속는 것도 운명이에요."

"부녀자까지도 이렇다는데야 장정들은 오죽하겠나? 우선 가슴이

울렁거리겠지. 읽어 보면." "개척단은 조선에서도 오지 안습니까?"

"일본놈들이 교활하고 잔혹하게도 조선 강토를 다 빼앗아 유린하면서,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조선 인민들을 모조리 몰아 삭방의 만주 황무지로

내쫓고는, 그 강토에 저희 내지 국민들을 옮겨 살게 하려는 수작 아닌가. 조선

사람 보고 자꾸만 만주가 낙토라고 부추겨 꼬이는 속이지. 그러면서도 이름은

근사하지. 개척단. 그게 반 강제 아니냐."

강태의 낯빛은 조선에서보다 더 푸르고, 하관도 많이 빠져 날카로운 인상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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