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무문이라 하여,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 남편과 아내같이 그 혈연이 지극
히 가까운 사이에는 제문을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몸과 저 몸을 구분
할 수없이 한 몸으로 절실한 이 사이에, 유명을 달리하는 궁천지통을 당하여, 찢
기우고 무너지는 설움으로 애곡도 겨운데, 어느 하가에 붓 들고 먹 갈아서 심신
을 가다듬고 문장을 갖추어 제문을 지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리라. 그만큼 글
이란, 몸과 마음이 침착 안정, 옷깃을 여민 다음에야 씌어지는 것이었으니, 굳이
상중이 아니어도 반은 앉고 반은 서서 건 공중에 뜬 손으로 봉두난발 흩어진 머
릿결을 거꾸로 쏟으면서는 쓸 수 없는 것이 글이었다. 하물며, 앉으면 앉는다,
서면 선다는 말을 듣기 쉬운 사돈댁에 보내는 내간 간찰이랴. 같은 자식, 같은
형제라 할지라도, 출가한 딸은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의 영위에 제문을 바칠 수
있었고, 시집간 누이는 그 오라버니 죽은 영상 앞에 한 잔 술을 올리면서 향을
사르고 제문을 지어 올릴 수 있었으니, 이는 여자란 시집가면 '남'이라는 관념이
엄격한 탓이었다. 구슬인가 보배인가 슬하에 여식을 놀게 하며 애지중지 기를
적에, 추우면 덮어 주고 더우면 벗겨 주며, 울면 안아 주고 배고프면 젖을 주어
삼시로 먹는 조석 배곯잖게 밥을 주며, 쥐지 마라 터질세라 불지 마라 꺼질세라
고이고이 길러내서, 설,팔월 좋은 명절 곱게곱게 입혀 내고, 침선이며 음식이며,
부덕을 가르쳐서, 삼종지도 아리땁게 그 행실 그 언동에 향기같이 우러날 때, 인
생이 태어나서 대사가 그 일이라 좌우로 사람 놓아, 덕망 있고 문호 좋은 어느
가문 낭자 누구 용모도 준수하고 인품도 남다르다 말을 듣고, 청혼,허혼 왕래하
여 모년 모일 길한 날에 연지 찍고 곤지 찍어, 오색 원삼 칠보 족두리 활옷 입
고 성례하니. 그 시가 바로 친정과는 '남'되는 시였던 것이다. 그처럼 길러 낸 딸
을 이제 남으로 만들고 말 만큼 시속의 법도가 엄중한데, 그 딸이 들어가 살
집안의 시어머니에게 보내는 사돈서가 어찌 간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혼례 후에 처음으로 우귀하는 여식의 품에 넣어 시모주 전에 보내는 첫 사돈서
는, 그 이후 주고받는 사돈서들과는 감회와 격식이 사뭇 다르다 할 것이다. 청암
부인이 열아홉에 소복을 입고 친정에서 떠나올 때, 비단 휘장 구슬 주렴 청, 홍,
황, 흑, 백 열두 번을 감고 늘이운다고 누가 나무랄이 없는 신행길이언만, 횐 두
껑에 허연 휘장, 상청, 상막 같이 두른 가마 흰 덩을 타고, 이고 진 퇴상 물림
대신 이바지 고리지고 하님들이 줄을 지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소리고 웃음
소리도 없이 다만 그림자처럼 따르는 것을 데불고 왔었다. 그네는 엊그제 대례
를 올린 꽃 같은 신부였으나 또한 바로 상부를 하고 만 청상의 여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홀로 된 신부는 시댁으로 시행 갈 때 골수까지 시리게 흰, 흰 덩을 타고
간다. 녹의 홍상 떨쳐 입고 연지 분내 은은하여 복사빛 감도는 새 각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죽은 듯이 그 색으로 살아야 하는 흰 옷을 입고 간다. 그에
게는 이제 삼라만상 온갖 색색 오만 가지 빛깔이 무색하게 된 것이다. 이 세상
에서 가장 크고 소중한 빛, 오채보다 찬란한 색, 남편을 잃은 그가 하늘 아래 누
릴 수 있는 색은 이제 없는 것이다. 해가 사라진 세상에 그해의 부스러기에 불
과한 산천초목 꾀꼬리에 풀잎 꽃잎 색색깔이 무슨 소용 있으리오. 사람들은 신
부를 일러 꽃 같다 하고, 갓 시집온 새각시 고운 자태 꽃 각시라 부르며, 이팔을
지나 물오른 나이를 두고는 꽃다운 나이라 하지만, 청암부인이 그 친정인 청암
에서 신랑 요절의 흉보를 받고, 어제같이 합환, 교배 나누어 마신 술의 술잔이
채 마르기도 전에 온 얼굴을 적시며 흐르는 눈물 제대로 닦지도 못하면서 갈아
입은 옷이 소복이었으니. 청천에 날벼락으로 흰 등걸이 되어 버린 열아홉 살 연
기 아직 어린 자식을, 시모주도 아니 계신 집안에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에게 배
우라고, 장자 잃은 편시부와 십여 세 유아 시동생만 덩그랗게 앉아 있는 시댁으
로 보내는 모친의 심정은, 차라리 가슴을 갈갈이 갈라내어 찢는 것이 덜 아플
것만 같았다. 그런 정황에 시모주 계시다 한들 무슨 사돈서를 쓸 수가 있으리오.
더욱이나 매안 사가에는 신랑의 모친 대신 안혼주가 되었던 보쌈마님 김씨부인
이 내당에 있었으니, 비록 한 장의 종이에 인사로 몇 자 적은 서찰에 불과할지
모르나, 붓을 들기 차마 난감한 지경이었다. 허나 큰일에는 반드시 형식이 있는
지라, 아무리 황망중이라 하나 시늉만 하는 한이 있어도 그 형식을 결할 수는
없었다. 청암부인의 모친은, 이 측은하고 참담한 여식이 어머니를 생각하여 오히
려 울지도 않고 우뚝한 기둥처럼 단정히 앉아 하직의 인사를 여쭈려 할 때, 지
난 밤에 써 두었던 사돈서를 떠나가는 딸에게 건네주었다. 이와 같은 일을 당하
면 남이라도 먼 곳에서 문상,부조를 하러 올진대, 딸 보내는 사가에 안사돈으로
서 위로의 말씀을 간곡히 적어 전하는 것은 사돈서라는 명목이 아니어도 어쩌면
당연한 순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형상이 기구하여 이 서찰을 받을 이가 망자
의 모친도 아니요, 그를 기른 계모도 아니며, 하다못해 만자에게 젖을 먹여 주었
던 유모도 아닌, 아직 그 집안 식구라고 섞삭기에는 낯설러 어색한 보쌈의 부인
이었으니, 편지를 쓰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결국은 의례를 갖추는데 그치고 말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만일 이 같은 일을 신랑의 생모가 당하였더라면 그 흉중,
그 참척을 누가 감히 위로할 수있었을까만, 그렇기 때문에 딸자식을 그 자리로
보내는 이쪽 어미의 서럽고 암담한 심곡을 울어 울어 적어 볼 수도 있었을 것이
다 그러나 그리하지 못한 채 여식은 홀연 통곡을 삼킨 뒷 등을 보이고 흰 가마
에 올랐으며, 그네가 품에 품고 간 사돈서의 회답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였다. 매
안에 당도한 청암부인은 열여섯 어린 부군의 영연에 조석 상식 애곡으로 올리는
데, 마치 자부 오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망자가 된 신랑 준의의 부친
시부가 아들 뒤를 따라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삭은 나무가 푸석 무
너지듯이 어이없게 운명한 그를 보고 문중에서는
"내 그럴 줄 알았다."
고 침중 무거운 음성으로 말들 하였다. 상부 한 가지 일만으로도 참절하여 그
비참한 정경을 감당하기 어려운데, 그 위에 다시 시아바님 초종을 비절하게 치
른 겹상주 청암부인이 어느 겨를에 친정으로 나들이하여 근친을 갈 수가 있었겠
는가. 삼년상을 마치고 난 후에라도 가면 못 갔을 리 없을 것이지만, 그때는 오
직 살을 헐어 땅을 메우고 뼈를 깎아 기둥을 세워야 하는 절박함에 한 걸음을
옆으로 뗄 겨를이 없었으니, 시속에
"시집가서 첫아이를 낳도록까지 친정에 근친을 못 오는 딸은, 나중에 대문으로
못 들어오고 개구멍으로 들어와야 한다."
는 말이 있는 것을 그대로 따른다면, 청암부인은 이제 친정으로 근행을 간다 해
도 대문으로는 못 들어갈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에도 예외는 있었다. 시부모 상
을 당한 경우이다. 그때만은 삼년상을 다 마치도록 소식 없이 지내어도 허물하
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초상이 나고 성복한 뒤 신
주를 마련하여 위패로 모신 그 날부터 상기가 끝나는 탈상 때까지, 아침 저녁으
로 상식을 올리면서 언제라도 제물을 차려 놓고 그 앞에 제문을 읽어 드릴 수있
었지만, 대개는 소상과 대상때, 제사 드는 날인 입제일 초저녁에 치전을 차려 놓
고, 촛불 향불 일렁이는 앞에서 구슬픈 가락으로 읽는 것이 제문이었다 그러나
청암부인은 그 제문 한 장을 짓지 못하엿다.
"지정무문"
그 한 마디로 심정을 대신할 수 있었을 뿐. 내외간이라 할지라도, 조선 명종 8년
이월에 스무 살 나던 권문해는, 스물네 살 나는 곽명의 외동따님에게 장가들어,
선조 15년 유월에 일생 삼십 년을 동고동락, 괴로움도 즐거움도 함께 나누며 살
던 아내를 잃고, 그해 구월에 구십일장 장사를 지내면서 돌아간 아내 앞에, 죽음
을 슬퍼하며 그 비통하고 참담안 심정을 글로 적어 뼈에 사무치는 제문을 바치
기도 였건만, 제망실 숙인곽씨문 본디 부부간이란 하늘이 정하여 마련한 바이며
오륜의 첫째로서, 생민의 비롯이요, 만복의 근원이라 하는 바이니 인륜에 가장
소중한 것이외다. 내 나이 이십이요, 그대 연세 이십사일 적에 하늘이 우리를 짝
지어 주셨으매, 그때가 계축년 이월이었소. 엄전한 모습과 아름다운 덕을 지녀
집안을 화평하게 하고 부녀의 도리를 다하여, 짜증을 부리거나 시샘하는 것을
우리가 부부로 만난이래 삼십 년 간 나는 한 번도 보고 듣지 못하였소. 오호, 서
러워라. 나는 맏아들이요, 그대는 외동딸로 나의 나이 오십이 다 되어서 귀밑머
리가 희어지도록 우리는 유자유녀 아들딸 두기를 바랐으되 한 아기도 보지 못하
였소. 조용히 하늘의 이치를 헤아리니, 나무도 열매가 있고, 풀포기도 씨앗이 있
고, 물고기도 새끼를 치며, 메뚜기도 알을 까는데, 어찌하여 하늘은 우리에게 은
혜를 베풀지 아니하여 후사를 걱정하게 하시는고, 그대와 나 마주앉아 허전한
무릎이 비어 외로운 것을 탄식하며 원망하기도 했었소. 아아, 그러나, 속담에 자
식 두지 못한 이는 수를 누린다고 하길래 오래도록 해로할 줄 믿었더니, 어찌하
여 조그만 병을 못 이기어 갑자기 세상을 버리신고. 연세 오십을 넘었으니 짧았
다고는 못하려니와 팔십 노모가 계시온데 어찌 미리 떠나는가. 아침 저녁 어머
님 봉양과 맛있는 음식 받들기를 이제 누가 할 것이며,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에
는 누가 있어서 어머니의 초종을 치를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하염없는
눈물이 샘솟는구려. 나무와 돌은 풍우에도 오래 남고, 가죽나무 상수리나무 예대
로 아직 살아 저토록 무성한데, 그대는 홀로 어느 곳으로 간단 말가. 서러운 상
복을 입고 그대 영궤 지키고 서 있으니, 둘레가 이다지도 적막하여 마음 둘 곳
바이 없소, 얻지 못한 아들이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날 가면서 성장하여 며느리
도 보고 손자도 보아, 그대 앞에 향화 끊이지 않을 것을. 오호, 슬프다. 저 용문
산을 바라보니 아버님의 산소가 거기인데, 그 곁에 터를 잡아 그대를 장사 지내
려 하오. 골짜기는 으슥하고 소나무는 청청히 우거져 바람 소리 맑으리다. 그대
는 본시 꽃과 새를 좋아했으니 적막산중 무인고처에 홀로 핀 진달래가 벗 되어
드릴게요. 거기에서 그대는 시아버님을 모시겠지요. 그리고 친정아버님의 무덤이
멀리 상주에 있다고 걱정하지 마소. 부녀의 삼종지도는 이승과 저승이 달라져도
마찬가지며, 상주와 이곳 예천은 혼백이 왕래하기에 그다지 멀지 아니하리니, 넋
이 서로 만남은 물이 흘러감에 상류와 하류가 서로 이어지는 것과 같으리이다.
이제 그대가 저승에서 추울까 봐 어머님께서 손수 수의를 지으셨으니, 이 옷에
는 피눈물이 젖어 있어 천추 만세를 입어도 해지지 아니하리이다. 오호, 서럽고
슾프다. 삶이죽고 사는 것은 우주에 밤과 낮이 있음 같고, 사물이 비롯과 마침이
있음과 다를 마 없는데, 이제 그대는 상여에 실려 저승으로 떠나니, 그림자도 없
는 저승, 나는 남아 어찌 살리. 상여 소리 한가락에 구곡간장 미어져서 길이 슬
퍼할 말 마저 잊었다오. 상 향. 흘러내리는 애루를 금할 수없게 하는 이 제문을
혼백이 들었다면, 홀로 가는 저승길을 외롭다 하지 않고, 홀로 누운 무덤 속을
무섭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제문으로 혼백의 마음을 덮어, 식은 자리 차디
찬 땅 속의 검은 습기가 스며들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아마 그럴 수있을
것이다. 귀신과 사람이 서로 마음을 부르며 감응할 만한 지극함으로 그 글월이
씌어지기만 한다면
"나는 그리하지 못하였다."
청암부인은 탄식하였다. 그러나 청암부인은 망부 앞에 한 장 소지로 타올라 한
점 불꽃으로 스러져 갈 제문 대신, 부인 한 생애의 필로 감긴 백지 위에 온몸으
로 먹을 갈아 뜸을 뜨고 문신하듯 한 획 한 획 제문을 지어 바친 것인지도 모른
다. 그리고는 이제 죽어 무덤 깊이 몸을 묻고 육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육
탈은 바로 소지였다. 한 번 남편을 잃어 사별한 여자는 그 나이 여하를 막론하
고 다시 남편을 맞이하지 못하는 것이 조선의 엄격한 법도였다. 그래서 만일 그
집안의 딸이고 며느리고 간에 과부가 개가를 하면, 제 아무리 명문 거족일지라
도 하루 아침에 벼슬길이 막히고 그 가문의 명성조차 보존하기 힘들었다. 그러
니 자연 행세하는 가문에서는 수절하는 과부를 구중심처 깊은 곳에 겹겹이 가두
어 두고 바같사람은 일체 만나지 못하게 하여, 그 안에서 홀로 죽은 듯이 살아
가게 하였다. 그것은 산 채로 무덤 안에 들어얹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세월
이었으나,감히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멸문의 화를 입어 한집안이 다
몰락하는 것보다는, 가련하고 불쌍하지만 사람 하나 죽는 것이 차라리 낫기 때
문이었다. 거기다가 죽은 남편의 뒤를 따라 여인이 스스로 자진하여 열녀가 되
면, 나라에서 정문을 내리고, 비석을 세워 주며, 그 집안 가문에 영화가 이르도
록 길을 열어 주었다. 그래서 어느 집안에서는 심지어 과부가 된 며느리가 그저
수절만 하는 것으로는 아니되어, 음으로 양으로 자결할 것을 은근히 종용하였는
데, 결국은 그네가 먼저 죽은 지아비의 무덤 곁에서 은장도 푸른 비수로 목숨을
끊고 만 일도 있었다. 그네의 가슴에서 흘러내린 더운 선혈은 차디찬 무덤의 봉
분을 적시며 어두운 지하로 스며들었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상께서는 열녀
정문을 하사하고 홍살문을 세웠으니, 겉은 알고 속은 몰랐던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사람 그런 일만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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