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전에 옛적에, 한 백 년인가 백오십 년 전인가, 어느 고을 아무네 집에 젊
은 청상이 하나 살았더란다. 그 시아버지는 항상 매일 밤마다 하루도 거르지 않
고 집안을 돌면서 살펴보고 있었더래. 그러던 그 어느 날 밤,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하고 초생달은 희미한데, 며느리 방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고 누군가와 소
곤거리는 소리가 들려 나오더란다. 의아하게 생각한 시아버지는 며느리 몰래 문
틈으로 안을 엿보았지. 그런데 며느리가 베개에다 죽은 남편 옷을 입혀서 마치
신랑처럼 꾸며 놓고, 마주앉아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흉내를 내고 있더라지 않냐.
그렇게 온 밤을 새우더래. 그것을 본 시아버지는 그만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그
후에 곧 그 며느리를 아무도 모르게 개가시켜 멀리멀리 북쪽땅 끄트머리 어디로
보내 놓고 그 종적을 덮어 버렸단다. 그런데도 사람 눈은 무서워서 동리 사람들
이 차츰차츰 이 사실을 하나둘 알게 되고 끝내는 관아에까지 소문이 들어갔구
나. 결국 그 집안은 문벌의 이름조차 보존하기 힘들게 됐더란다."
하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매안 이씨 가문의 선대 할머니 가운데는 이
런 분이 있었다. 청상 과부가 된 이 며느리는 밤마다 등잔불 밑에서 동그란 엽
전 한닢을 방비닥에 데구루루 굴리고는 방바닥을 헤매면서 더듬어 찾는 놀이로
하염없는 세월의 긴긴 밤 지겨움과 고독을 달랬다 한다. 이렇게 날이 가고 달이
가서 몇 년이 지나가고 이제는 그 청춘이 다 지나갈 무렵, 엽전에 새겨진 글자
는 물론이고 둥근 윤곽마저 모지라지게 다 닳아져 엽전은 얇은 종잇장같이 되어
버렸다. 그 애달픈 엽전닢은 남평 이징의의 집안에 내려오고 있었다.
"아무개 댁 과부는 바늘로 발을 찌르면서, 지루하고도 긴 밤의 외로움을 이긴다
더라."
는 이야기는 이 집 저 집에 참으로 흔하여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신랑옷을
입은 베개와 닳아지는 엽전 한 닢, 그리고 바을 한 개. 이 눈물나게 헛되고 하찮
고 작은 것들 하나에, 자신의 공규 독방, 그 질리게 무겁고도 서리서리 끝도 없
는 생애의 시름을 쓸어 안아 부리면서, 혼자 된 여인들은, 살았으나 이미 비어
버린 목숨을 가까스로 지탱해 나갔던 것이다. 아아. 천산에다 쇠기둥를 박고 동
아줄로 비그러매도 인간이란 검불같이 흩어지기 쉬운 존재들이거늘, 어찌 그 한
생애를 베개 하나, 엽전 한 닢, 그리고 바늘 한 개에 의지하여 버틴단 말인가.
젊은 청상 청암부인은 머리맡에 칼을 놓고 잤다. 잘 갈아서 푸르게 날이 선 낫
같은 칼 두 자루를 머리맡에 사람 인자로 놓아두고, 사람 기척 없는 빈 방의 찬
자리에 차가운 이부자리를 펼치는 그네의 온몸에는 상도에 돋는 서릿발이 베이
게 어려 있었다. 십장생 백수백복 꽃 병풍을 두르는 대신, 시퍼런 칼의 쌍날을
머리 위에 관배처럼 두른 채, 반은 자고 반은 깨어 그네는 한 세월의 밤을 보냈
다. 아녀자로서 그네는 결코 고운 외양이 아니었다. 장대하다 할 만큼 큰 키에
우뚝 솟은 어깨, 그리고 오악이 분명하여 넓은 이마와 두드러진 양 광대뼈에 두
툼하고 긴 코, 풍요로운 턱을 두루 갖춘 얼굴은, 나이 아직 꽃다웁다 하되 아리
따운 모습이라기보다 제세 호걸의 풍모를 띠고 있었으니, 누가 미색을 탐내어
문지방을 넘지는 않으리라 얼른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경솔한 판단이요,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어서 그네는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어쩌면 그 칼날
은 무엇을 '잃지 않으리라'는 마음이 아니라 '지키리라'는 결연한 각오 위에 '일으
키겠다'는 다짐을 세우게 하는 날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뼈로 내 몸을 일으키리라."
고 그네는 각골하였었다. 깊은 밤 사위가 잠들어 세상이 어듬 속으로 침몰하여
가라앉을 때, 그네의 방 머리 위에서는 인광이 돋아 야광처럼 새파랗게 비치는
칼날이 서슬 시리게 눈을 뜨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광배 같기도 하였다.
"그 어리고 젊은 날부터 이날까지 머리맡에 칼을 두고 자는 중에,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었소?"
후년에 둘다 나이 웬만큼 들어 수굿해졋을 때, 한 번은 김씨부인이 청암부인에
게 물었다. 청암부인은 그말에 미소를 머금었다.
"첫재는 바로 내가 제일 무서웠고, 둘째는 사람도둑이 경계되었고, 셋째는 양상
군자였지요."
김씨부인은 그 세 말을 다 알아듣고 같이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처연하고
쓸쓸한 미소였다.
"나는 그 중 셋째는 염려할 일 없었으나, 둘째 것은 당해 버렸으니, 자연 첫째
것은 말에 담아도 소용없게 되었소그려."
보쌈으로 업혀 온 김씨부인은 매안의 안방에 겨우 얼마 기거하지 않아서 어이없
게도 다시 새로 만난 이의 초상을 치르고 말았기에,
"내 생전에 상부 삼년상만으로는 모자라서, 거푸 삼 년을 또 이어 복을 입고 보
니, 죄 많아 여자로 난다는 말도 호강으로 들립디다. 그냥 남 사는 대로 살 수만
있다면 뼛골이 빠진들 고생이 무슨 못할 일이며, 층층시하 그 무엇이 어려운 일
인가 싶어지고. 갈퀴발에 짚세기 신고 흙바닥에 잠을 자도 그 사람이 외나 나보
다 더 달게 사는 것만 같아서. 오죽허면 내외 지어 자식 달고 빌어먹으로 다니
는 동낭치를 다 내가 부러워했다우. 너는 복이 많은 삶이다. 허고."
그리고 김씨부인은 도 말했었다.
"차라리 칼을 물고 죽을 것을, 나는 훼절까지 했는데도 또 다시 연이어 초상을
치르니, 내가 모진 사람인 것 나도 알었소, 허나, 그렇게 보쌈에 업힐 때는, 그
첫 번째 무서움에 내가 졌을 것이요. 아마."
그런데 청암부인도 하마터면 흉흉하고 수상쩍은 일에 말릴 뻔한 일이 있었다.
그네를 보쌈하려 은밀히 공론한다는 말을 어디서 듣고 하루는 안서방이 황급히
와서 귀뜸으로 일러 주었던 것이다. 남녀가 유별하고 상하가 엄중하니 평상시라
면 감히 어느 앞이라고 안서방이 운을 뗄 수 있는 말일까마는, 당시의 처지로는
좌우정황이 그건 것을 가릴 계제가 못되었다.
"용모가 염려 단아 아리따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나이 열아홉 스물의 방년에
초례만 치르고 홀로 되니 새사람이나 다름없었으며, 길러야 할 일 점 혈육도 없
는데다가, 무엇보다도 그 친정 가문의 학문과 도덕이며 매안 시댁 문벌의 빛나
고 장함이 이 청상을 바르고 깊게 가르쳤을 것이니, 가모를 얻는 데 이보다 더
한 보배가 어디 있으랴. 더욱이나 본인의 천품이 타고난 기상 있고 크게 빼어난
것을 이미 들어 알고 있는 마당에 그만한 사람을 어디 가서 다시 구하리. 일단
그 집 안방에서 대문 밖까지만 둘러씌워 업고 나오면, 그때는 도리 없이 이 집
사람이다."
저쪽에서 모의했다는 그 공론은 맞는 말이었다. 밤이 깊어 이슥할 때 실한 장정
몇 사람이 홑이불을 감아들고 감쪽 같이 담을 넘어 과수의 집으로 들어가, 요령
있게 방문의 문고리를 소리없이 따고, 단걸음에 떼로 덤벼 홑이불을 덮어씌우면
"아악"
비명을 지르지 않을 사람 어디에 있겠는가. 그 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집안 식구
들이 몽둥이야 작대기야 휘두르며 이 불한당들을 후려쳐 좇아내려 달려들고, 보
쌈하러 간 사람들은 어떻게든 안 뺏기려고 격투를 벌이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
도 그 집 대문만 넘어서면, 집안 사람들은 더 이상 그 불한당들을 쫓아 나오지
않았다. 도둑을 맞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체념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 집 울타
리 안에서 훔쳐 업은 과수를 뺏기게 되면 그 과수댁 훔치러 갔던 사람들은 혼비
백산 흩어져 달아났다. 그냥 있다가 잡히면 관아로 끌려가 치도곤을 맞는 때문
이다. 이렇게 습격을 당하여 업혀 온 청상 과수는, 그 남자와 사는 것을 운명으
로 돌리어 아무 반항하지 않고, 그를 남편으로 맞아 섬기고 살았다. 그런 보쌈을
하려고 어느 집 사람들이 남모르게 궁리한다는 말을 들은 청암부인은, 그날로
문중의 부인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일찍이 하늘에 얻은 죄가 있어 그 정해 주신 배필과 해로하지 못하고 청
춘 소년 아름다운 나이에 무참히 중동이 꺾이어 소천(남편)을 잃었으니, 그것은
나의 박복한 운명일 뿐 남의 탓이 아닙니다. 허나, 단 사흘을 만났어도 그 인연
이 지중하고, 설령 사흘까지 못 누리고 초례청 교배상 앞에서 그가 비명에 운명
했다 하더라도 부부 인연 지중하니 소홀히 못할진대, 나는 매안의 이씨 문중 대
종가 종부로서 그 나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책임을 맡은 사람이 되어 있으매,
불행히도 위로 구고(시부모) 아니 계시고 아래로는 슬하에 한 점 혈육 없으나,
책임만은 중중하여 양 어깨가 무겁습니다. 대저 종가란 문중의 큰집인즉 가문의
어버이요, 장형이어 마땅한데, 지금 우리 문중 이씨 가문, 어느 집을 의지해서
지붕을 삼고 누구를 의지해서 기둥을 삼을 수있으리오. 적막하게 비어 버린 고
가는 폐옥이 다 되었으니, 이 사람 종부라고 명색 붙여 앉아 있기 참으로 민망
하오이다. 문짝도 바로 없고 댓돌에도 망초 나서 안이나 밖이나 구분하기 어려
운데, 엎친 데 덮친 격이고 눈 위에 또 서리 내리는 일이 생길까 저어되어 모이
기를 말한 것입니다. 내 입으로 담기 해괴하고 우스우나, 건넛마을 아무 동네 모
씨들 집안에서 날을 잡아 나를 보쌈하러 온다 밀의가 있다 하니. 그 같은 일이
라면 반가의 부녀로소 비록 낭설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들은 귀를 씻어야 마땅한
것이지만, 이렇게 거꾸로 외장치고 불러 모아 널리 알리는 까닭은, 만일 만에 하
나 그런 일이 자행되어 불미한 발자국이 이 집 마당을 더럽히고 소란스럽게 한
다면, 설령 그들을 쫓아낸다 해도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토록 허술
한 종가가 어느 문중에 있으리오. 남루를 뒤집어 만인 앞에 보이는 일이 분명합
니다. 뿐만 아니라 참담하게도 나를 비끄러 묶어 메고 여럿이 둘러 업어 이 집
대문을 나서는 경우가 생긴다면, 이는 사대가에 있을 수 없는 수모이니 의당 나
는 죽으려니와, 이 집안 이 가문은 종부를 도둑맞은 얼빠진 족속이라 손가락질
면치 못할 것이 억울하여, 나는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칼이 비록 날섰다 하
나 솜방망이도 여러 대 뭉쳐지면 그 날이 빠질 수 있듯이, 내 비록 서슬을 세우
고 마음을 독하게 먹어도, 여러 장정 덤비는 완력을 부녀의 힘으로 못해 볼 일
도 없지는 않을 것이라. 여러분께 소청할 일 있습니다. 이 집이 명색 종가라 하
지만, 남노여비 허울뿐이고, 호제 행랑것들 한 방에서 기거할 수 없으니 여러 부
인들 가운데 사정이 닿으시는 대로 번을 갈라 아무라도 오늘밤부터 이 집으로
올라오셔 나와 함께 한방에서 잠을 같이 주무시면 좋겠습니다. 한 분이라도 좋
고 두 분이라도 좋고 더 있대도 좋은 일이지요. 저녁 잡숫고 올라오시면 밤을
새워 이야기를 해도 즐거울 것이요, 둘러앉아 고치를 감어도 재미있을 것입니
다. 사람 소리 어근버근 불빛이 휘황한데 어느 도적이 홑이불을 추켜들고 넘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 말이 떨어지던 그날 밤에 연세 지긋한 노부인과 마침 집에 일이 없는 숙항,
질항 부인들이, 그네와 함께 자려고 종가의 안방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금방 스
치기만 하여도 베일 것 같은 푸른 날의 칼을 보았던 것이다. 아하, 그러하구나.
그 칼날에 문득 보는 이의 가슴이 선뜩해지는데 어느결에 그 베이어 쓰라린 자
리에 핏방울 맺히더니, 핏방울은 그만 소름이 되었다. 아하, 그러하구나. 그렇게
문중의 부인들이 같이 자기 시작한 지 얼마 후에, 야심한 한밤중이면 몇 번인가
고샅이 어둠 속에 수런거리고, 담 아래 우세두세 목소리 낮춘 음성들이 들리곤
했었다. 그러다가 스물다섯에 이기채를 양자로 들이었는데, 그 종적 모를 소리들
은 그래도 아주 멎지는 않았다. 그리고 청암부인도 잠의 머리맡 칼을 치우지 않
았으며, 모여서 자고 가는 노부인과 숙질,동항의 부인들도 번갈아 동무하기를 그
치지 않았다. 예로부터
"불효지죄가 삼천이로되 막대어무후"
라고 하여, 삼천 가지 불효 중에 대를 이을 아들을 두지 못하면 자손으로서 조
상에게 가장 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아들을 두지 못했을 때에는 생전
이나 사후를 막론하고 동성동본의 유복친 중에서 항렬에 맞추어 사내아이를 데
려다가 그 가문의 계통을 잇게 하는 것이 양자였다. 양자를 가면 그 생가에서는
출자가 되고, 양가에서는 계자가 되어, 양부모에게 호부호모하고 양가의 계통을
이어받는다. 그런데 일단 양자를 했으면 어떠한 경우에도 파양하지 못하며, 이것
을 어기면 신분에 따라 응분의 제재를 받았다. 또 형망제급이라고 하여 형이 아
들 없이 죽으면 아우가 맏아들로 양자를 삼기도 했다. 그럴 때 아우에게도 외동
아들인데 형에게 계후하였으면, 그 아우도 양자를 해와서 입후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리하여 조상의 향화를 끊지 않고 제사를 받들며 가업을 계승하는 것이
일반적 규범이었다. 그러나 대체로 맏아들은 양자로 갈 수 없느데, 혹 아들이 여
럿이라도 남에게 양자 주기는 꺼려지는 것이 부모 마음이라, 양자를 할 때에는
보내는 집안과 받아들이는 집안 사이에 문서가 있어야만 되었다. 그리고 증인도
있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관의 허락도 반드시 받아야 했다. 주고받은 양가의 부
모 중에 어느 한쪽이 죽고 없을 경우에는 종중이 입증하여 관에 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절차를 밟아서 확실하게 일을 성립시켜야만, 부모의 마음이 변하거나 혹
나중에 귀신 와도 꼼짝못한다."
고 하였다. 비록 산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간 사이라 해도 아들을 주고받는 일
만큼은 신중하고 까다롭고 철저하게 했던 것이다. 청암부인도 이기채를 양자로
들이면서 기채의 생부요, 준의의 아우인 병의에게 계후 입안을 하고
"이준의가 그의 몸에 적첩간에 모두 아들이 없어서, 아우 이병의의 장자 이기채
를 양자로 삼고자, 두 집안 곧 준의와 병의 형제 집안이 뜻을 같이 하여 소지를
바친다."
는 내용의 정장 문서를 썼다. 이준의소지내 의신적첩구무자 돗생제병의 제일자
기채 욕위계후 양가동의정장 그리고는 위소지가 틀림없이 확실한 합의로 올려지
는 것이라는 문중 증인의 말과 이름을 앞앞이 적어 몇 장의 기록으로 남겼다.
하여 원본을 소중히 간직하고, 필사본을 병의에게 주었으며, 만일을 몰라 다시
한 벌을 더 베끼어 문장어른에게 맡기었다. 분실할 경우나 불이 났을 때를 생각
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청암부인 신행길에 흰옷 입고 빈 집으로 들어서서, 어서
오란 말 대신에 명부의 오적한 연기로 맞이하는 신랑의 영전에 쓰러지며 엎드
린, 그 한 생애에, 낳지 않은 자식을 하나 어엿하게 낳아 핏줄을 이어 놓고, 이
제 그네도 한 줄기 향연되어 혼백이나마 한데 섞이고자 오직 육탈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육필이 임리하여 잊지 못할 신랑의 몸으로 알고, 평생 동안 고이 받
어 간직해 온 혼서지를 곱게 접어, 저승가는 종이 신발 만들어 신은 그네의 발
이 시리다. 한기가 기친 탓이다. 무덤의 옆구리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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