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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12)

카지모도 2024. 9. 23.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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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댁은 이번에는 질녀의 조그맣고 발그스름한 입술을 손가락으로 곡 찔러 주

며 웃었다. 본디 자상한 성품은 아닌데다가 대찬 모색이 있는 수천댁이었지만,

강실이한테만큼은 가끔씩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도 해 주고, 댕기 물린 새앙머리

를 매만져 쓰다듬기도 하며, 그 앙징스러운 모습을 귀여워하였다.

"강실아, 너 어디로 시집갈래? 숟가락 한번 잡어 봐라."

수천댁은 언제인가 밥상머리에 앉은 강실이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조막만한 강

실이는 영문도 모르고 제 숟가락을 들었는데, 어린 마음에 무슨 일인가 싶어 숟

가락 잎사귀 바짝 가까이를 쥐었다.

"하하, 고것 참. 너 어디 담 너머 이우제로 갈래? 어머니 못 잊혀서? 그렇게 뽀

짝 곁으로 시집가면 나도 좋지. 이쁜 질녀 오며 가며 복받고 사는 것 구경도 혀

고, 느그 어머니는 더 좋것다. 산넘고 물건너서 가기도 오기도 어려운 데로나 시

집을 가 놓으면, 보고 자와도 갈 수가 있는가, 오고 자와도 올 수가 있는가. 그

래 어디로 갈랑고? 옆집으로는 못 갈 테니, 둔덕이로 갈 것인가? 머 그 동네서

여기서 제일 가까운 동제간이니까."

수천댁이 모처럼 한가롭게 강실이를 데리고 노는 양을 홑이불에 푸새를 하며 바

라보던 오류골댁이

"저것 남의 집 보낼 일이 지금부텀 걱정이네요." 하였다.

"그 걱정만 아니라면 딸자식이 왜 서운해? 아들보다 귀엽고 눈안에 들고, 애지중

지 고운 맛이 천지에 다시 없는 것이 딸자식이지. 색색 가지 비단 헝겊, 무지개

보다 더 이쁜 게 딸 아닌가. 그렇게 이쁜 것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남의 식구로

떠나가 버리는 것이 어디 예삿일이야? 자네나 나나 이 강실이란년이나, 어려서

는 딸이었고 자라서는 에미가 되는 여자인데. 부모의 무릎에서 보배로운 구슬같

이 고임받고 크다가 언제 한번 효도할 틈도 없이 이제 겨우 사람 시늉할 만하

면, 낯설고 물설은 곳 남의 집으로 시집을 가야하니. 가마 타고 가는 길을 돌아

보면 무엇 해. 낳아 주고 길러 주신 부모님을 살아 생전 다시 언제 뵈올는지 기

약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시집가는 길인데. 그저 근친이나 한 번 갔다 올 뿐 일

생에 부모 슬하 그 다정하신 무릎앞에 다시 앉기 어려운 것이 여자라. 이런 이

별을 겪어야 하는 딸이란 참 아니할 말로, 전생에 죄가 많어서 여자로 난다는

말을 절감하게 허는 것이지. 그러니 강실아아, 너는 아조 가찰막허게 시집가그

라. 가까이 살어도 시집은 먼 것이다만 그래도 그게 아니지. 아조아조 가찹게 코

밑으로 가르라. 응? 느그 엄니, 너 하나뿐인데 어찌 두고 먼 데로 가? 나도 아들

만 있지 딸이 없으니 네가 먼 데로 가면 그리울 거고."

"형님, 그 애가 아직 아홉 살이어요. 아직은 몇 년 더 남었그만요."

"그 몇 년이 화살이야. 두고 봐."

"하기는."

"이 애 바느질 헐 줄 알지?"

"엊그저께 처음으로 제 저고리 하나를 조물조물 허드니 그런대로 모양은 만들어

놨드만요."

"제? 누구, 자네 것?"

"어디가요. 강실이란년 것 말이지요."

"으응. 요것이 바느질도 참 곱게 잘헐 것이네. 자네 솜씨가 좀 음전해? 누비 이

불 열두 채를 지어도 바늘 한 땀 안 틀어지는 솜씨지."

"형님도 참. 누가 들으면 웃겄네요."

"나는 속에서 불이 벌벌 나 그런 일은 오래 하고 못 앉어 있어. 마실은 좀 괜찮

지."

"무단히 말씀만 그러시지요 뭐."

"강태란놈이 나 탁ㅇ는가 그렇게 한자리에 진득허니 앉어 있지를 못하고, 펀적

허면 나가고, 집에 붙어 있을 틈이 없네 그려."

"아이고, 인제 열 살 막 넘어서 한참 개구쟁이 정신 없을 때 아닌가요? 거기다가

사내아이. 호방하고 활달해서 삼동네 대장은 혼자 다 도맡노라고 그러지요. 계집

애허고는 다르잖아요."

"막대기 깎어 논 것, 칼 맨들고 창 맨들어 아조 무슨 노적가리같이 삼각지게 쟁

여 놓고는, 줄남생이 줄줄이 몰고 댕기는 것 모양 아이들이 나 몰고 다니면서

우얏, 우얏. 그래도 그놈이 남의 뒤는 안 가는 것 같은데. 나중에 커서 어영대장

을 헐란지 훈련대장을 헐란지. 도대체 손이 라고, 망치 들고 못 박고, 칼 들고

칼 깎고, 성헐 날이 없구만. 노상 찧거나 베거나 다치거나."

"그래도 학교 공부는 제일 앞서서 사매 보통학교 생긴 이래 그만헌 머리 본일이

없다고들 한다지 않던가요."

"신기하기는 한 일이지."

"형님도 그러시고, 수천서방님 또한 예삿분이 아니시니까."

"그애가 아버지 닮기는 많이 닮었더."

"인제 그 애, 강태가 무얼 해도 한 자락 단단히 헐 것이네."

"큰 집 작은 집 종항간이라도 강모 좀 봐. 나 세상에 강모같이 참한 애기 또 있

는가 싶대. 같은 사내아이라도 어디 부잡스러운 구석이 있는가아, 말헤길(말썽부

릴) 일이 있는가. 보고 있으면, 각시도 저만은 못허지 싶게 조용허지. 곱고."

"사람이 다 서로 다르지요. 그래서 몫이 다르고 허는 일이 다르고."

"허기는 종손이 강태마냥 그렇게 산으로 들로 헤매고 돌아댕기면 큰 일이지.제사

받들고 조상 모시면서 문중 살림 허저면 그런 성품으로 타고나야 해. 강태는 천

상 집안묶이는 아니고."

"그것도 커 봐야 알아요. 크는 애들은 열두 번 변헌다는데."

"그렇기는 해. 아앗따아, 강실아. 너 어저께 밥상 한 번 이쁘게 채렸드라잉? 별

거 별 것이 다 있대? 새파란 싱건지 나물에 살구꽃 밥을 해놓고 또 뭐이 있었

지? 황토 고추장, 진흙 찰떡에다 모래 깨소금...어디서 그런 오색 반찬을 다 구해

다가 상을 봤더냐? 반찬그릇도 어찌 그리 너 모양으로 양글어서서, 흰 대접 깨

진 것을 아조 진주같이 보드랍고 광채나게 갈어 갖꼬 칠첩 반상기를 맨들어 놨

대? 너 나중에 살림을 얼마나 잘헐라고 지금부텀 그렇게 솜씨 자랑을 허냐? 고

것 참."

"머 그 애는 아직 그것이 일이지요."

수천댁과 오류골댁은 서로 마주보고 눈으로 미소 지었다. 그 소꿉놀이 밥상을

받은 사람은 강모였다. 어린 도련님 강모는, 오류골댁 살구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차린 꽃밥에 칠첩 반상 백옥 같은 사금파리 접시 위의 색색 반찬을, 강실

이가 집어 주는 대로 받아 맛나게 먹었다. 그 아홉 살 열 살의 동그만 머리 위

로, 봄이 이울은 살구나무의 그름 같은 연분홍 비칠 듯 말 듯한 꽃잎들이 하염

없이 흰 눈처럼 날아 내려, 강실이의 작은 어깨와 저고리 깃, 옷고름 사이로 스

미어 지고, 강모의 앞자락과 무릎에 졌다. 그리고 밥상 위의 밥그릇과 국그릇,

반찬그릇 색색 위에 하얗게 졌다. 나풀나풀 날아 내리는 꽃잎들은 여리고 곱다

못하여 애달프기 그지없는데. 강모는 내리는 꽃잎의 너울 저쪽에서 나뭇가지 젓

가락으로 꽃밥을 먹으며 웃고, 강실이는 내리며 스러지는 봄눈같이 안타까운 꽃

잎들의 이쪽에서 웃으며 새 그릇에 꽃밥을 담았다. 꽃잎은 녹는 것이 아니어서

봄눈보다 고와, 돗자리돠 밥상과 마당 위에 비늘같이 작은 몸을 누이었다. 그 살

구나무 고목은 어제처럼 아직도 사립문간에 그림자 드리우고 서 있는데, 그날보

다 많이 늙어 검은 둥치가 바라진 살구나무 가지 머리 아마득한 공중에서 가슴

아린 살구꽃 구름 무리는 에이도록 영영하게 흩날리건만, 그 나무 아래 돗자리

는 이미 걷힌 지 오래고, 마주앉은 강모는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강

실이는 이렇게 한겨울 얼음 박힌 그림자로 허옇게 서서, 액막이 연 날아간 하늘

의 물 속, 그 어둡고 푸른 수심에 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강실이를, 토

담 밑에 바짝 붙어 선 춘복이가 아까부터 새파랗게 노려보고 있는 줄을 그네는

알 까닭이 없었다. 다만 하늘을 우러러 전심을 추신하며 아득히 날아 거꾸로 빠

져들어가고 있을 뿐. 춘복이는 그런 강실이를 노려본다기보다, 아까 산봉우리 꼭

대기에 올라 맨 먼저 떠오르는 대보름달을 우러르며 무섭게 그 정을 빨아들이었

던 것처럼, 전력으로 강실이를 흡월하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강실이는 자신을

어디엔지 삼투당하듯 질리며 조금씩 파리해지고 있었다. 그네는 창호지보다 얇

아 보였다.

"내 한 몸이 있으려면 조상이 먼저 계셔야 하지 않겄냐? 그래서 안방 웃목에는

조상신 조상단지를 모셔 놓는 게야."

그날 수천댁은 말했었다.

"조상신을 잘 섬기는 것이 부녀자의 할 일이지. 사당에는 위채가 계시지만 안방

에는 조상신이 계시거든. 의식 절차 갖추어 의관을 정제하고 제사 모시는 사당

의 위패 못지않게, 한 집안의 주부 아녀자가 모셔야 하는 것이 이 조상신이란다.

그래서 위패 대신 정결한 단지를 가신으로 모시는데, 이것이 신체지. 신체. 그냥

단지가 아니라. 그 신의 몸 속에다가는 그해에 처음 나는 햇보리나 햇벼를 철

맞추어 가득 담어 놔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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