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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28)

카지모도 2024. 12. 16.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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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졌던 짐을 내려 멜빵을 풀어 놓은 황아장수는 때묻은 버선짝을 뽑아 벗

으며, 이제는 별 도리 없이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야 할 사람이라, 비스듬히 바

람벽에 등을 기댄다.

"사람도 그러까?"

강실이를 눕히던 옹구네가 혼자말처럼 물었다.

"사람?"

"긍게 사램이, 바가지만 헝 거이여어 못헝 거이여?"

"자다가 봉창을 뚫네. 아 왜 사람을 느닷없이 바가지다가 댄당가?"

"사람은 아매 그만 못헐 거이요. 더 헌 사람도 있을랑가는 모리겄지만. 못헌

사램이 더 많제."

"뚱딴지맹이로... "

"비탈진 까끄막에 독밭을 매도 한 해 두 해 일 년 이 년 세월이 가먼, 티 고르

고 까시 고르고 정이 드는 거인디, 사람은, 어저께끄장 너냐 나냐, 어저께가 머

이여 한숨 전에 아까막새끄장 세상에 다시없이 이뻐라고, 보듬고 치긋고 어르든

님이, 새사람 생기먼 눈 깜작 새에 싸악 변심을 허는디, 낯색 바끄는 거이 꼭 비

오다 구름 개고 구름 쪘다 날 개는 것맹이여. 말짱 씻어 불제. 그럼서, 쓰든 사

람 내부리는 것을 깨진 쪽박만도 못허게 동댕이치고 죄면해 부러. 붙여 쓸라고

는 꿈에도 안허고. 쪽박은 깨져도 꼬매 쓰는디... 사람은 요상허제, 깨지도 안허

고 새도 안허고 얼매든지 더 쓸만 헌디, 옆으다 둘라고조차 안험서, 성성헌 것

탁 내불고 왜 새 박 따러 가까잉."

옹구네는 고개를 떨구었다.

눈치 빠른 황아장수는, 저 예펜네가 저만 아는 무신 사연이 있구나, 하면서도 짐

작을 내색하지 않은 채

"바가지 나름이제 머."

하고 말꼬리를 묻었다.

"밭이라먼 그러겄소? 여러 해 공딜여서 초벌 재벌 지심 매든 땀이 아까워서도

못 내놓고, 재산이라서도 못 내놓제. 내불기는 고사허고. 누가 뺏을라고나 해 보

라제, 쌍칼 들고 싸움서 눈에 불을 씨고 지킬걸?"

강실이 머리에 베개를 받쳐 편편히 괴어 주고는, 거품 같은 팔과 다리를 쓸어

내리며 몇 번 주물러 주던 옹구네는, 겨잣빛으로 누르시푸릉 바랜 강실이의 손

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황아장수는 오랜 세월 길고 먼 길을 굽이고비 휘돌아 다니면서, 마을의 솔기

에 박힌 이 집 저 집의 크고 작은 이야기를 누구보다 많이 듣고 본 사람이었으

니. 아는 것도 많았다. 잠시 짐을 풀고 남의 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밥 한술 얻어

먹거나, 산다 하는 집 안방에 들어가 비단이며 옷가지를 구경시키다가 무심결에

주고받는 몇 마디가 날 가고 달 가면서 쌓인 것이다. 대명천지 남 다 아는 애경

사로부터 아무도 모르는 골짝진 응달에 파묻어 놓은 속내 비밀의 낟알들까지.

굳이 알려고 해서도 아니요, 무슨 식견이 있어서도 아니었지만, 그것들은 저절

로 그저 묵은 마루에 먼지 앉듯이 바람을 타고 눈짓 따라 묻어 드는 인간사의

자락들이었다.

그네는 그것들을 알맞게 제 몸에 묻히고, 기억하고, 혹은 담아 두고, 또 혹은

듣는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하였다. 설사 속으로는 결코 잊어 버린 것이 아닐지

라도 겉으로는 얼마든지 잊어 버린 사람이 될 수가 있었다. 그래야만 될 일일

때에는.

"여기서 대실까지 갈 길이 멀지마는 천만 다행으로 기차가 있어서, 행보가 그

닥 복잡하지는 않을 게요."

효원이 은밀히 건넌방으로 부른다 하기에, 그저 어른 안 보시게 장만할 무엇

이나 있는가 하고 들어갔다가 뜻밖에도

"오류골댁 작은아씨를 뫼시고 대실 우리 친정에 좀 가 주오."

하는 뜻밖의 말을 듣고는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한 황아장수한테 효원은 간찰

한 통을 내밀었다.

"작은아씨는 대실까지 같이 들어가지 말고, 그 못 미쳐서 대실로 가자면 강 이

쪽에 강골마을 뒷산이 있어요. 약도는 여기 있소, 거기 안행사 암자에다 일단 모

셔 놓고 혼자 들어가시오. 사람들 이목이 번다하니 사단 있는 기색 띠지 말고,

우리 친정 안어른 찾어 뵈입게 되거든 이 편지만 전해 드리면, 무슨 말씀이든지

하실 게요. 장사허는 사람이 봇짐 지고 마을에 오가는 것은 항용 있는 일이라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지는 않을 테고, 믿을 만해서 내가 긴히 부탁하는 것인즉,

잘 좀 배행해 주시오."

행자는 서운치 않게 주겠다는 말도 곁들이는 효원에게 그네는 영문을 묻지 않

을 수가 없었다. 일에 대한 짐작이라도 있어야 발설은 안할망정 만일의 경우에

대처를 할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그 작은아씨가 본디 신체 강골은 아닌 몸이 왜 그런지 근년에 많이 쇠약해져

서, 당혼은 했는데 회복이 쉽지 않어 시숙부모님 속 깊은 근심이 천 근이신지라,

부처님의 자비 가피를 입어 보려고 영험 있는 절에 피병 비접을 가시는 것 아니

겠소."

"펜찮으신 몸이먼 가차운 디가 더 좋을 거인디, 해필 그렇게 멀고 먼 디로 가

실라고요잉."

황아장수는 순간 짚이는 자락이 있었지만 낯색으로도 드러내지 않는 능숙으로

짐짓 진지하게 미간을 모았다. 이런 경우에 말하는 사람의 치명적인 체면은 절

대로 손상시키면 안되는 까닭이었다. 그러면서도 이 비밀의 덜미 한쪽을 제대로

파악하여 쥐고는 있어야 일에 그르침이 없는 법이어서, 단도직입으로는 말을 못

했지만 변죽을 울려 나름대로 갈피를 추려 들었는데.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일은

곧 '잊어 버려야'할 일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던 것이다.

"호성암도 바로 여근디요 왜."

"혼인 안한 처자가 병이 깊어 집을 두고 절에가 앉았다면, 남의 입살에 흉한

소문 오르내리기 십상이고, 회복되어 내려온 다름에도 추측이 무성할 것 아니

요? 더욱이나 인근 마을 너나없이 아무라도 드나드는 호성암에 아는 얼굴 자꾸

만 비치면, 휴양은커녕 장터거리에 나앉은 것 마냥 인총에 시달릴 것이 불문가

지라. 아예 낯선 곳에 가서 좀 쉬려는 것이요. 그러고 그 안행사가 약사여래 가

피력이 여느 데와다르다고 들었소. 약수가 아주 좋다 합디다. 효험들도 많이 보

고."

"예에... 그러시겄지요하먼."

"사람들한테는 작은 아씨네 외가 쪽에 가셨다고 해 둘 터이니 그리 알고, 밤이

깊어지거든 누구 눈에도 안 뜨이게 뫼시고 가 주시오. 무단히 오해살까 두려우

니. 이 밤 안으로 마을만 벗어나면 어디서 잠시 눈 좀 붙이고는, 인시말(새벽 네

시 반 지나)에 남행 첫차 있을 겝니다. 그걸 타고 남도 도경을 넘어서 득량역이

어딘가 영념하고 있다가 놓치지 말고 잘 내리시오."

참으로 그럴 만한 피병 비접이라면 당사자의 부모가 엄연히 곁에 계신즉, 자

기를 불러도 그분들이 불러야 옳은 순서인데, 어찌 오류골댁에서는 한 마디 전

갈도 기척도 없고, 큰집 오랍의댁이 사촌 시누이 종시매 일에 이토록 은밀 엄숙

하게 주장을 하는지, 소견 조금만 드린 사람이면 짚어지는 바 있을 것이었다.

피신... 이로고나.

황아장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때, 효원의 깎은 듯한 이마에는 진땀이 돋

고 있었다. 대쪽 같은 허리를 곧추세운 그네가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황아장수

한테 박아 넣으며, 호겁스럽게 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면서도 상대방이 결코 이

일을 함부로 할 수 없게 하는 위엄으로 당부하는 모습은, 젊은 새아씨였지만 닳

고 닳아진 자신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기품이 있었다. 아쉬운 것은 저쪽인데

도.

그런데 그만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일이 어긋나 이렇게 옹구네 집으로 오고

말았으니, 요행히 매안 문중 사람들한테만은 안 들킬 수 있다 치더라도 엎어지

면 코 닿는 거멍굴의 옹구네 눈에 걸려 버린 점이 황아장수는 내내 편편치가 않

았다.

비록 이렇게 발은 뻗고 있지만.

황아장수는 강실이의 팔다리를 주무르는 옹구네와, 요대기 위에 놉히어진 채

아직 정신이 들지 않아 숨소리조차 바스라지고 있는 강실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난감한 한숨을 삼켰다.

알 수 없는 일이여.

양반의댁 구슬 같은 작은아씨가 이런 사람을 따라서 야반도주 웬 말이며, 구

름솜 꽃이불을 누구 덮으라 내버리고 천하 상것 거멍굴의 아낙 이부자리에다 몸

을 의탁헌단 말이까아.

흡사 무슨 흙탕물 소용돌이 물마루에 한 조간 널빤지가 뜬 것처럼 얇고도 위

태로워 보이는 요대기를 그네는 안스럽게 눈 주어 보았다. 그네가 지금껏 다리

가 아프게 걸어다니며 살아온 세상을 걸고 말하거니와, 앞으로 그 요대기 위에

탄 강실이의 인생이 일엽편주 처량하고 서러우면 서러웠지 결단코 순탄할 리 없

을 것이어서였다.

거기다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물살이 여린 곳으로 보내 보려고, 오죽하면

자기같이 명색 없는 사람한테 사공 노릇을 좀 해 달라는 새아씨 효원의 소청이

무색하게, 지금 한밤중의 흙탕물 깊은 물 속에다 그만 텀벙 노를 빠뜨려 버린

꼴이 되어, 내일 일을 궁리하기 난처하고 착잡한데.

옹구네는 옹구네대로 맺히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넘의 재산이 되는 사람은 좋겄지맹."

바가지 끝에 잇달려 나왔던 사람 탄식이 덜 끝난 것이다.

황아장수는 정수리를 긁적이며 대꾸하였다.

"내가 나한테 내 값 허능 거이 곧 사램이제, 머 누구보고 내 값 멕여 보쇼오

헌당가잉? 개 돼야지라먼 몰라도. 근으로 달어 팔 것도 아니고."

"그것도 호강시런 소리요. 나는 이날 펭상에 누구한테 값이 되야 본 일이 없는

것맹이요 왜."

"벨일이네. 멋 헐라고 너므이 저울 눈금에다가 나를 달이어? 그거이 또 옥황

상제 천평칭이라먼 혹 모르겄지만, 그놈도 다 지가 깎은 지 눈금으로 저울 달

거인디, 그 저울에 개버우먼 헛덕깨비고 그 저울에 무거우먼 금방석잉가 머? 아

장에 가 바아, 금방 그 자리에서 그 사람 손에 산 물건도 돌아섰다가 다시 재

보먼 눈금이 틀려지는디? 하찮은 물건도 그러는디 사람값을 어뜨케 넘의 저울에

다 매긴다냐아."

요거이 어따가 정 둔 놈을 뒀능게비구나.

"나는 천지에 혼자요. 나 죽는대도 울어 줄 놈, 씨도 없소이."

"베락맞겄네에. 생떼 같은 자석 두고 먼 소리여 그게 시방. 자가 자다가 듣겄

다."

"서러워서 그러요, 서러워서. 오늘따라 내가 복장이 탁 터져 불라고 그래서어.

내 속을 나나 알제 누가 알어 긍게."

"우리도 잣대 들고 비단 지고 장사 댕게 보지마는, 내 잣대로 내가 눈김 재서

띠여 준 비단도 같들 않당게로? 내 손도 틀리는디, 넘의 손에 왜 나를 재냥게

그러네이, 꼭."

"그건 다 딛기 존 소리고."

아이고오, 거그 조께 어뜨케 비집고 누워서 눈 좀 붙여보시요예.

옹구네는 황아장수한테 납작갱이 베개를 밀어 주더니

"나 요 여그 앞에 얼릉 댕게올랑게."

먼저 자라, 하면서 지게문짝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는, 방안에 강실이를 데려다가 제 눈앞에 눕혀 놓았을 때와는 홀깍 뒤

집히게 달라지는 심사로, 휘잉허니 춘복이의 농막을 향하여 바람을 갈랐다. 바람

갈라진 자리에 새파란 어둠의 날이 섰다.

자정이 이미 넘어 거멍굴의 무산 날망 구름 엉긴 마루가 침울하게 시커먼 기

슭에, 쥐죽은 듯 웅크린 채 엎드리어 숨을 삼킨 오두막들의 버섯 지붕이, 집집마

다 마치 먹물에 잠긴 어깨를 겁먹어 잔뜩 오그린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데.

오직 당골네 백단이네 문짝만이 씰그러지는 주홍빛으로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을

뜨고 있었다.

내우간에 쭈그대고 앉어서 디지게 뚜드러 맞어 찢어지고 터진 걸 디다보고 있

겄지맹. 대관절 이런 노무 인생들은 멋 헐라고 세상에 나는 거이여어.

춘복이의 외떨어진 농막 문짝도 백단이네처럼 불그레 핏빛을 띠고 있었다. 이

캄캄한 오밤중에 두 집의 불빛 젖은 문짝들이 이만큼과 저만큼에 잠 못 들고 껌

벅이는 것이, 어쩌면 피에 엉켜 걸레가 되어 버린 그들의 남루한 옷자락 같기도

하였다.

하이고오. 이 총중에도 만동이는 백단이나 있제. 마느래도 없는 너, 찢어진 살

피뭉텡이를 누가 그나마 ㄸ어 주고 걷어 주겄냐? 나배끼 없제. 니께잇 거 참말

로, 직사허게 내 대신 덕석몰이로 뚜드러 패중게 회나 그 냥반들이 미운 게 아

니라 곱드라. 내 ㅅ이 다 씨여언 허드라고. 니가 대관절 머이 그렇게 잘났냐? 잘

나기를. 가진 것도 앙껏도 없음서.기껏해야 머 하나 달고 있다고 그렇게에, 그렇

게에, 유세를 헝만잉?

아이고오, 던지러라. 던지럽고 던지럽다. 퉤에이.

젊으나 젊은 년이 지대로 살어보기도 전에 새파란 서방 잡어먹고, 무신 염치

로 좋온 날을 보겄다고 이 수모를 다 당해야여어. 긍게. 내가 미친 년이제. 너

머라고 해서 멋 허겄냐. 내가 미친 년인디.

그런디, 그 미친 년이 너한테는 기가 맥힌 은인인 것을 인자 어쩔래?

너는 뚜드러 맞니라고 아무 정신 없을 적에, 오매불망 고운 님은 쥐도 새도

모르게 야반도주 헐라는 것을, 내가, 바로 내가 잡어 왔니라. 잡어다가 시방 내

방에다 가둬 놨니라. 긍게 내가 포도대장이제. 그년 강실이란년한테는 그게 바로

감옥이고. 인자 강실이는 어디로도 못 간다. 나한테 잽힜는디 어디로 가? 못 가

제. 강실이 내가 잡고 있는 한 춘복이 너도 어디로 못 가제. 내 손에 잽헤 있을

거이. 내가 이 오장 갈갈이 찢어지는 일을 자청해서 헐 때는 다 심이 있느라.

양반의 멩당 훔칠라다가 저 집구석 누구 하나 옳게 죽어나갈 것이다. 인자. 그

렇게도 모질게 뚜드러 맞고 살이 터져 뼉다구 흐옇게 드러났는디. 만동이 저거

종내 살까? 덕석 벳겨 내는디 봉게로 살점이 개양 덕석에가 덩클덩클 묻었등만.

참말이지 끔찍허고 참혹허드라. 좌청룡 우백호가 대관절 머이간디 죽은 조상 뼉

다구가 산 자손 생목숨 생뼉다구를 잡능고오.

아니여, 그런디, 나도 그 속을 알겄어.

죄청룡 우백호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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