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1. 7

카지모도 2016. 6. 23.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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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15 1991. 7. 1 (월)


한 이익집단의 조직 속에서 그 조직의 속성에 반하는 어떤 공의를 내세운다는 것은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다.

그 조직과 결별할 것을 작정하지 않은 다음에는 거의 불가능한 용기가 필요하다.

경제논리로 살아가야 하는 이 소시민들의 비겁함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평가를 하실지.


젖엄마, 애순이가 생각난다.

젖엄마 젖먹이인 내게 맹목적인 애정을 베풀어주었던 여인, 나는 그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

서울 어딘가에서 늙은 영감님과 함께 살고 있을 젖엄마.

나는 현상에 매달려 허우적거릴 뿐이지, 과거를 보듬어 사랑할 능력이 없는 나의 그릇은 이정도의 용량밖에 되지 못함이 슬플 따름이다.

다만 그 놈의 경제 탓만 하면서.

이른바 의리가 있다는 것, 맺어진 인간관계에 대하여 지속적인 성실을 유지한다는 것. 이것은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 어떤 도덕적인 차원으로서 윤리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런 의리와 윤리의식이 내게는 많이 결핍되어 있음을 자각하고는 그 또한 슬플 뿐이다.


일요일 한낮, 내 방에 앉아서 회색공간의 커단 mas를 내려다 보며 소주를 마신다.

이계진 아나운서가 쓴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을 읽으며.


이틀째 숙면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간밤에는 숙면이루다.

그러나 목구멍에는 짙은 감기기운이 어정거리고 있다.


월요일 비 온다.

베드로후서 읽고 기도.


16216 1991. 7. 2 (화)


장마전선은 토끼 모양의 한반도를 겹겹으로 에워싸 당분간 여름 해를 보기 힘들 것이다.


최태용의 반발.

달래어 어제 오후부터 공구실 업무를 김경곤에게 인수인계 하게 하다.

해고하지 않을거라는 내게 그는 확실한 보직을 원한다.

그러나 위에서 의도하는바는 그를 쫓아내자는 것인데 나는 최대한 외풍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야 한다.

그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상사로서의 의무인 것이다.

십수년간 일해 온 직장을 파리 목숨처럼 잘라버릴수는 없다.

조직과 눈치의 틈바구니에서 그 부당함을 내세운다는 것이 지독하게 어려울지라도.


콘택600 과 쌍화탕, 약에 취하여 늘어지는 오후.

감기기운은 앗쌀하게 떨어져 주지 않는다.


꿈, 지자제 선거, 이선희 등장. 낡은 필름의 고장난 영사기에서 비추는 영상처럼 자꾸 반복하여 끊어진다.

꿈 속에서도 이건 엉터리다 엉터리다하고 답답해 하다.


베토벤 첼로소나타 3번의 1악장.

저 고운 음악.

빌헬름 캠프의 피아노, 피에르 푸르니에의 첼로.


16217 1991. 7. 3 (수)


깨어 일어난 온 몸은 그저 그대로 기분 나쁜 미열과 함께 소강상태 그대로 몸뚱이를 지배하고 있다.

또 얼마나 진을 빼놓으려고 이러는지.

초장에 병원에 찾아가야 한다.


꿈- 꿈 속에서 나는 주체적인 캐릭터를 맡지 못하고 있다.

셋집, 남의 화장실, 눈치밥, 남의 동물, 남의 사람.

곰곰히 생각하여 보면 내 것, 내 소유로서 어떤 사물이 나타난 적이 있었던가.

내 것이란 개념이 내 무의식속에는 없는 모양인지.


어제는 종일 흐린 하늘에서는 빗방울 듣다 말다 한다.


英이를 생각한다.

아침 일어난 부스스한 모습에서는 어렸을적의 그 맑고 영롱함은 없다.

불만과 고집 가득한 표정.

무엇이 이 아이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을까.

단순히 사춘기적 반항? 어떤 부정적인 생각? 어떤 허무감? 어떤 현실과의 갈등구조? 막연한 공상?


에레미야, 유다서 읽고 기도.


16218 1991. 7. 4 (목)


어제 병원 가다.

주사 맞고 하니까 기분학적으로 다소 나은 듯 하다.

그리고 머리카락 자르다.

이것도 훨씬 기분을 개운하게 한다.


갱년기, 아침 일어나서 화장실에 앉아서 신문을 펼치면 활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급격한 시력 감퇴, 돋보기가 필요하다.


서영은 ' 먼 그대'.

사막을 묵묵히 걸어가는 낙타 한 마리.

모든 고통을 그저 받아들이는 슬픈 눈의 낙타.


16222 1991. 7. 8 (월)


음울하게 내리는 빗소리들으며 일요일의 오후를 시나브로 취한다.

밤중에 서울 媛이에게서 전화 왔던 모양.


꿈- 넓은 병원의 한 병실에서 죽음에 이르는 여인, 복잡한 인생을 살아온 그 여인은 창백하고 순결한 모습으로 죽음을 그리워하고 있다.

나의 입회하에 그 여인은 병원의 구석 뜨락에서 어떤 사나이와 결혼식을 올린다.

슬픔과 아픔, 꿈 속에서도 내 눈에서는 눈물이 넘처 흐른다.


월요일.

아, 비는 그치고 찬란한 아침이다.

화장실에서 우찌무라 간죠의 미국생활의 단편을 읽고, 햇빛 가득한 내 방 책상 앞에 앉아서 시편 6편을 읽고 하나님을 맞는다.


英이를 도와 주소서.

찬란한 여름 아침, 이 일상의 시작이 진부하지 않도록, 늘 새롭도록.


16223 1991. 7. 9 (화)


낭만적인 환상은 추억 속의 어느 부분의 재현일까?

마흔 훨씬 넘은 나이에 환상적인 낭만이라니.

불혹에 고작 사춘기적인 회억이란 웬 말인가.


珍 아빠와 통화.

국세청 감사, 7200만원, 1500 주, 배당금 800만원... 입 맞추기.


한참을 잘 못되어 있는 이 사회.

지도층이라기 보다, 경제적인 상류층의 문화의식- 유일한 목표는 부의 축적, 하나 갖은 사람의 것을 빼앗아 백을 채운다는 뚜렷한 부도덕의식은 없겠지만 그 맹목의 목표는 이제 그 짓도 서슴치 않을 것이다.

이런 맹목의 경제 가치관이 이제 온 백성을 물들여, 조야하고 황폐한 세상천지를 만들어 놓아버리고 말 것이다.

무식한 사람들의 인격은 갈수록 추하여지고, 무산자들의 품성은 거칠기 짝이 없으며, 있는자들의 포즈는 더 더욱 교활해질 것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싫다고 싫다고 짐짓 괴로운 폼을 잡아 본다는 것으로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새벽3시 30분.

마루에, J가 論語공부하던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아서 소리내어 이사야 9장까지 읽는다.

무릎 꿇어 기도.


내게 없는 중요한 것, 그것은 사랑.

먼저 베푸는 사랑. 상대적이 아닌 일방적인 사랑.

내 지금 삭막한 이유, 주님이 멀리 느껴지는 이유.

그것은 내게 없는 그 사랑때문.

사랑.


16224 1991. 7. 10 (수)


無垢하다는 것. 순박하다는 것.

어린아이의 품성을 갖을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덕이다.

어른이 이런 품성을 획득할수 있는 방법중 하나는 엄청난 용기로서, 버리기에 나설 일이다.

소유를 버릴수 있어야한다. 거기서 빠져 나올수 있어야 한다.

훨훨 벗어버릴수 있어야 한다.

어린아이의 품성을 획득하는 사람은 가장 큰 자유를 얻은 사람이다.

이것이 최초의 자유의 본질이었다.


나는 결코 들어가지 못하는 이러한 관념의 세계를 겉으로만 껴안고 울고있는 것이다.


어제 철구조물 제작의 표준 품셈 만들다.

장마철 변화무쌍한 표정의 날씨.


타성의 술마시기.

쓰러져 잠들어 다시 깨어 일어난 아침.


내 깊은 곳의 주님은 돌아가시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아이가 되어서.


16225 1991. 7. 11 (목)


서영은의 소설 '관사 사람들'

사람들에게는 본질적으로 악한 품성이 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유별나게 남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아주 징그러운 뱀 한 마리를 키우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기심을 넘어서서 타인을 향한 가해본능, 자기보다 착한 대상을 향한 까닭없는 그 맹렬한 심통.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정도가 아니라 그 논바닥에 벼락이라도 떨어지기를 기원하는 열망.

그 까닭없는 증오를 받고있는 선한 영혼은 피를 흘린다.

나 또한 가해자이다.

그리고 나 또한 당하는 자이다.


장마는 소강상태로 계속 흐린 날씨.


오늘부터 아파트 물탱크 청소한다고 사흘간 단수.


16226 1991. 7. 12 (금)


비 내리는데, 최상천 차 얻어타고 퇴근하면서 차 속에서 듣는 뽕짝 유행가 가락.

무언가 애틋하고 아른하고 달콤하기도 한 정서에 잠기게 한다.

정녕 인생이란 유행가의 정서와 다름 아니다.


흐릿한 창문, 금이 간 유리창에는 신문지로 땜빵이 되어있고 그너머 붉은 백열등의 그 바알간 빛의 테두리가 다스리는 한줌의 둥근 공간.

추억처럼 아스라한 옛 이야기가 떠오른다.

살이들의 이야기, 슬프고 기쁘고 아기자기하다가 서러운 그 이야기들.

유행가 곡조와 가사.


16227 1991. 7. 13 (토)


환경청 제출 서류 어제 왼종일 고도로 집중하여 대략 마무리한다.

어떤 자료도 없이 막연하여 뜬구름 잡는 것과 같았으나 한동안 집중하니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일본자료도 번역하여 이리저리 논리를 주어맞추니 제법 동기부여있게 마칠수가 있었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지, 통과는 가능한지는 차치하고라도.


요즘 내게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英이.

무엇이 그 아이를 그토록 불만 가득하게 하는가.

배처럼 사근사근하고, 큐리처럼 영특하며, 백설공주처럼 어여뻤던 내 딸.

그 찬란하였던 보석이 어쩌다가 이토록 멀뚱하며, 반항적이며, 불성실하게 만들었단 말인지.

무엇이 그토록 집과 공부를 싫게 하는 것인지.


나와 J의 그동안의 막중한 역할 수행자로서의 치명적인 하자를 모르는바 아니지만 지금 와서 어쩌란 말이냐.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나 英이는 필사적으로 그러한 기회를 회피하고 있다.


어제 저녁부터 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오아시스, 그 시원함이란.

이런 사소한 일상의 불편에도 나는 얽매이는 것이다.


16228 1991. 7. 14 (일)


토요일 오후 퇴근하며 SJ엽 에게 이끌려 한잔 두잔으로 시작하여 결국은 취하여 버린다.

얼근하게 취하여 돌아와 TV에 정신이 빼앗겨 있는 英이의 프로필을 달력 뒷장에다 그린다.

네 가장 못났을때의 모습이라고 딸아이에게 준다.

그러나 英이는 그저 일관된 무관심의 표정.


16229 1991. 7. 15 (월)


꿈-

보생의원은 성이다. 회랑 발코니 지하실 곳곳에 쌓여있는 유물들. 그 유물들은 아마 수만가지 아픔과 슬픔의 기억들의 덩어리인 듯.

이제 해체되어 몰락을 기다리는 목조건물. 무슨 잔치인지 고모 삼촌들, 사촌들.

부르조아의 몰락을 예견하는 최후의 잔치인가.

거기에 실비아 크리스탈이 출연하는 음란영화의 장면들이 오버랩되고.

성적인 환상과 배변의 무엇이 뒤엉크러져 데포르마숑된 상황이 연출된다.


꿈 속에는 어쩌면 내가 자유로울수 있는 열쇠를 선사할 미지의 세계에서 보내온 어떤 메타포로서의 메시지가 있을수도 있을게다.

나는 그것을 찾을수 없는데, 정신분석을 받아 보았으면 하는 헛된 생각.

아, 내 살아옴에서 얼마나 많은 강박의 요소들이 내 깊은 곳에 숨어서 날카로운 비수로서 나의 심장을 찌르고 있는 것일까?


새벽. 반투명의 뿌연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산의 자태는 무척이나 아늑하게 보인다.


산을 오른다.

곳곳에 커다란 지렁이들.

봉래산에는 뱀이 없는 대신 지렁이가 징그럽다.


16230 1991. 7. 16 (화)


어제 구청방문.

환경담당 직원의 애매모호함.

어려운 듯 쉬워 보이고 쉬운 듯 어려워 보이는 소각로 허가문제.

일단 내 작품을 제출한다.

환경지도계장의 헛웃음은 다만 동그라미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호우, 폭우랄까?

퇴근무렵인 6시경 무섭게 쏟아져 내린다.

바람도 없는 빈 공간을 수직으로 내려 꽂히는 빗줄기는 그야말로 장대비라는 말이 무색치 않다.


홍수가 진 것같이 범람하는 태종대 아랫길을 PP갑 의 차로 돌아 태종대에서 술마신다.

폭우 속의 정취에 취한 모양이다.

PP갑 , SJ엽 , 정일우등과 어울려 마셔 시나브로 취한다.

만취상태에서 PP갑 은 차를 몰아 어찌어찌 집에까지는 온 모양이다.


혼곤히 취한채 잠이들어 깨어 일어난 몸뚱이는 아직 알콜기운 가득하고.

억지로 일어나 몸을 추스린다.


어제 아가사 크리스티 '끝없는 밤' 읽다.

년전 TV에서 본 아가사 크리스티의 영화, 그 영상은 아직 내게 남아있다.

영화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아가사 크리스티의 수법이란 굉장히 단조로운 것인데, 그 구성과 수법이 단조로운 만큼 그 꾸며낸 이야기는 곧바로 흥미와 서스펜스로서 사람들을 이끌어 들어간다.

뻔한 복선에 사람들은 감탄하게 되고.

거기 첨가된 중요한 양념은 작가는 의식하지 않고 썼겠지만 영국이란 사회 묘사, 어느 영국 시골마을의 분위기와 동네 여편네들의 섬세한 심리묘사.

여하튼 그녀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다.


16231 1991. 7. 17 (수)


어제 점심시간에 시내나가 연극 '세일즈 맨의 죽음' 티켓 구입한다.

그리고 일전 목공반에 부탁한 목재를 한아름 PP갑 차 트렁크에 차곡차곡 싣는다.

1번 어창용의 방부처리된 합판과 제재된 각목 한아름, 베란다 바닥을 포장할 작정이다.


英이 시험치르다.

학교에서 일찍 나갔다는 아이가 밤 11시가 되어서야 돌아온다.

교회에서 있었다고.

어쩔거나.


제헌절 휴일, 오늘 아이들과 연극보고 난후 英이랑 어떤 진지한 대화의 분위기가 잡혔으면 얼마나 좋을까?


16232 1991. 7. 18 (목)


俊이는 이제 한 몫하는 장골이다.

신장도 제 누이를 육박하는데, 단지 황새같이 가는 팔다리가 아비에게 연민을 일으키게는 하지만.

俊이와 휴일 오전을 땀을 뻘뻘 흘려가며 베란다 바닥 공사.

비만오면 깔려있는 스치로폴에 물이 차서 장판에까지 질퍽질퍽 물이 올라오는 바닥을 모두 걷어내고 타일바닥 위에 각목을 깔고 그 위에다 목공반에서 규격대로 제재한 합판을 덮는다.

이제 비가 몰아쳐도 문제없는 내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서 창문을 때리는 빗발과 먼 바다에서 허연 배를 뒤집어 아우성치는 노도를 느긋하게 조망할수도 있을 것이다.

俊이가 정말 수고하였다.


오후 英이와 俊이 데리고 무더운 거리를 지나 문현동 시민회관.

극단 '星座'의 아더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英이는 몇번 연극관람 경험이 있지만 俊이에게는 얼마전 '에쿠우스'에 이은 두 번째의 관극경험이다.

윤주상의 윌리 로오먼은 훌륭하였다. 린다 역의 선우용녀 또한 좋았다.

다만 목소리의 옥타브가 높은 그녀의 톤이 다소 거슬렸지만.

그러나 비프와 윌리의 형은 미흡하였고, 무대장치는 좀 답답한 느낌이었다.

윌리 로오먼은 기뻐서 독백한다.

"비프 그 녀석이 아비에게 안겼어! 그 놈은 이 애비를 좋아하고 있는거야!"

나는 英이나 俊이에게 이 대사를 들려주고 싶었던 거다.


돌아오면서 남포동에 내려서 주물럭 시키고, 아이들 냉면 먹이면서 英이에게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얘기한다.

그저 요령부득의 말이지만, 英이는 아비의 마음을 알 것이다.

부디 곱게 곱게, 순결하고 순결하게, 요동치 않는 자세로 제 인생길을 걸어가기를.

제 감성을 스스로 제어할수 있는 냉철한 이성의 사춘기이기를.


俊이에게서 자상한 마음씀과 배려깊은 눈길을 읽을때가 많다.

녀석에게는 아비 어미를 향한 애정이 온 몸에서 느껴진다.

녀석이 심통을 부리고 있을때라도 나는 그것이 사랑의 표현임을 대번에 알아챌수 있는 것이다.


16234 1991. 7. 20 (토)


새벽 화장실에서.

돌연 왼쪽 옆구리가 슬며시 아프기 시작하더니 그 통증은 수직으로 상승한다.

곧 끊어질 것 같은 아픔, 엎드려 몸부림치면서 뒹군다.

극심한 고통. 고통의 크라이막스.

물밀 듯 밀려오는 그 고통의 순간에 얼마나 육신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주여! 주여! 이토록 고통스러운 몸뚱이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하고 울부짖는 진짜 마음은 육신을 따라 모든 것이 소멸된다는 지극히 비기독교적인 소망이 가득할 따름이다.

석가는 生老病死의 四苦를 갈파하였지만, 뉘라서 그 고통을 뛰어넘는 드높은 영혼을 가질수있으랴 하는 否定.


한시간여를 그렇게 뒹굴었을까?

마구 쥐어뜯으며 흔들어대던 그 통증의 괴물은 슬며시 사라진다.

참담한 고통의 흔적만이 앙금처럼 영혼에 남아있을 뿐이다.


맹장염은 아닐 것이고, 처음 조우하는 그 고통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일종의 위경련이었던지? 변비로 인한 장의 발작인지?

정체불명의 그 괴물은 오늘 새벽 나를 짓밟고 사라졌으나 나는 도무지 그 정체를 모른다.

막연하게 음주? 저녁의 과식?


찬송가 틀어놓고 英의 방에서 기도드린다.


아이들 오늘부터 방학이다.


16235 1991. 7. 21 (일)


어제 안벽 앞 바다의 준설을 위한 구적도 작성.

내 솜씨는 독특하다는 자부심.


아이들 방학.

英이 우수상 받아오다.

그러나 전화 한통없이 친구집가서 6시 넘어 돌아오는 아이에게 공연히 안절부절.


俊이는 선행상 받아와서는 나중에야 툭 내던지며 하는 말.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면 하나 주는 상인데요."


PS곤 , JN영 , KH근 부부들 연산동 갈비집에서 회동.

나 역시 정말 모처럼 J와 동부인해서 외출한 것.


본격적인 여름.


16236 1991. 7. 22 (월)


일요일의 한낮은 늘 게으르다.

무위로운 허망함에 빠져 있을때의 구원은 또한 늘 술이다.

지독한 중병이 아닐수 없다.

어제 들은바 JN영 이도 역시 이러한 중병에 빠져있는 모양이다.


여름의 바다는 저토록 짓푸른데 나의 자의식은 음주로 인하여 더욱 무성하고, 잠 속에서도 그 자의식은 심층심리에 파묻혀 있는 무의식을 일깨워 파노라마로서 아픈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창조적인 삶.

무언가 매일매일 새롭게 이루어 내는 것.

무언가 매일매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

그 성취감이 기꺼워서 마시는 술은 무위의 술과는 얼마나 다른 것인가.


여름은 익어간다.

일출의 태양은 벌써부터 싯벌겋게 달구어져 있고 바다는 짓푸르다.


16237 1991. 7. 23 (화)


불볕더위.

남쪽은 성하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맑은 날이지만 중부 이북은 집중호우로 수십명의 사상자와 수십억의 재산 피해를 내었다.

좁은 반도의 위도에도 이토록 변화무쌍한 날씨의 디테일이다.


어제, 구청 환경과장 지도계장등 환경과 직원 예닐곱과 초밥집에서 비싼 점심 접대하다.

그런데 나중에 총무과장에게 전화를 하여 환경청의 감리를 받으라나 어쩌라나.

그렇다면 여태 구청과 접촉해 온 것은 무어란 말인지?

어처구니없어 박상무에게는 차마 보고도 못한채 추이를 지켜보기로 한다.

내가 설칠 문제가 아니고 업체를 선정하여 감리업무를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 건망증은 갈수록 도를 더한다.

무언가 중요한 사안이 머리속을 채우고는 있는데 정작 그것이 무언가는 기억해 낼수가 없다.

다만 무언가 해야할것이 있는데 있는데 하고 답답해 할 뿐이다.

이제 언제나 메모를 습관화하여 거기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16238 1991. 7. 24 (수)


감리대행업체인 한일환경의 백사장 오게하여 면담하다.

우리나라의 환경보존법은 말하자면 고형연료는 원칙적으로 태워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태우기 위하여는 거액의 방진시설과 메인터넌스의 시스템을 갖추어야한다.

구청 차원의 폼잡는 공무원 따위의 의견은 문제가 아니다.


퇴근하여 형네 들러 형과 영도경찰서 아래 보신탕 집에서 소주마신다.

영도다리밑 노란 가로등이 바닷물에 거꾸로 길게 반사하는 고흐의 그림을 바라보며 마시는 술.

다시 대교아파트 들렀으나 어머니는 이미 주무신다.


쟁쟁 쟁반을 울리는 더위.

한낮 에어컨의 바람이 시원한 사무실은 바야흐로 낙원이 아닐손가.


그러나 오래도록 새벽을 맞지 못하였구나.

주님, 척박하지 않게 늘 기분 좋게 하소서.


16239 1991. 7. 25 (목)


퇴근하여 대륙기업 김사장의 접대로 초밥집에서 사시미먹다.


잡다한 일이 널려있는데, 우선은 소각로 건.


무더위 속에서 기타 선율 들으며 가뭇 잠이 들었으나 잡다한 꿈에 시달리다.

英이, 英이...


새벽 바다의 정적, 구름 속에 가리워진 햇살은 은은한 색조를 바다에 물들인다.

정적을 깨는 영롱한 새 우짖는 소리.


16240 1991. 7. 26 (금)


한낮, 까부러질 듯 피곤이 엄습하여 회의실 들어가 한참을 엎드려 있는다.

밖은 찌는 무더위지만 에어컨의 바람에 한기를 느낄 정도여서 걷어 올렸던 작업복의 팔소매를 다시 끌어 내린다.


이은성 '동의보감' 읽다.

허준.

정일품에 이르는 허준의 역정도 재미있지만 의술이라는 의미를 한번쯤 생각게 할만한 소설이다.

俊이에게 방학중 이 소설의 일독을 권유하였으나, 녀석의 이상스런 고집은 아비의 권유를 점잖게 거절한다.


내일이면 휴가.

모차르트의 다소 어두운 정서의 교향곡 40번.


16241 1991. 7. 27 (토)


내일부터 하기휴가이지만 편한 휴가는 되지 못할 듯.

필리핀 근해, A급 태풍이 북상중에 있다.

그러나 오늘도 성하의 날씨는 먼 곳에서 으르렁거리는 태풍쯤은 아랑곳없이 이글거린다.


단체협약은 지엽적인 문제로 난항을 계속하여 미상불 힘들게 생겼다.

한진중공업은 또 작업거부, 그 사람들은 이제 타성이 몸에 배여서 제대로 일이나 할수 있으려는지.


요즘 신문 방송의 뉴스는 온통 오대양 사건으로 떠들석하다.

광신, 종교란, 특히 기독교의 하나님께서는 맹목의 신앙을 요구하실진데 모든 신앙은 광신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왜곡된 정신이 만들어낸 엉터리 도그마를 맹신하는 것, 신앙의 본질을 이리저리 비틀어서 창출해낸 도그마.

말하자면 그 도그마의 교주 자신도 왜곡된 자기암시로서 그것을 신앙하니까 신도들이야 어쩔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살인과 집단적인 자살, 다만 끔찍할 뿐이다.


퇴근하여 내 방 하단의 유리창에 흰 비닐로 선팅하고 책상위에는 유리 밑에다 초록색 당구지를 깔아 개비한다. 한결 안온해진 공간.


16242 1991. 7. 28 (일)


불과 4일 정도의 휴가에 마치 방학을 맞은 아이처럼 해방감을 느낀다.


퇴근하여 무더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레코드와 책 구입.

레코드는 차이코프스키 '현악4중주 1번', 쏘르의 '주제와 변주', '존 바에즈 앨범'.

책은 이병주 '에로스 문화사' 상권과 하권, 전상국 '외등', 최학 '더러운 병', 황충상 '불의 집에서', 유재용 '사양의 그늘'.

테이프는 양희은 '늙은 군인의 노래'와 김민기의 '친구' 가 들어있는 금지곡 테이프 한 개.

그리고 수박 한덩이와 맥주.


낑낑대며 5층까지 들고 올라와 휴가 전야의 해방감에 젖는다.

책 뒤적이고 음악 울리게 하고 맥주 마시는 여름 휴가의 넉넉한 일락.


휴가 첫날 아침.

폭풍은 아마 오늘 늦게나 부산 쪽에 그 징조를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아침바다는 잔잔하고, 다만 안개가 짙게 피어올라서 아치섬의 허리까지 잠기고 태종대쪽의 산마루까지는 완전히 안개에 잠겨있다.


16243 1991. 7. 29 (월)


밤새 광포한 바람이 천지를 휘몰아 친다.

태풍의 전령, "전쟁이다!"고 외치며 천방지축으로 뛰어 다닌다.

오늘 정오쯤 남해안 상륙한다고.

그러나 새벽바다는 자신의 몸뚱이 위를 바람이 달음질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고요히 누워있을 뿐이다.

바람 소리만 들리지 않는다면 내 방 커다란 유리창을 통하여 펼처진 정경은 고즈넉하게 안정된 풍경이다.


'동의보감' 유의태는 反胃에 걸린 자신의 몸뚱이를 제자 허준에게 해부하여 들여다 보게 내어 준다.

읽지 않겠다던 俊이 녀석도 어제부터 이 책에 빠져서 하루만에 상권 중권을 독파하였다.


소리내어 읽는 야고보서.

불을 끄고 기도.


16244 1991. 7. 30 (화)


어제 세찬 바람에 옷을 흠뻑 적시며 회사 나간다.

휴가중의 회사, 팬티까지 푹 젖으면서 생산부 앞에 물막이 작업을 하고 걸려있던 현수막등을 철거한다.

조금 늦게 나온 양,H부장에게 오후 일을 떠맡기고 1시쯤 집으로 돌아오다.

태풍. 뒤집어지는 파도와 유리창을 휘게하는 바람을 감상하며 소주를 마신다.

바람에 유리창이 와장창 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내 방에서 철수하여 마루에 전을 펴 앉는다.

俊이는 동의보감 읽기에 폭 빠져있고, 英이는 4시경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돌아온다.

안테나가 바람에 어찌되었는지 TV도 나오지 않고.

그렇게 부산을 떨던 태풍은 5시쯤 부산을 비껴 북상해 버렸다.


휴가 3일째.

바람은 완전히 가라앉았으나 지척을 분간 못할 안개, 짙은 안개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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