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46 1991. 8. 1 (목)
어제 휴가의 마지막 날.
마이클 더그라스와 찰리 쉰이 주연한 '월 스트리트'.
월가의 돈쟁이들, 자본논리의 비정함.
유선방송에서 중간 부분부터 우연히 보게된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사회주의 종주국의 수도 모스크바, 서구의 문화적인 색채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모스크바의 풍광. 이미 그곳에도 자본주의의 병균이 침투하였는데, 아직은 황금이 빚어낸 계급 격차가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에 그 곳 사람끼리의 그 정은 소박하게 아름답다.
휴가 마지막 밤은 편편치 못하였다.
꿈- 시험, 시험 감독관 어머니.
이른바 징벌하고 문책하는 어머니인가.
새벽, 동의보감의 종장을 읽으며 화장실.
그리고 이틀동안의 묵은 때 벗겨낸다.
보로딘의 '현악4중주 1번'
3악장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현악4중주 1번은 거의 슈베르트를 표절하였다.
차이코프스키도 슈베르트를 숭배하였나?
다시 나른한 진부한 일상의 개시.
간 밤에 비내리고 흐린 하늘.
기도.
나의 주님,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관리하시는 분이여.
요동치 말게 하소서, 안정되게 하소서, 균형있게 하소서.
16247 1991. 8. 2 (금)
회사의 바캉스는 끝이 났으나 다른 곳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피서 씨즌인 모양이다.
TV 화면에는 고속도로에 장사진을 이루어 정체된 차량의 행렬과 그 짜증스런 피서객의 표정을 비춰준다.
서울에서 강능까지 15시간이 걸린다나.
어제 원천징수 영수증과 재직증명서를 형에게 갖다주다.
媛네의 무슨 주식 양도문제.
형은 어제부터 휴가인 모양.
형의 삶의 양태를 엿보는 바, 무언가 창조성향이나 상승을 향한 열정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관계의 개선과 돈독함을 위한 어떤 소명감 역시 보이지 않는다.
나 역시 그러하여, 우리 형제는 기막히게 따분하다.
9시 다 되어 돌아 오신 어머니.
마흔을 훨씬 넘어선 못난 자식들이 바라보는 깊은 주름살의 노파가 현관에 섰다.
슬픔 한주먹, 아픔 한주먹.
황충상 '불의 집에서'
사바의 세계, 온갖 정욕과 욕심과 애증을 안고, 불의 집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깨달을 것, 해탈할 것.
이것은 범부에 있어 무엇일까? 미치는 것, 죽는 것.
아침, 뿌연 안개를 붉게 물들이며 더운 해는 솟았다.
16248 1991. 8. 3 (토)
어제 안과 들렸으나 젊은 의사가 신통치 않아 그만 다니려 한다.
이덕찬씨에게서 얻은 안경테에 렌즈를 끼우다.
새벽 산에 오른다.
봉래산의 자태는 안개의 장막에 가려 보이지 않고, 다가 갈수록 숲의 자태만이 안개의 뿌연 색조를 배경으로 검게 드러난다.
소나무 숲 속 공터에는 젊은이들이 옹기종기 텐트를 치고 기상! 기상!하며 부스럭 거린다.
그 중에는 여학생들도 제법 끼어있다.
남학생들 틈에 끼어있는 여학생- 딸 가진 아비짜리는 좀 그렇다.
그리고 한참후 물을 길어 내려오는데 청학 수양관 앞 길섶에 예닐곱의 남녀 대학생들이 기타에 맞춰 찬양을 부르고 있다.
올라갈 때의 그 그룹이다.
찬양을 부르는 그들에게서 남학생에 섞인 딸 운운하는 낫살 먹은 속물짜리.
고운 화음으로 '우리는 주님의 증인...'
새벽 안개 속에 그 노래소리는 평화롭게 젖어든다.
토요일, 늘 토요일의 기분은 여유로와서 좋다.
존 바에즈 듣고, 시편 94편 일고, 기도드린다.
16250 1991. 8. 5 (월)
일요일, 빗발 흩뿌리는 오후를, 내 방에서 카세트에다 노래를 걸어놓고 따라부르면서 소주를 마시는 일락에 젖는다.
김민기 '친구'.
생각을 달리하는 세상에서 도피하면서, 생각을 함께하는 친구를 그리워하면서 부르는 아주 낮은 목소리의 발라드.
양희은 '늙은 군인의 노래'
슬픈 은유가 녹아있는 행진곡풍의 노래.
정말 좋은 이른바 포크송의 한무리들.
밥 딜런을 아는가, 그대들.
저녁때, 할머니 생신때 제가 그린 유화를 표구하여 선물한다고 표구사 들러서 40분 늦게 돌아온 英이를 야단치는 아비짜리.
이토록 성급하다.
새벽 숲속을, 바람이 수런거리는 산에 오른다.
이제 어슴프레 여명을 밝히는 호젓한 산복도로의 하얀 시멘트 오솔길이 있는 풍경에서, 이국적인 孤寂함과 優雅함이 어우러진 예술적 그림의 영상이 떠오른다. 로코코의 섬세함.
커다란 산의 덩치는 무슨 바로크의 배경으로서 가장 중요한 주제를 주장하고 있다.
16251 1991. 8. 6 (화)
오후 Y부장, P과장 과 함께 '한국생산기술' 방문.
젊은 엘리트들이 모여 개발한 컴퓨터를 이용한 현도 자동화.
그 시스템을 견학하고 설명을 듣는다.
한국생산기술을 찾아가는 길, 수영을 거처 옛 3육군병원 앞을 지난다.
주변의 산야는 깜쪽같이 사라지고 그야말로 상전벽해, 혼잡한 시내가 되어 버렸다.
언뜻 스쳐 지나가며 보는 중대본부는 20년전 그대로 있었고, 그 뒷편 김수영 영감님의 집부근의 모습도 눈에 익다.
잠시 군대시절의 추억이 너무나 옛날인 듯하여 애틋한 감상에 젖는다.
꿈- 모처럼 젖엄마가 주연으로 등장, 중국 길림성에서 수십년만에 모국을 찾아 왔다. 나는 그 아들로서 감격의 상봉. 내 곁에는 사슴같은 눈을 갖은 俊이가 언제나 내 곁에 붙어있다. 젖엄마의 판소리 가락. 어머니와 형도 등장.
새벽 산에 오른다.
이런저런 사념에 젖은채 여명의 대기에 피어 오르는 松香을 맡는다.
돌아와 목욕하고 로스트로포비치의 유장한 첼로 선율로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듣는다.
모처럼 햇님 나왔으나, 아침 저녁의 선듯한 기운은 이미 가을이 배어있다.
기도, 관계의 순수함, 그 깨끗함을 향한 기도.
나의 주님이여.
16253 1991. 8. 8 (목)
어제 7시 못된 다소 이른 시각 퇴근하여보니, J는 어머니 생신 때문에 큰집에 갔고, 英이 친구들이 가득 와서 라면을 끓인다 어쩐다 법석을 떨고 있고, 俊이는 누나 친구들에게 내외를 하여 제 방에 문을 굳게 닫은채 들어 앉아 있다.
숫기없는 녀석같으니.
남북 유엔 동시 가입.
대권 경쟁, 온갖 물밑의 술수들.
오대양, 세모사건은 오리무중.
정치적인 술수의 세계는 나같은 어린아이 차원의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먼 곳의 얘기이다.
새벽 산.
다복솔이 소담한 둔덕 기슭에 풀더미 타는 연기 한줄기 피어 오른다.
새벽이 아니라 황혼인 것처럼.
어머니 생신.
일흔 두 번째.
기도드린다.
16255 1991. 8. 10 (토)
어제는 주룩주룩 참 많이도 비가 내렸다.
J가 한번 심기가 삐닥할 경우, 그녀의 언어는 정말 감당하기 힘들다.
고스란히 당할 밖에.
주님의 마음 한조각 얻어 강퍅한 마음밭을 다스려 미장원에 앉아 머리카락을 정리한다.
그리고 돌아와 목욕하며, 주님이 헤아려주신 마음의 평정을 회복한다.
저녁, 흑백사진과 같은 바다풍경을 바라본다.
4B의 연필을 예쁘게 깎아서 갖은 테크닉을 구사하여 그려보고 싶은 풍경.
물결은 가는 비늘을 반짝이며 東으로 西으로 줄지어 행진하는 것같고, 하늘은 검은 구름이 낮게 드리워 수평선을 더욱 가깝게 하고, 산허리를 휘휘 감은 안개구름은 꿈결처럼 부드럽다.
토요일 아침, 쇼팽의 '발라드'를 들으며 내다 본 밖에 비는 내리지 않지만, 하늘도 바다도 산도 푸른 빛 새벽구름에 젖어 차분히 가라 앉아있다.
마태복음 5,6,7장.
예수님의 마음을 듣느다.
기도.
16256 1991. 8. 11 (일)
소각로 고베항에서 선적되었다.
내일 부산항 도착 예정.
여러 가지 바쁘게 생겼다.
그러나 박상무라는 대신 설처주는 사람 있을테니 내가 나서서 화급하게 설칠 필요는 없다.
토요일 오후의 나른한 여유는 음주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으나 뱃속의 컨디션이 썩 좋지 못하여 참자하고 돌아온다.
헐리웃영화 '붉은 10월'
소련의 최신 잠수함 붉은10월호의 함장은 미국으로 망명하려 하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미소간의 스릴과 서스펜스.
션 코넬리가 함장역이고 또다른 주연의 낯익지 않은 얼굴이 보이는데, 英이는 대번에 알렉 볼드윈이라는 그 배우의 이름을 알아 맞춘다.
공부는 하지 않고 살짝살짝 영화관에나 돌아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아비짜리의 찌든 노파심.
그러나 내 고등학교 시절도 그러했거니.
새벽, 어제 비 내려 풀잎마다 물끼가 촉촉한 산.
봉래산 서쪽 오부능선을 헉헉거리며 걸어서 함지골까지 가서 물을 떠온다.
이마를 흘러내려서 눈을 따갑게 하는 땀, 대지를 딛는 발바닥의 면적에서 그 면적만큼 대지는 내게 대지의 기운을 올려 준다.
16257 1991. 8. 12 (월)
내 방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아니 바다가 나를 에워싸고 있는 그 공간에서 칸소네를 들으며, 책을 뒤적이며, 한잔두잔 소주잔을 뒤집어가면서 나는 일요일 오후를 일락한다.
김용옥과 김우중 '대화'
도올이라는 동양철학가 김용옥, 책의 초반에서 그는 벌써 아메리카나이즈한 속물근성을 노정한다.
재벌회장과 그의 전용기를 타고 여행하면서, 그는 아무리 폼을 잡고 숨기려해도 맘몬의 우상에게 아부하고 있음을 나는 그 책의 행간에서 읽고 있다.
그의 오만은 인기인의 몸짓에 다름아니다.
기실 오만이 아니라 비굴한 것이다.
방대한 지식의 머리로서, 단지 두뇌용량의 그것 하나로서 세상을 농하려드는 무뢰한의 풍모 약여하다.
나는 그의 그 방대한 지식창고에는 근접도 할수 없겠으나 내 느낌철학으로 단번에 그를 간파할수 있다.
이러구러 여름은 잦아들고 있다.
16258 1991. 8. 13 (화)
최학의 중단편 읽다.
'더러운 병'과 최충헌에 반하여 일어선 승려들의 이야기.
요즈음 코오론 크린스의 복용량을 대폭 줄이고 J가 만들어 주는 요쿠르트를 먹는다.
김태경 결혼한다고 회사 방문.
PP갑 등과 어울려 마신다.
늦더위.
어머니는 오늘부터 휴가.
16260 1991. 8. 15 (목)
媛이 基 데리고 어제 내려오다.
국세청 세무조사 건.
J는 S형 어머니, Hw 선생님, 동광약국과 함께 이른 아침 대구 팔공산으로 출발하다.
입시에 영험한 부처님...
英이는 하교행.
두 부자만 오두커니 남아있은 광복절 휴일.
그러나 오늘은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
TV 3시부터 영화 '갈매기의 꿈' 방영한다는데 그거나 기대하기로.
媛이는 오늘 올라간다고.
16261 1991. 8. 16 (금)
광복절, 집에서 俊이와 남아 뒹군다.
'임시정부'라는 다큐멘타리 보면서 애국이라는 公義로운 일생을 사신 분들의 행적에 숙연해 지기도 한다.
나의 본질은 결코 애국이라던가 민족이라는 개념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으면서도 이런 숙연한 감정은 한갖 감상주의자의 치기에 불과할 것이다.
'갈매기의 꿈' -조나탄 리빙스턴 시걸-
리처드 버크의 원작에다 닐 다이아몬드의 음악이 滄波를 넘실대는 빼어난 영상의 영화, 예전 동명극장에서 한참을 흠취했었던 그 감동을 다시 상기케한다.
몸은 곧 마음이다, 마음이 짓푸른 창공을 치솟아 나르면 몸 또한 창공을 나른다. 마음이 이데아의 순결한 풍경 속에 잠기면 그 몸 또한 지극히 순결하게 변신한다.
창공을 나르는 궁극은 곧 자유이다.
육체는 마음을 담는 부자유한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갈매기의 몸뚱이는 다만 게으른 당나귀일뿐만이 아니라 그것은 곧 마음이기도 하다. 마음이 마음을 다스리고, 교육하고, 계몽하여 이윽고 몸뚱이는 마음이 된다.
무척이나 동양적인, 혹은 선불교적인 화두가 아름다운 영상에 녹아있다.
저녁무렵, 媛이 基데리고 들러준다.
부쩍 큰 基.
부르조아 색감 농후한 媛이의 수다, 친척들 얘기서껀.
모처럼 만나는 반가운 내 동생.
16262 1991. 8. 17 (토)
어제 성규 출장 내려오다.
동양관광호텔에서 만나 늦도록 얘기 나누다.
의료기 수입상이라는 사업의 국제성 짙은 성규의 얘기들.
성규가 느끼고 있는 이 산업 자본사회의 피폐함에 대한 시각이 다소 도식적이고 진부한 수준일지라도 그의 사고 자체는 매우 건실한 것이다.
남포동에서 술마시고 성규 묵는 객실에 잠시 들렀다 12시 넘어 돌아와 쓰러지다.
수면부족, 겨우 일어난 토요일 아침.
J의 마흔네번째의 생일.
아이들, 카리스마의 엄마를 향해 손뼉을 치다.
16263 1991. 8. 18 (일)
말을 다스린다는 것은 마음다스리기 훈련의 제1의 과제이다.
이스라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던가.
'말이 입 안에 있을때에는 내가 말을 다스리고, 말이 입 밖에 있을 때에는 말이 나를 다스린다'
공연한 말을 지껄이고 난 후의 씁쓸한 후회감.
내 머리 속에서 있던 개념은 이게 아니었는데 엉뚱한 옷을 입고 말이 되어 나와 버렸구나하고.
어찌 말로서 생각을 여실하게 나타낼수 있으랴.
말이란 생각을 나타내는 도구로서는 참 불완전한 것이다.
특히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대상 앞에서의 내 언어는 나를 왜곡시킨다.
진지한 상대에게서는 그저 듣는 자세를 견지하여 마음 밭을 다스릴 일이다.
토요일 오후, J는 俊이 데리고 사직동행, 英이는 친구들과 모여 마루에서 비디오 감상에 여념이 없는데.
지금 英이는 고3짜리다.
그러나 꾹 눌러 참는 아비짜리.
J와 俊이, 두 모자는 영화까지 한편 감상하고 늦은 시각 돌아온다.
英이 빌려 본 비디오 '레이디 호크'를 나중에 나도 감상.
중세 배경의 환타지.
낮에는 여인이 매로 변하고 밤이면 그 연인인 기사는 늑대로 변한다.
16264 1991. 8. 19 (월)
일요일 오후, 베란다 내 방에 앉아서 김용옥 '대화' 읽으면서 한잔 두잔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는다.
내 일락의 타성적인 이런 유형은 지탄받을 만한 어떤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스멀스멀 차오르는 醉氣중에 마음밭에서 들려오는 한마디 소리.
"求治 할수 없는 凡物!"
漢文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의 求治는 무엇이고 凡物은 또 무에냐?
그런데 나는 소리내어 내면의 이 소리를 단호히 거부한다.
"나의 凡物은 求治의 대상이 되는 凡物은 절대 아니다!"라고.
술취하여 무슨 알아듣도 못하는 수작인지.
꿈- 염상섭의 소설과 흡사한 플로트.
나이 많은 여인과 젊은 남자, 남자를 붙들어 두려고 거짓과 허세와 아양등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여인, 그러나 여인은 자꾸 시나브로 늙어만 간다.
간 밤에 그 여인의 캐릭터는 어머니.
월요일 새벽.
김용옥의 방자함이 여간 못마땅한 것이 아니면서도 재벌총수와의 '대화'라는 그 책을 손에서 놓을수 없다.
책 속에서 김용옥이 내 의표를 찌를때에는 내 얼굴은 아마 벌겋게 붉어졌을 것이다.
내 방에 앉아서 유다서 읽는다.
차 달리는 소리, 쓰레기 수거차의 딸랑대는 종소리.
16265 1991. 8. 20 (화)
여름의 오르가즘이 칠십 노인의 심볼마냥 그리 쉽게 사그러들리 없다.
늦더위의 기승.
고르바초프 실각.
전부터 분분하게 떠돌던 소문들이 사실로 나타나다.
강경보수파 부통령 아무개가 대권을 잡고, KGB 의장이 막후 실세라나.
데땅트가 풀어지고, 동서 화해의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국제사회는 한방 펀치를 맞고 얼떨떨해 있다.
세계는... 가속적으로 압축되어, 엑기스와도 같이 농밀해지고 있는 20세기 후반의 이 세계는 어디로 가려는지.
16266 1991. 8. 21 (수)
옐친을 지지하는 탱크, 모스크바 포진.
소련의 政情은 혼미를 거듭하고 있고, 세계는 지금 모스크바에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주가는 급락하고 금값은 오르고.
이제 세계란, 지구 저쪽 편의 한줄기 바람이 한반도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한 범부에게도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제 세계는 모든 객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그물이다.
내 영역의 외부도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집에서 받아보는 신문, 조선일보와 국제신문.
중앙지와 지방지의 두가지 신문을 읽어내는 것도 일상의 자그마한 부담이다.
옛날 보다 신문에 실린 기사의 양은 엄청나게 많아졌다.
코흘리개부터 고매한 학자의 수준까지 만족시키려는 백화점식 편집에 의해서 정보는 방대하여지고 부피는 두꺼워 진다.
정보의 포화로 스스로 그 무게에 짖눌려 쓰러지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이다.
신문도 정보의 선별에 있어서 개성을 추구해야 한다.
신문마다 특성을 살려 소규모의 독자층을 확보하는 개성화 시대를 맞아야 하지 않을까?
먼 곳에서 태풍 하나 북상중.
아우성치는 바람 소리, 수요일 아침.
16267 1991. 8. 22 (목)
태풍 글라디스 북상중.
회색 공간을 바람은 아우성치며 치달린다.
소련 보수 강경파의 구데타 실패, 고르바초프 복권중.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에는 그들 의지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탱크위에서 사자처럼 표효하는 옐친의 호소와 국민들의 저항과 세계의 결속에 견디지 못하고 3일간 정권을 잡았던 그들은 손을 들었다.
주가는 다시 급등.
16268 1991. 8. 23 (금)
태풍, 밤새 우짖는 바람소리.
빗발은 창문을 때려서 베란다 내 방은 홍수가 저버렸다.
태풍 글라디스는 오늘 오전중 부산에 상륙한다고 하는데 바람이라는 척후병을 먼저 보낸 것이다.
고르바초프, 넥타이도 매지 않은채 모스크바 귀환.
옐친의 위상은 한껏 높아지고.
세계는 고무적인 분위기.
선박 3척에 소련선원들 200여명 득시글거리는 우리 회사로서도 안도의 한숨을 쉰다.
俊이 방에서 바라보는 서편 창밖의 숲이 우쭐우쭐 춤을 추고있는 아침, 아직은 여명이다.
16269 1991. 8. 24 (토)
글라디스, 왼종일 세찬 바람과 400mm에 육박하는 많은 비를 퍼붓고는 서쪽 내륙을 거쳐 올라간다.
현장은 비상대기조만 남긴채 거의 命休.
피해는 DRY DOCK에 입거중인 소련 선박의 MAIN ENGINE과 전자 콘솔등 해수가 침수되고 고소차 3대는 고스란히 물에 잠기다.
바람은 완전히 잠들고 비도 말짱 개인 토요일 아침.
젖은 내 방 피하여 俊이 방에서 시편 19. 기도.
내일은 김태경 결혼식, 그리고 PS곤 JN영 KH근 등 부부동반 우리 집 모임.
16270 1991. 8. 25 (일)
이번의 태풍 글라디스는 C급에 불과하지만 피해는 상당히 크다.
부산 사상 최대 강우량 기록, 전국적으로는 사망 실종이 백여명에 이른다.
출근길에 곳곳에 산사태가 보인다.
소련의 공산당은 이제 완전히 자취를 감추려는가.
사회주의의 이념의 고향은 이제 사라져 버리는 건가.
선한 목표와 순수한 열정의 땅에서 혁명가들의 아름다운 꿈은 물거품이 되어 스러져 버리는 건가.
쓰러진 레닌의 동상은 내게 짙은 감상을 불러 일으킨다.
일상- 그 평면적인 포름, 진부하고 단조롭고 도식적인 형태.
그 일상에는 포토제닉이 없다.
굴곡있고 음영이 짙은 입체적인 서양인의 얼굴과 달리 동양인의 얼굴처럼, 진부한 일상은 말하자면 사진빨이 잘 받지를 않는다.
일상을 다채롭고 굴곡있게 하였으면.
이제 소련의 공산주의도 없어져 버렸는데.
새벽산.
산의 거대한 부피는 이번에 많은 비를 머금게 되었다.
곳곳에 새로운 실개울이 생겨났다.
물 떠 돌아오는 중간에 중리국민학교 운동장 두바퀴 달음박질.
문득 마주치는 학교 담장위의 연미복 떨처입은 까치 한 마리.
16271 1991. 8. 26 (월)
무척이나 무더운 일요일.
부산역전의 결혼식장. 김태경의 결혼식.
결혼식장 앞길에서 문득 마주친 파란치마에 노랑저고리 입은 촌티 흐르는 젊은 여자.
햇볕에 탄 검은 얼굴과 거친 손, 누군가 친척의 혼인에 모처럼 단장하고 도회지로 나선듯한 그 건강한 촌여자에게서, 나는 그 아름다움에 순간적으로 전율을 느낀다.
그리고 걷잡을수 없는 정욕이 치밀어 오른다.
그곳에 진짜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 PS곤 , JN영 , KH근 부부들 우리 집 모인다.
J의 고급스럽고 푸짐하게 장만한 음식상 둘러 앉아 먹고 마신다.
모두 술이 얼근한채 산기슭에 올라가서 솔밭에 둘러앉아 큰 소리로 노래들을 부르고.
빈 속에 쏟아부은 소주는 기어이 탈을 내고 만다.
술에 취하여 잠이 들었다가 이상스런 허기에 일어나, 밥 한술 쑤셔넣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곧 치미는 극심한 구토증, 쫓아 나가 변기에 얼굴을 묻고 모두 토해내고 만다.
16272 1991. 8. 27 (화)
술 취하지 않은 명징한 정신으로 사물을 대한다면 그 사물의 본질을 간파함이 과연 쉬웁겠는가?
술은 단지 과장된 감정상태로 사물의 본질을 왜곡시키게 하는 원흉일까.
어쩌면 순간의 도취로 감정을 고양시켜 신비한 능력으로 온갖 사물의 행간에 숨어있는 오의를 일순간에 깨닫게 하는 마력이 있은 것은 아닐까.
한편 보오들레르처럼, 적빈의 보배- 自尊이라는 그 적빈의 보배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는 은혜로운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아니다.
지속적으로 보유하는 명징한 정신.
이것이 주님의 정신이다.
새벽 일어나 목욕, 보로딘의 현악4중주.
심한 바람.
새벽에 俊이 추워하여 내 이불 덧씌워준다.
16273 1991. 8. 28 (수)
미우라 소각로 통관되어 제2공장 소각장에서 BOX OPEN.
생각보다 부피가 크다.
이제 환경청의 허가문제.
소련. 레닌의 순수한 이념은 밧줄에 당겨 쓰러졌고, 소비에트의 맑고 어여쁜 열정은 이제 뿔뿔이 흩어진다.
역사의 필연을 믿고 역사는 반드시 그곳으로간다 우리는 피로써 역사를 앞당길 것이다라고 외치며 죽어갔던 변증론의 투사들, 확고한 유물론자들, 그 혁명아들은 공허하게 이 역사의 현실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근세에 이루었던 휴머니즘의 극을 달렸던 가장 깨끗한 인간정신은 이제 그 자취를 잃게 되었다.
그렇다. 역사란 올곧은 방향만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악인이 현실적으로 복을 누리듯이, 욥의 의미와 같이, 역사는 그 분의 손길에 의한 오묘한 섭리로서 진행될 뿐이다.
역사의 진행은 결코 변증법의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직선운동이며, 예측불허- 거대한 의도의 끝을 향해서 진행되는 직선운동이다.
무슨 법칙이 역사에 있단 말이냐.
문득, 나의 아버지.
나약한 커뮤니스트의 이미지로 내게 남아있는 李東雨- 내 아버지를 생각한다.
태초에 계신 로고스, 지금의 역사도 그 로고스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음을, 나는 묵상하여야 한다.
아침 놀, 바람이 불어 먼 바다에 백파가 인다.
16274 1991. 8. 29 (목)
젖가슴에서 나는 여성적인 것의 전부를 느낄수 있겠다.
결코 관능이 될 수없는 그 곳에 얼굴을 깊이 묻고 숨을 들이쉬면-
헌신과 배려와 어머니... 그 모든 것을 맡을수 있을 것이다.
때로 나는 젖가슴을 향한 갈증으로 목이 탄다.
이것은 정액의 토출로서 사그러질수 없는 정신적 관능의 갈증이다.
괴테가 파우스트의 종장에서 갈파한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의미를 나는 알수가 있다.
그는 70넘어 소녀를 사랑하였고, 가와바다 야스나리도 어느 소녀를 사랑하여 개스 자살을 하였다는데 그것은 성욕과는 전혀 상관없는 정신적 관능이다.
나는 내게 허락된 유일한 여성인 J에게서 이 냄새를 맡아야 한다.
결코 못나지 않은, 결코 진부하지만은 않은 J에게서 나는 여성적인 냄새를 창출하여 그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곳에서 나무의 뿌리가 땅속의 영양분을 흡수하여 푸르름을 자랑 하듯이 내 정신의 관능의 만족과 안정을 구하여야 한다.
새벽.
요한복음 2장과 3장. 기도.
5시가 훨씬 지났는데도 아직 날은 밝지 않는다.
여름은 이제 스러젔는가.
산에 가려하는 정일한 새벽.
개 짖는 소리, 고양이 우는 소리.
16275 1991. 8. 30 (금)
2공장 양수실 당직자 2명, 을종인사위원회 회부하다.
직책에 대한 책임의식은 곧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며 윤리의식이다.
또하나의 태풍은 슬며시 동해로 빠져 나가다.
퇴근하여 빈대떡 사들고 어머니께 가다.
哲이는 어머니의 신변에 서성이는 가장 귀여운 손주.
강아지처럼 귀엽게, 노루처럼 재빠르게 어머니 근처를 어루 만진다.
금요일 새벽.
슈베르트의 피아노곡 '악흥의 순간'
빌헬름 캠프, 슈베르트 답다.
이제 소련의 공산당은 사라졌나.
16276 1991. 8. 31 (토)
대우조선의 송종구 회의차 부산 오다.
곧 이사로 승진할 부장이라는 직위를 사뭇 자랑하지만, 그의 천성이 담백하여 나는 그가 반갑다.
이광섬, PP갑 , SJ엽 , JS영 등과 송종구를 끼고 마시기 시작하여 종장에는 송종구와 PP갑 과 나와 세사람만 맥주집의 홀에서 끝낸다.
과장된 情의 표현.
한국적인 그런 과장은 메마른 심성들에 따순 피를 돌게하여 관계를 고양시키기도 하는 작용을 한다.
12시 넘어 겨우 돌아와 쓰러지다.
8월의 끝.
여름의 끝인데 무더위의 기세는 영 가버린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