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3. 6

카지모도 2016. 6. 24.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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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16 1993. 6. 1 (화)


퇴근 무렵 LD찬 씨가 전화하여 한사코 만나자고 한다.

맥주 마시며 몇잔에 취하여 버린 LD찬 씨, 횡설수설 종잡을 수 없는 중얼거림.

그 소리는 마음 밭의 처절하게 외로운 바람소리다.

자식과의 갈등, 늘 자랑해 마지 않던 장남 D섭이.


또다시 아침.

차이코프스키 비창.

로린 마젤, 비엔나 필.

시편 37.


16917 1993. 6. 2 (수)


거북한 속과 뒷꽁무니의 서걱거림은 그예 선홍빛 피를 보이고야 만다.


조선일보 연재물인 '동학혁명 재조명 시리즈'에 실린 사형 당하기 직전의 해월 최시형의 사진 한장.

깡둥한 저고리에 깡둥한 핫바지 차림으로 동헌인듯한 곳의 툇마루 같은 곳에 앉아 찍혔다.

저고리 고름은 오른 쪽으로 휙 돌아가 있고, 왼 팔은 고문으로 부러졌는지 이상하게 비틀린 모습이다.


한세기전의 내 할아버지, 조선말을 쓰고 이 강토의 흙과 더불어 흰옷을 입은 사람끼리 사랑하고 싸우면서 그렇게 사셨던 내 할아버지의 모습이 그곳에 있다.

한동아리의 민족, 그 문화권. 핏줄끼리 얽히고 섥혀서.

내 실제 할아버지의 이미지와는 하나도 닮지 않았지만, 나는 해월의 그 사진을 보면서 그리움 같은, 아픈 향수로서 이름모를 내 할아버지를 생각하게 되는 이상한 느낌.

그 사진을 오려둔다.


16918 1993. 6. 3 (목)


때아닌 폭풍.

몇십척의 선박들이 침몰되거나 좌초되고 몇십명의 사람들이 실종되다.

MBC의 뉴스시간에 방파제를 불과 4 M 쯤 남겨놓은 원양어선의 갑판에서 한 선원이 산더미같은 파도에 휩쓸려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생생하게 방영된다.


자연의 거대한 분노 앞에서 첨단장비로 무장한 선박이라는 것도 한낱 조각배에 불과하다.

과학이란 결국 거대한 자연의 한 부분만을 이해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 실존하심의 당위성이 여기에도 있다.

과학으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따위는 궁극적으로 도래할수 없는 모순이다.


김영삼대통령의 의기는 충천한다.

카지노, 슬롯머쉰은 대한민국에서 추방한다고.

그는 크롬웰이 되려는가?

취임 100일, 국민의 지지도는 90%를 웃돈다.

그 자신감은 스스로의 깨끗함에 근거한 것.


비개이고 바람자고.

6월의 아침해는 찬란하다.


균형과 상징의 존재, 나의 주님께 기도.


16921 1993. 6. 6 (일)


오후 미장원 3시간여 버티고 앉아 있다.

미장원에서도 여자들의 오가는 대화의 주제는 단연 경제, 곧 돈에 관련된 것이다.

아아, 무릇 살아가는 모든 것에 경제아닌 것이 이디 있겠는가마는 경제귀신의 기승은 너무 날뛴다.

세상 모든 대화가 돈얘기여야 한단 말가.

유물론은 살찌고 영혼은 여위다.


일요일, 3시에 눈이 떠지고, 꿈들 모두 툴툴 털어버리고 새벽산을 오른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푸르른 산자락인데, 그곳에 터를 잡아 오만하게 산을 가리고 있는 고층 아파트의 덩치.


산 중턱을 들어서는 숲길에 이르러서야 그 숲은 역시 푸르른 냄새를 잃지 않고 있다.


16922 1993. 6. 7 (월)


俊이 성적.

영어는 최상위권, 수학은 하위권, 암기과목도 질척거린다.

공부방법에 하자가 있는게 아닌가 하여 아비는 심히 염려스럽다.

무어을 어떻게 지도하여야 할런지 도무지 가리사니를 잡을수 없음이 더욱 안타까울 뿐.

머리는 결코 나쁜 아이가 아닌데.


꿈- 제대말년의 군대. 그 면면들.


새벽4시.

산자락을 지나 물통을 들고 산을 오른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고.


16923 1993. 6. 8 (화)


꿈-

간밤 꿈을 꾸는 동안 그 내용이 얼마나 진지하였던지 꿈 속에서도 깨어나면 이를 기록하리라하고 생각하였으나 막상 새벽에 깨어나고보니 그 꿈의 내용들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 기억 속에 아슴하다.


사람의 일상속에 부딪치는 모든 것들은 감정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수용된다.

술을 마셔 감정밭이 긍정적인 쪽으로 고양되었을 때 버스 차창 밖 가로등 불빛과, 피곤하여 우울한 마음밭에 비추이는 그 불빛은 얼마나 다른지.


술을 마시지 않고 술을 마신것과 같은, 꿈을 꾸지 않으면서도 꿈을 꾼 것과 같은...


옛 일기를 들추어보면 한 5년전 내 신앙은 나름대로 치열한 구석이 있었는데.

지금 나의 하나님은 내 심장 어느 곳에서 살아 계실까.


때가 되면 돌아갈 그곳, 나의 하나님.

때가 되면... 때가 되면...

아아, 그 때가 언제란 말가.


새벽, 중리 국민학교 운동장을 세바퀴 달음질.

목욕하고 기도.


16924 1993. 6. 9 (수)


SB-396 제1차 OWNER SEA TRIAL.

비 흩뿌리다.

시운전 나간 배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나 나는 6시 조금 지나 회사를 빠져나와 동삼동 싸구려 세일장에서 잠바 하나를 사고 맥주 세병을 사들고 돌아온다.

무언가가 J의 심통을 유발하여 그예 내게 상처를 입히고 만다.


내방 책상앞 앉아서 옛날 20대의 기록을 뒤적이면서 술을 마시는데.

그 시절은 참으로 유치찬란, 허둥지랄하고 허영방탕하고 외식적 도식적 이기적이며 또한 파렴치하였었구나.

그러나 그 내면에 흐르고 있었던 진실은.. 그래 이제에서야 알수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슬픔이었다.

환경.

또한 외로움...

자의식 과잉.

누군가 가족이, 스승이, 선배가, 친구가 ...


아아, 부질없는 짓이다.

과거를 되씹는다는 것.


俊이 시험 돌입, 英이도 곧 시험.


쓰러져 잠이 들고.. 꿈의 터널을 거쳐.. 4시에 기상하고... 화장실에서 독수리잡이... 물통을 들고 집을 나서... 안개 자욱한 새벽 공기를 헤치며 운동장 네바퀴 돌고... 물 떠 돌아와...세수하고...베토벤을 듣고...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16925 1993. 6. 10 (목)


한 낮에는 완연한 여름을 느낀다.

끈적끈적한 감촉, 숨을 막히게 하는 더운 김.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가 피부에 사정없이 퍼붓고 숨이 컥컥 막히는 현장의 여름은 끔찍스럽지만, 하와이안 기타에 흰 포말과 과일의 농익는 냄새와 수목의 푸름름과 예쁜 여자의 종아리를 생각하는 부르조아의 여름은 신선한 행복이다.

부르조아의 여름을 소유한 사람이 여름에 죽음을 꿈꾸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으레히 죽음은 가을이나 겨울의 단어인데 그러나 이 여름에도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는다.

여름도 생명의 소모, 시간의 흐름, 그 덧없음은 어김없이 진행되고 있다.

다만 그 덧없음을 환희의 휘장으로 감추이고 있을 뿐인데, 어쨌든 여름은 의미심장한 메타포를 갖고 있는 신의 축복이다.


새벽, 중리국민학교 4바퀴.


16926 1993. 6. 11 (금)


SB-396 2차 시운전.

TOTAL NAVIGATION SYSTEM의 점검.


퇴근하여 K부장, S과장, K과장등과 어울려 마신다.

술자리 대화라는 것.

누군가를 폄하고 훼하는 꺼리들을 주탁에 올려 놓고 그것을 안주삼아 그렇게 취해 가는 것이 직장인의 술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스트레스를 함께 쏟아놓으며 술이 오르면 월급장이들은 서로의 벽이 허물어진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벽허물기는 진짜배기는 아닌 것.

술이 깨고 난 다음날 술마실때의 그 연대감은 간 곳이 없다.


그래서 누군가 갈파했던가.

음주의 제일 윗길은 독작이라고.

그러므로 나는 제일 상도의 술꾼일법도 하지만 때로 어울려 마시는 것이 이토록 좋으니 내 술꾼으로서의 품격은 사이비일시 분명하다.


英이 제 친구 지민이와 제 방에서 자고.

俊이는 국어시험을 배가 아파서 망쳤다.


16927 1993. 6. 12 (토)


위원장 JS봉이 이끄는 노동조합 집행부.

잔업을 거부하고 DOCK SIDE에서 붉은 머리띠 두르고 모여 기세를 올린다.

TUG BOAT 선원들까지 잔업을 거부하여 급히 외부의 TUG BOAT를 수배하고, WIRE ROPE는 서툰 솜씨의 관리자들이 잡을 수밖에 없다.

뚜렷한 목적을 설정하여 일사불란하게 근로자를 이끄는 JS봉.

그런 JS봉에게 대응하는 회사의 전략은 매우 소승적이다.


여름은 순식간에 닥아오고 있다.


16928 1993. 6. 13 (일)


초여름의 비.

어수선한 현장.

俊이의 운동기구 사들고 일찌거니 돌아 와 마루에 퍼질러 앉아서 맥주를 마신다.


운동을 하고자 하는 俊이.

몸만들기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남성미를 향한 동경이다.

성의식.

俊이는 이제 그런 나이다.

고등학교 2학년.


英이도 일찍 돌아와 제 엄마와 함께 고신대학에서 열리는 테너 신영조의 음악회 가다.


일요일, 자욱한 안개는 잔득 비를 머금고 있다.

전깃줄을 울리는 바람소리.


16929 1993. 6. 14 (월)


일요일.

자욱한 안개에 포위되어 있는 내 집의 공간.

종일 P/C 앞에 앉아서 DATA BASE를 만지작거리며 내가 소장한 L.P들의 자료를 입력한다.

어느새 200장을 넘어섰다.


저녁 무렵 그예 1/3쯤 병에 남아 찰랑거리는 브랜디를 마셔버린다.

다소 얼근한 기분으로 英이와 트럼프를 하다가, TV의 코메디 프로에 낄낄거리다가 잠자리에 든다.


새벽.

바로 코 앞에서 어른거리는 안개를 불어내며 새벽 운동장을 달음질한다.

오늘은 다섯바퀴.

목욕하고 존 바에즈를 올려 놓고.

내 방에 앉아서 시편을 읽는다.


16930 1993. 6. 15 (화)


북한이 N.P.T 탈퇴를 유보하였다고 안도를 하고, 율곡사업의 비리로 누구 누구가 인구에 회자되고, 예비군 훈련장에서 포탄이 터져서 10여명이 사망하고, 데모를 진압하던 경찰이 학생들에게 맞아 죽고, 영화 촬영하던 헬기가 한강에 추락하여 다섯명이 죽고...


신문과 방송에 연일 보도되는 이 현상의 배후에 숨어있는 진상은 무엇일까.

북한의 핵문제는 오도되고 있는건지 모른다.

미국의 논리에 의해서.

북한은 필사적이고 정당한 자구의 당위성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율곡사업의 거액 수뢰 건은 전 정권의 감추어진 구조적인 비리가 이제 드러난 것일지도.

예비군 훈련장의 폭발은 보도 그대로 믿어줘도 좋을 듯 싶지만 경찰 사망사건은 격렬한 데모 현장의 와중에서 충분히 발생할 만한 개연성이 상존하는 것인데 그것을 빌미로 의도적으로 떠들썩하게 만드는 세력이 있음직 하고...


벌써 장마인지 매일 축축한 안개 속에 내리는 비.


16931 1993. 6. 16 (수)


오후 5시가 되자 붉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근로자들은 꾸역꾸역 생산부 앞 마당을 메운다.

노조의 운영위원들은 군중 앞에 도열하여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데모가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해방춤을 춘다.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여자가수의 선동적인 가창에는 감동을 자아내는 무엇이 있다.


...동지는 가고 깃발은 나부껴... 오늘은 투쟁이다 내일은 해방.....

님을 위한 행진곡.


무엇인가. 까닭모를 이 감동은?

무엇인가. 스크럼을 짜고 동지의 연대를 외쳐대는 저 대열의 아름다움은?

이념에 투신하는 행위의 아름다움.

정녕 그러할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이념이란 얼마나 애매한 개념인가. 목숨을 바쳐서 헌신할 이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들은 하나의 의견의 몸짓, 또는 과장과 허위의 몸짓일 뿐이다.

이 감동이란 집단의 마스게임이 연출하는 모습을 보고 한낱 감상이 자아내는 편린일 뿐.

영화를 볼때의 감동과 비슷한 피상성의 감동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집단의 마스게임을 아무런 감정의 변화없이 냉정하게 바라볼수 있는 냉철한 의식의 소유자.

그런 사람이 혁명가이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결코 그렇게 되지 못하는.


16932 1993. 6. 17 (목)


오후, 걸으면 이제 땀이 흠뻑 배는 초여름의 거리.

지하철타고 상공회의소 ISO 9000 설명회 참석한다.

공업진흥청의 인증과장이라는 친구의 열변으로 그 국제표준인증 필요의 당위성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우선 기업주를 불러모아 그들의 굳은 머리부터 풀어줘야 한다.


媛이와 통화.

제 남편 얘기를 주저리 오라비에게 늘어 놓는다.

진이아빠 서울광고기획 사장직 물러났다고.

남양유업이 대주주가 되어 D훈고모부와 진이아빠를 밀어내는 것이라고.

은밀하게 진행된 상황이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당한 것.


16935 1993. 6. 20 (일)


토요일.

차창으로 지나가는 거리를 나가면 살아가는 것들의 분주함이 거리를 강물처럼 흐는다.

자동차와 사람... 곳곳에 우뚝 우뚝 세워지는 아파트들...


S과장의 꽃가게에서 화분을 사서 싣고 P상무 아파트 집들이.

구평동의 55평 아파트.

광장같이 넓은 집, 18층의 그곳에 두아들과 딸하나와 P상무 내외.

다섯가족이 들어있는 가족사진이 참 보기 좋다.


우리도 이런 사진 하나 찍어 두어야겠다는 생각.

부부동반 이십여명 둘러앉아 먹고 마신다.


영도 돌아와 KH호 부부와 다시 맥주.

대학원 다니며 최선을 다하여 생활하는 KH호와 국문과 출신의 약해뵈는 그의 아내.


16936 1993. 6. 21 (월)


'결혼 이야기'

잘 만든 국산영화.

사랑하여 남자와 여자는 결혼한다.

하지만 함께 붙어사는 일상의 DETAIL은 그 사랑이라는 것과는 얼마나 틀린 것인지 차츰 느끼게 된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사랑의 환상은 차츰 희석되어 날라가 버리고 지지고 볶고 살다보면 사랑과는 아주 다른 情이라는 새로운 관계라는게 싹트기 마련이고 결국은 그것으로 살아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상상력이여.

시공을 넘나들며 심층심리의 영역을 자우자재로 헤엄치는 놀라운 능력.

오직 인간이란 동물만이 가지고 있는 신의 은총.

죽을때까지 그것을 풍족하게 간직한 사람과 점점 메말라 형해화되어 껍질만 갖고있는 사람과의 차이.

나는 후자이다.

이제 소설가는 결코 되지 못한다.


일요일.

英이는 교회 갔다가 학교로.

俊이는 친구와 영화 보러 가고.

J는 TV앞에서 죽치고 앉았고 나는 P/C 앞에서 깔짝거리다가 LD찬 씨 집으로 간다.

LD찬 씨 집 안방에 서과장등과 들러 앉아 맥주.

LD찬 씨, 이제 그는 노인이다.


안개끼고 날씨가 좋지 않은데도 태종대 유원지에는 유락객 득시글.


16938 1993. 6. 23 (수)


벌써 장마인가.

비 내린다.


공정은 첩첩산중인데 일꾼들은 태업이고, 죽을 놈은 그저 현업의 관리자들이다.

현대조선이 저 지경이니 쉽게 끝날 노릇도 아닌 듯 싶다.


총무부장이란 친구는 되지도 못한 심각한 표정으로 회사의 노조에 침투한 전노협이 어떠니, 사노맹이 어떠니 씨부려댄다.

그리고 박노해의 시가 낭송된 것은 우리 회사가 처음이라고 사뭇 걱정스런 얼굴.

박노해의 시는 지금 아주 예사로 읽히는 대중화된 유행시인줄 모르고.

자꾸만 JS봉을 이상한 쪽으로 몰고가려는 그의 시각이 문제를 꼬이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도와 바람소리.

세미하게 속삭이는 하나님의 사자.


16939 1993. 6. 24 (목)


매일 오후 5시만 되면 새된 소리로 노동해방을 부르짖는 여자가수의 노래소리를 신호로 머리띠를 두르고 생산부 앞에 집결하는 근로자들.

꽹가리, 장구,북소리가 울리고 어깨짓 손짓의 몸사위가 덩실거리는 한바탕 놀이마당이 벌어진다.

그 광경을 본관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이른바 관리자들이라는 무리들의 가슴 속에는 나름대로의 감개나 동조의식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퇴근하여 마루에 앉아서 TV보며 소주잔을 뒤집는다.

다큐멘타리, '동물원'

관람의 대상에서 이제는 종의 보존이라는 기능으로 바뀌고 있는 동물원.

점점 사라져 가는 동물의 종들.

이런 것에다 막대한 예산을 아낌없이 퍼붓는 그런 곳이 선진국이다.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람 사는데 있어서 아무런 쓰잘데 없는 곳에 눈을 돌리는 나라, 먼 훗날의 후손을 생각하는 긴 시각을 가진 나라, 그런 곳이 선진국이다.


16941 1993. 6. 26 (토)


전에 읽었던 김주영의 '객주'.

연이어 7권부터 읽기 시작.

다시 느끼거니와 김주영의 소설가적 재능은 일품이다.

구성의 무리를 그 걸죽한 입담이 덮고도 남음이 있다.

아니 이것은 재능이라고만 단정지을수 없는 무엇이 있다.

방방곡곡의 장터를 돌아다니며 사건, 언어, 풍속, 전설등을 채록한 것은 순전히 그의 노력이고. 재능이라고 할 것은 이런 자료들을 푹 푹 고아서 맛갈스런 탕을 요리해 낸 그 솜씨이다.


언어- 객주에 나오는 장돌뱅이의 곁말들을 읇조리다 보면 머릿속에서는 금방 어떤 장면이 떠오르게 된다.

입술로 발음되는 한마디의 생활언어로서 그 말이 갖는 특정한 세계가 금새 드러나고 드라마가 쉽게 짜여진다.

언어, 대화, 말- 소설가가 되려면 그 걸죽한 생활언어들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리라.


英이는 시험끝나고 방학 돌입.


16943 1993. 6. 28 (월)


일요일 타성의 게으름.

창조는 물론 없거니와 일락에도 보오들레르는 없다.

정신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정신이 부리는 육체 역시 아주 길이 들어 그저 길게만 눞고 싶어한다.


오전에는 P/C에다 '객주'에 나오는 토속어들을 입력시키고, 오후에는 俊이의 포스타 숙제 밑그림을 그려주고는 내내 TV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침대에 기어 들어가 선잠에 취하는 한낮.


선배결혼식에 가서 피아노치고 노래 불러주고 싫컷 얻어먹고 왔다는 英이.

무언가 하나라도 배우고 익히는 가치있는 방학이 되기를 기원하는 아빠는 고작 컴퓨터와 일본어를 가르쳐 주겠다는 제의만 할 뿐이다.

부르조아의 여름, 젊음을 만끽할수 있는 방학이 되게 하여주겠다고 입도 뻥긋할수 없는 아비짜리.


꿈- PS곤 JN영 KH근 등장.

종말이 닥아온 세상, 카톨릭 어느 교단의 모임.

당감동 어느 마을같기도 하고 세검정의 옛 동네 같기도 한 그런 곳의 시골역 같은 지하철 역.


16944 1993. 6. 29 (화)


축축하게 장마비 내리는 제 2공장.

거대한 선체 그늘에 비를 피하며 진수작업.

오후 3시 30분, 드디어 SB-399 'ASIAN STAR'의 커다란 몸뚱이는 스르르 바다로 미끌어 들어간다.

당분간 진수는 없고, 이제부터 신경들은 노조의 거센 몸짓에 집중될 것이다.


CBS, 오후 5시부터 방송하는 시사토론 프로.

한의사와 약사의 조제권 논쟁.

여론은 한의사 쪽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어느 놈이 수카마귀이고 어느 놈이 암카마귀인지 알수는 없지만 신랄한 논쟁은 둘다 그럴 듯 하다.

CBS 라디오 방송은 시사문제에 있어서도 참 훌륭하다..


퇴근하여 그예 술마시기.

의지박약이라고 자폄하지 말자.


안개. 자욱한... 안개 속을 비는 흩뿌리고 있다.


기도.

俊이 , 괴짜.. 재능있는 아이.


16945 1993. 6. 30 (수)


장마, 습기찬 공기.

후줄근히 내리는 비.


FLOATING DOCK의 수리선 쏘련선박에서 일하던 외주업체인 동해공업의 56세된 근로자 감전으로 죽다.

흠뻑 젖은채 작업등의 전구를 끼우다가 순간적인 EARTH의 충격으로 심장이 멎은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발생한 안전사고.


벌써 일주일째의 5시 집회.

이제 슬슬 이탈자가 발생하기를 회사는 기다리고 있다.

당장 잔업수당을 잃고있는 근로자들이니까.


괴짜, 俊.

어제 2시 넘은 한밤중에 제 방의 가구들을 몽땅 이리저리 옮겨 어레인지를 새롭게 하여 방의 모습을 확 바꿔놓았다.

그 무거운 책상이며 책장들을 한밤중 소리없이 어떻게 옮겼는지.


英이는 7월 2일 M.T간다고.

3박4일 여정의 지리산 종주.

장마철 산행이 걱정스러운 J는 잔소리 퍼붓고 나는 그런 J를 핀찬하는 것이지만 미상불 걱정이 안되는 것은 아니다.


6월의 끝.


고개숙여 침묵, 그것은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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