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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70) -채만식-

계봉이가 온 것을 본 승재는 히죽 얼굴을 흐트리고, “으응! 왔구먼!” 하면서 이 사람으로서는 격에 맞지 않게 급히 달려나온다. 마음이 다뿍 죄었던 판이라 반가움에 겨워, 저도 모르게 그래졌던 것이겠다. 승재는 맞닥뜨리 싶게 계봉이게로 바로 달려들더니 쭈적 멈춰 서서는 그 다음에는 어쩔 바를 몰라하다가 요행 계봉이가 내밀어 주는 손을 덤쑥 잡는다. 둘이는 다 같이 정열이 가슴속에서 용솟음쳐 두근거리는 채 눈과 눈이 서로 맞는다. 말은 없고, 또 필요치도 않다. 숨소리만 높다. 이윽고 더 참지 못한 계봉이가 상큼 마룻전으로 올라서면서 승재의 가슴을 안고 안겨 든다. 그것이 봄의 암사슴같이 발랄한 몸짓이라면 마주 덤쑥 어깨를 그러안고 지그시 죄는 승재는 우직한 곰이라 하겠다. 드디어, 그러나 곧 두 입술과 ..

<R/B> 탁류 (69) -채만식-

여섯시 반이나 일곱시까지 대가마고 하고서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데 마침 대기하고 섰던 세 동무가 일제히 공격을 한다. “또 하나 생겼구나” “누구냐” “그건 자동차 아니냐? 흙탕물 끼얹는…….” 마지막의 단발쟁이의 말에 모두 자지러져 웃고, 계봉이도 같이서 웃는다. 스무 살 안팎의 한참 피어나는 계집아이들이 넷이나 한데 모여 재깔거리고, 그러다가는 탄력 있는 웃음이 대그르르 맑게 구르고, 침침해도 명랑하기란 바깥에 가득 내리는 오월의 햇빛과도 바꾸지 않겠다. 이윽고 웃음이 그치자 여럿은 계봉이를 다시 몰아 댄다. “얘 이년아, 그러구서두 입때 시침을 따구 있어” “누구냐? 대라!” “저년이 뚱딴지 같은 년이 의뭉해서…….” “그게 행동파가 하는 짓이냐” “개나 도야지두 연애를 하기는 한다더라” “웃구 섰지..

<R/B> 탁류 (68) -채만식-

흉포스런 완력다짐 끝에 따르는 계집의 굴복, 그것에서 형보는 차차로 한 개의 독립한 흥분을 즐겼고, 그것이 쌓여서 미구에는 일종의 사디즘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초봉이는 절망이 마음을 잡쳐 놓듯이 건강도 또한 말할 수 없이 쇠해졌다. 병 주고 약 주더란 푼수로, 형보는 간유 등속에 강장제하며 한약으로도 좋다는 보제는 골고루 지어다가 제 손수 달여서 먹이고 하기는 해도 종시 초봉이의 피로와 쇠약을 막아 내지는 못했다. 불과 반년 남짓한 동안이나 초봉이는 아주 볼썽이 없이 바스러졌다. 볼은 깎아 낸 듯 홀쭉하니 그늘이 지고, 눈가로는 푸른 테가 드러났다. 살결은 기름기가 밭고 탄력이 빠져서 낡은 양피(羊皮)같이 시들부들 버슬버슬해졌다. 사지에 맥이 없이 노곤한 게 밤이고 낮이고 눌 자리만 뵌..

<R/B> 탁류 (67) -채만식-

“구두가 낡었단 말이지요” “알어맞히니 그건 용해!” “그렇지만 걱정 말아요. 그렇게 안타깝게 구두가 신구 싶으믄 아무 때구 양화부에 가서 한 켤레 집어 신으믄 고만이니…….” “그러느니 내가 저기 일류 양화점에 가서 아주 썩 ‘모당’으루 한 켤레 마춰 주까” “흥! 시에미가 오래 살믄 머? 자수물통에 빠져 죽는다구…… 우리 아저씨 씨두 그런 소리가 나올 입이 있었나” 계봉이는 형보더러 별로 아저씨라고 하는 법이 없고, 어쩌다가 비꼬아 줄 때나 씨자 하나를 더붙여서 ‘아저씨 씨’라고 한다. 계봉이가 아무리 그렇게 업신여기고 놀려 주고 해도 형보는, 그러나 그저 속없는 놈처럼 허허 웃고 그대로 받아 준다. 계봉이는 아무 때고 그저 어린 듯이, 철이 없는 듯이, 형보와 함부로 덤비고 시시덕거리고 장난을 하고..

<R/B> 탁류 (66) -채만식-

승재나 있었으면, 예라 모르겠다고 오늘 하루 비어 때리고서 잡아 앞참을 세우고 하다못해 창경원이라도 갔을 것을 하고 생각하니, 하마 올라왔기 쉬운데 어찌 소식이 없는가 해서 궁금하다. “다라라 다라라.” ‘그루미 선데이’를, 그러나 침울한 게 아니고 명랑하게 부르면서 샛문을 열고 마루로 나선다. “언니이, 나 다녀와요오.” “오냐, 늦잖었니” 대답을 하면서 초봉이가 안방 앞미닫이를 열다가 황홀하여 눈을 흡뜬다. “……아이구! 저 애가!” “왜애…… 하하하하, 좋잖우” 계봉이는 한 손으로 치마폭을 가볍게 치켜 잡고 리듬을 두어 빙그르르 돌아서 형이 문턱을 짚고 앉아 올려다보고 웃는 앞에 가 나풋 선다. “……날이 하두 좋길래 호살 좀 하구 싶어서…… 하하하, 좋지? 언니.” “좋다! 다아 잘 맞구 잘 쌘다..

<R/B> 탁류 (65) -채만식-

승재는 실상 도적질과 그것과를 비교해서 어느 것이 좀더 낫다는 판단을 선뜻 내리기가 어려웠다. “거 보시우! 도둑질할 수 없지요? 그러니 그대루 앉어서 꼿꼿이 굶어 죽어요…… 오온 인간탈을 쓰구서 인간세상에 참례를 했다가 생으루 굶어 죽다니? 그런 천하에 억울한 노릇이 있어요 잘나나 못나나 한세상 보자구 생겨난 인생인걸, 그러니 살구 볼 말이지, 그래 사는 게 나뿌” 승재는 뾰족하게 몰린 꼴새여서 대답을 못 하고 끄먹끄먹 앉아 있다. “그리구, 여보시우…….” 주인여자는 한참이나 승재를 두어 두고 혼자 담배만 풀썩풀썩 피우다가 문득 긴한 목소리로 그러나 조용조용 건넌방을 주의하면서, “……장차 어떻게 하실는지야 모르겠소마는, 저 앨 몸을 빼줘두 별수없으리다!” “네…… 어째서” “또 팔아먹습니다요!” “..

<R/B> 탁류 (64) -채만식-

밤새껏 승재는 두루두루 궁리를 한 후에 이튿날 새벽같이 병원 주인 오달식이더러 서울로 가는걸 서너 달 미루고 더 있어 줄 테니 돈 이백 원만 취해 달라고 말을 해보았다. 그러나 병원 주인은 며칠 전에 승재가 서울로 가겠다고 말을 해놓고서 이태 동안만 더 있어 달라고 졸라도 듣지 않았을 때에 속으로 꽁하니 노염이 났었고, 또 석 달이나 넉 달 더 있어 주는 건 고마울 것도 없대서, 그래저래 심술을 피우느라고 한마디에 거절을 해버렸다. 승재는 십상 되겠거니 믿었던 것이 낭패가 되고 보니, 달리는 아무 변통수도 없고 해서 코가 석자나 빠졌다. 할 수 없이 책을 죄다 팔아 버리려고 헌책사 사람을 데려다가 값을 놓게 해보았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이런 군산바닥에서는 의학서류며 자연과학에 관한 서적은 사놓는대도 팔리..

<R/B> 탁류 (63) -채만식-

“넌 공부해 가지구 인제 자라면 무얼 할 텐가” 아이는 고개를 들지 않고 곁눈질만 한다. 이 애는 늘 이렇게 침울한 아인데, 오늘은 유난히 더해 보인다. “자아, 종쇠두 대답해 봐” “저어…….” “응.” “저어…….” “응.” “순사요.” “순? 사” 뒷줄에서 두어 놈이 킥킥거리고 웃는다. 웃는 소리에 종쇠는 가뜩이나 주눅이 들어서 고개를 깊이 떨어뜨린다. “그래, 순사가 되구 싶다” “네에.” “응, 순사가 되구 싶어…… 그런데, 어째서……” “저어…….” “응.” “저어 우리 아버지가…….” 종쇠는 그 뒷말을 다 하지 못하고 손가락을 문다. “그래 느이 아버지가 널더러 순사 되라구 그러시던” “아뇨.” “그럼” “우리 아버지, 잡아가지 말게요.” 승재는 황망하여, 아까보다 더 여러 놈이 웃는 것을 ..

<R/B> 탁류 (62) -채만식-

그러하지, 지금 승재가 절박하게, 그리고 리얼하게 마음이 쏠리기는 차라리 계봉이한테다. 계봉이는 드디어 승재를 사로잡고 말았었다. 승재도 제 자신이 그렇게 된 줄을 몰랐다가, 작년 가을 계봉이가 서울로 뚝 떠난 뒤에야 제 몸뚱이가 통째로 없어진 것같이 허전한 것을 느끼고서 비로소 그것이 계봉이로 인한 탓인 줄을 알았었다. 그리하여 시방 승재를 끌어올려가는 것도 사실은 실비병원의 경영보다 계봉이의 ‘머리터럭 한 오라기’의 인력이 크던 것이다. 유씨와 정주사가 사뭇 부여잡다시피 저녁을 먹고 가라고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승재는 ‘콩나물고개’를 넘어 부랴부랴 S여학교의 야학으로 올라갔다. 벌써 다섯시 반이니 오늘새라 좀더 일잡아 갔어야 할 야학시간도 촉하거니와, 일찌거니 명님이를 찾아봤어야 할 것을 쓸데없이..

<R/B> 탁류 (61) -채만식-

두 양주는 다 같이 어색한 대로 반색을 하면서 승재를 맞는다. 그래 싸움하던 것은 어느덧 싹 씻은 듯이 어디로 가고 이렇게 천연을 부리니 싱거운 건 승재다. 그냥 말로만 주거니 받거니 하는 틀거리가 아니고, 철그덕 따악 살림까지 쳐부수는 게, 이 싸움 졸연찮은가 보다고 그만 엉겁결에 툭 튀어들었던 것인데, 이건 요술을 부렸는지 싹 씻은 듯이 하나도 그런 내색은 없고 둘이 다 흔연하게 인사를 하니 다뿍 긴장해서 납뛴 이편이 점직할 지경이다. “거 어째 그리 볼 수가 없나? 이리 좀 앉게그려…… 거 원…….” 정주사는 연방 흠선을 피운다는 양이나 끙끙거리고 쩔맨다. “좋습니다. 곧 가야 하겠어서…… 형주랑 병주랑 그새 학교엔 잘 다니나요” 승재는 이런 인사엣말을 하면서 정주사네 양주와 가게 안을 둘러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