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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40) -채만식-

죽기로 (결심이 아니라, 죽어야 한다고) 하고 나니 비로소 뭇 생각과 감정이 복받쳐오른다. 분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 생김새부터 흉악한 저놈 장가놈한테 이 욕을 보다니, 그러고서 속절없이 죽다니, 당장 식칼이라도 들고 쫓아가서 구렁이같이 징그럽고 미운 저놈을 쑹덩쑹덩 썰어 죽이고 싶은 생각이 물끈물끈 치닫는다. 그렇지만 만약에 그랬다가는 내 부끄러운 것이 내가 죽은 뒤에라도 드러나고 말 테니, 또한 못할 노릇이다. 속시원하게 원수풀이도 못 하다니 가슴을 캉캉 찧고 싶다. 대체 이이는 어떻게 된 셈인고? 장가놈이 말한 대로 한참봉네 집엘 가서 정말 그렇게 하고 있는가 설마 그럴라구? 장가놈이 괜히 꾸며 댄 허튼 소리겠지. 그렇다면 어째서 그따위 소리에 가뜩이나 기가 질려 가지고는 맘껏 항거라도 해대질 못..

<R/B> 탁류(39) -채만식-

들이받으면서, “어이쿠!” 소리를 지르면서 상반신이 앞으로 와락 솟쳤다가는 이어 뒤로 쿵 마룻바닥에 주저앉는다. 이만만 했어도, 태수는 집에다가 사다 둔 ‘쥐 잡는 약’을 먹을 필요가 전연 없었을 터인데 뒤미처, “이놈!” 하더니 방망이는 연달아 그를 짓바수기 시작한다. “이놈!” 하고, “따악.” 하면, “어이쿠!” 하고, “이놈!” 하고, “퍼억.” 하면, “아이쿠!” 하고, 그래서, “이놈!” “따악, 퍼억.” “어이쿠!” 이 세 가지 소리가 수없이 되풀이를 한다. 건넌방에서는 식모와 계집아이가 문을 반만 열고 서서 겁에 질려 와들와들, 아이구머니 소리만 서로가람 외친다. 안방의 그 이부자리 위에서는, 앞으로 엎어진 김씨의 몸뚱이가 쭈욱 펴진 채 손끝 발끝만 가느다랗게 바르르 떤다. 치달아오르는 극..

<R/B> 탁류 (38) -채만식-

열시도 못 되어 그는 조바심이 나서 자리를 일어섰다. 열한시라고 했지만, 차라리 미리서 가서 숨어 앉아 기다리자던 것이다. 작은집은 물론이고, 취한 계집들이 모두 붙잡는 것을 스래까지 갔다가 열두시에 도로 오마고, 그리고 문득 그게 좋을 것 같아서 요새 미친개가 퍼져서 조심이 된다고 둘러대고는, 다듬이 방치 하나를 손에 쥐고 나섰다. 첫째 몸이 허전했고 겸하여 만약 거동이고 눈치고 수상한 놈이 어릿거리든지 하거든 우선 어깻죽지고 엉치고 한대 갈겨 놓고 볼 작정이던 것이다. 그는 혹시 누구한테 띌까 하여, 조심조심 큰집으로 내려와서 집 바깥을 휘익 한바퀴 둘러보았다. 대문은 잠겼고, 안에서도 아무 기척이 없고, 집 바깥으로도 별반 수상한 기척이 보이지 않았다. 우선 안심을 하고는, 가게 앞으로 돌아나와서 ..

<R/B> 탁류 (37) -채만식-

행화는 마침 놀음에 불려 나가고 집에 있지 않았다. 태수는 그것이 도리어 잘되었다 싶었지 섭섭한 줄은 몰랐다. 그는 기다리고 있을 김씨의 무르익은 애무가 차라리 마음 급했다. 탑삭부리 한참봉네 집까지 와서 우선 가게를 살펴보았다. 빈지를 죄다 잠갔고, 빈지 틈바구니로 들여다보아도 캄캄하니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이만하면 가겟방에도 탑삭부리 한참봉이 있지 않은 것은 알조다. 그래서 안심을 하고 나니까, 그제야 저 하던 짓이 우스웠다. ‘왜, 내가 이렇게 뒤를 낼꼬? 다 오죽 잘 알고서 데리러 보냈을까봐서.’ 그렇기는 하면서도 웬일인지 모르게 전처럼 마음이 턱 놓이지를 않고, 어느 한구석이 서먹서먹해지는 듯싶은 것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안대문께로 돌아가서 지쳐 둔 대문을 밀고 들어서서도,..

<R/B> 탁류 (36) -채만식-

“듣기 싫어!” 태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돌아눕는다. 그는 형보가 말하는 대로 제가 방금 누렁옷을 입고 쇠사슬을 차고 똥통을 둘러메고 징역살이를 하고 있는 꼴이, 감옥의 붉은 벽돌담을 배경으로 눈앞에 선연히 보이던 것이다. 형보는 의심이 풀리지 않은 채, 더 물어 보지는 못하구 속으로 저 혼자만 궁리가 깊어 간다. 태수는 조반을 먹고 아무렇지도 않게 은행에 출근을 했다. 그러나 아침에 형보가 지껄이던 소리가 자꾸만 생각이 나고, 그것이 마치 식전 마수에 까마귀 우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꺼림칙했다. 그래서 온종일 마음이 좋지 않아 근래에 없이 이마를 찌푸리고 겨우 시간을 채웠는데, 네시가 다 되어 이 분밖에 남지 않았을 무렵에 농산흥업회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농산흥업회사라면 태수가 위조한 소절수로 예금..

<R/B> 탁류 (35) -채만식-

그러니 그렇다면은, 밀고를 하기는 해도 일이 한꺼번에 와락 튕겨지지를 않고 수군수군하는 동안에 제가 눈치를 채도록, 그렇게 어떻게 농간을 부리는 재주가 없을까 어제로 그저께로 형보의 골똘히 궁리하고 있는 게 이것이다. 태수는 형보의 그러한 험한 보짱이야 물론 알고 있을 턱이 없다. 그는 가끔 무서운 꿈은 꾸어도 깨고 나면 종시 명랑하고 유쾌하다. 오늘 아침에는 그는 자리 속에서 잠이 애벌만 깨어 눈이 실실 감기는 것을, 초봉이가 보이지 않으니까 보고 싶어서, 여보오 하고 영감처럼 그렇게 구수하게 부르던 것이다. 초봉이는 대답을 하고 신발을 끌면서 올라와서 방으로 들어선다. 바깥은 훤해도 방 안은 아직 어슴푸레하다. 태수는 눈을 쥐어뜯고 초봉이를 올려다보면서 헤벌심 웃는다. 초봉이는 아직도 수줍음이 가시지..

<R/B> 탁류 (34) -채만식-

--부질없다! 잡념이다! 지나간 일이며 지나간 사람은 씻은 듯이 죄다 잊고, 여기로부터서 인제로부터, 새로운 생애를 북돋아 새로운 생활을 장만하자 했으면서…… 그것이 어떻게 되어서 한 결혼이든지 간에 일단 결혼을 하기는 한 것인즉, 앞으로의 생활은, 이미 결혼을 했다는 그 사실--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그 사실--을 근거로 하고서 행동을 가져야 할 것이요, 동시에 그 행동은 추궁된 동기나 미련 남은 과거에게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내 스스로가 고태수한테로 약간의 뜻이 기울었던 계제인데, 마침 그의 힘을 입어 집안이 형편을 펴게 되리라고 했기 때문에 와락 그리로 마음이 쏠려 버렸던 것이 아니냐? 그리했으면서 인제는 완전히 외간 남자인 과거의 사람에게 미련을 가짐은 크게 어리석은 짓일 뿐더..

<R/B> 탁류 (33) -채만식-

행화는 그대로 오도카니 서서, 초봉이가 계봉이와 나란히 가고 있는 뒤태를 바라보고 있다. (조금 가다가 계봉이가 해뜩 돌려다보더니, 초봉이한테로 고개를 처박고 무어라고 쌔왈거리는 모양인데, 그건 행화 제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행화는 제중당 전방에서 처음 초봉이를 만나던 때부터 어딘지 모르게 그가 좋았고, 그래서 말하자면 서로 터놓고 친해지기 전에 정이 먼저 갔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자 어저껜지 그저껜지는 마침 제중당에를 들르니까, 웬 낯선 사람이 있고 그는 보이지 않아서 물어 보았더니 며칠 전에 주인이 갈리면서 같이 그만두었다고 해, 그래 심심찮은 동무 하나를 불시에 잃어버린 것 같아서 적잖이 섭섭했어, 하다가 또, 오늘은 생각도 않은 곳에서 뜻밖에 그를 만나, 만났는데 알고 본즉..

<R/B> 탁류 (32) -채만식-

태수가 미처 무어라고 대거리를 못 하는 사이에 형보가 도로 말참견을 하고 나서던 것이다. “……기생들두 버젓하게 연애만 하구, 다아 그러더라.” “그기 연애라요…… 활량이 오입한 거 아니고? 기생이 오입 받은 거 아니고…… 오입 길게 하는 걸로 갖고 연애라 캐싸니 답답한 철부지 소리 아니오? 예? 장주사 나리님!” “저게 끄은히 날더러 철부지래요! 허어 그거 참…… 그러나저러나 이 사람아, 글쎄 기생두 다아 같은 사람이래서 연앨 해먹게 마련이구, 그래서 더러 연앨 하기두 하구 하는데 자넨 어찌 그리 연애하는 기생이라면 비상 속인가” “연애로 하문 다아 사람질하나? 체! 요번엔 저 앞에서 보니 개두 연앨 하던데” 태수는 형보와 어울려 한참이나 웃다가, 빈 담뱃갑을 집어 보고는 돈을 꺼내면서 바깥을 기웃기웃..

<R/B> 탁류 (31) -채만식-

“장한 노릇이군!” 더욱 감격하다 못해 필경 눈이 싸아 하고 눈물이 배는 것을, 그러거나 말거나 앉아서 중얼거리듯 탄식을 하던 것이다. “으음…….” 다시 훨씬 만에, 이번에는 입술을 지그시 다물면서 연해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는 비로소 아까 초봉이를 야속해하던 생각이며, 그의 혼인을 훼방 놀지 못해 초조 불안하던 것이며, 더구나 태수한테 질투와 증오를 갖던 제 자신이, 초봉이의 그렇듯 깨끗하고 아름다운 맘씨에 비하여 얼마나 추하고 부끄러운 소인의 짓이던가 싶었다. “거룩한 노릇이야!” 승재는 마침내 남의 그렇듯 거룩한 행위에 대한 감격이 적극적인 의욕으로 번져 나가면서, 그리하자면 우선 손쉽게 가령 태수한테라도 그에게 가지던 비열한 마음을 죄다 버리고 일변 그의 병을 정말 지성스런 마음으로 치료를 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