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의 시집살이는 민어 가시같이 억세고도 섬세해서, 효덕아, 나는 정말 우리
집안보다 좀 수월한 가문으로 시집가야지 했었다."
너희 외가도 참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집안 아니냐. 양반이란, 남 보기에 위세 있
고 품격 있어 감히 우러르기 아득해 보이지만, 아무나 못하는 것이다. 그 미묘하
고 까다로운 법식, 절차 심리적인 중압감에 앉고 서는 것이나 행동거지 갈피 갈
피가, 조금만 어긋나면 비웃음을 피할 수 없고, 조금만 아차 해도 큰일이 나는
것이라. 말 안해도 헤아려 알아야만 양반이지. 그리고 무엇이든 제가 다 손수 할
줄 알아야 한다. 비단을 다듬기를 달걀과 같이 반들반들하게 하고, 베를 다리기
를 매미 날개마냥 아늘아늘하게 하는 것이, 아랫것들 시켜서 될 일이냐? 그 공
들이고 매만지는 부녀자 손끝이 매사에 구석구석 미쳐야 하고, 그 다듬는 것과
꼭 같은 마음이 일상사 먼지만큼도 틀림없이 없어야 하는 것이 양반의 아녀자이
니. 그래도 친정에 있을 때는 제 부모 제 자식에 저희 종 저희 상전이라 허물이
없지. 시집을 가 보아라. 그것이 다 흉되고 흠이 될 일 백사장에 모래알 깔리듯
끝도 없는 것이 양반의 댁 부녀자 행실이다. 거기다가 제약은 또 좀 많으냐. 효
덕의 모친은, 도내에서 이름났다 하는 반족의 낭재들 집안은 시집살이 고되다고
아예 마음에서 밀어 두었으나, 어른들의 뜻은 그네와 같지 않아서 결국 사리반
으로 시집을 온 것이다. 이 사리반 시집에 와서 순덕이 만석이가 남다른 모습으
로 비친 것도, 그들의 자유스러움 때문이었으리라.
"시집이라고 와 보니, 위로 층층 어려우신 시어른들 시조부모 시증조모님까지 계
시고, 신랑은 낯설고 어색하여 한자리 마주하기도 꺼끄러운데, 말붙일 누구 하나
살가운 사람은 보이지 않고, 기껏해야 친정에서 데리고 온 교전비가 아는 얼굴
일 뿐. 조심해야 할 일만 켜켜로 산더미 같은 시집살이에, 신랑이라도 이무러우
면 좀 나았을까. 허나 그것도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부모님이 정해 주신 날 아
니면 한 방에 있지 못하고, 낮으로는 혹 마당이나 어디서 마주쳐도 남 본 듯이
반가운 빛 감춘 채 낯색을 변치 말고 스쳐야 한단다. 어디 남이라고 그렇게 대
해? 오히려 남을 신랑대하듯이 했다가는 크게 오해 사고 인심 타령 들을 것이
다. 버릇 없다. 무시했다는 말 듣기 십상이고."
그러나 신랑에게는 그래야 흉이 안되었다.
"장부가 안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것은 부인의 부끄러움이다."
하여 도무지 그런 내색이 없도록 지내야 하는 것이 옳으니 부인의 치마꼬리를
따라 다니는 신랑은 '암사내'라 해서 경멸하였다.
"내외간이 마치 무슨 뻣뻣한 장작개비 나무토막 목석이나 한가지였다. 남들이 볼
까 두려운 탓이었지."
그런데 순덕이 내외는 달랐다. 그들은 종이었으므로. 법식 절차에 매이지 않은
그들이 내외법 있을 리 없으니. 계집은 아궁이에 불을 때고 사내는 나뭇간에서
나무를 지어 나르다가, 서고 쪼그리고 앉아 이 말 저 말 무람없이 주고받으며
웃고, 장난도 치고, 무슨 일엔지 순덕이가 눈을 흘기며 주먹을 들어 때리려는 시
늉을 하자 만석이는
"아쿠쿠쿠."
뒤로 물러나며 두 팔로 제 얼굴을 가리어 막는 시늉하는 양이, 누구의 눈에라도
정답게 보이었다. 거기다가 연년생으로 투실투실한 아들을 삼형제나 나란히 낳
았던 것이다. 종의 소생으로 딸을 낳으면 이보다 더 큰 슬픔이 없었다. 양반의
자녀로도 딸이라면 서러운데, 종은 더 말할 것도 없어서, 모진 마음 먹고 갓난
것을 엎어 놓을까도 싶은 것이 종의 딸이었다. 종의 딸은 깔축 없이 종이 되었
다. 물론 상전으로서는 종이 딸을 낳았다는 것은 희소식이었지만. 노비는 어미의
신분을 따르는 것이라, 만일 종의 자식이라도 아들이라면 혹 양민의 처자한테
꿈같이 장가들일 수도 있고, 그렇게만 된다면 그 아들의 자식들은 종의 족쇄에
서 풀려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종이 딸을 낳으면 반드시 상전에게 바쳐
야 하나, 아들은 조금 달랐다. 그런 아들을 셋이나 와글와글 끌어안은 순덕이.
내리 삼형제를 어이없게 다 잃어버리고, 겨우 얻은 딸은 이름도 얻지 못한 채
세 살 먹고 네 살 먹도록
"아가."
라고만 부르던 여식에게, 효덕의 모친은 홀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사발시계 부
서지던 비명 소리가 노여우신 시아버지 고함이나 다름없어, 어디 대고 말 한 마
디 붙여 볼 수도 없었던 그네가, 자박자박 걷는 어린 딸의 새앙머리를 땋아 주며
"효덕아."
라고 불렀다. 그리고 출가를 앞두어 분주하던 어느 하루, 모친은 효덕을 마주하
고 지나간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네 이름짜 지을 때, 나는 속으로 비는 바가 있었단다. 사람의 자식으로 나서 효
도는 인륜의 근본이라, 앞글자는 효도 효짜로 하고, 뒤에 오는 큰 덕짜는 그게
순덕이 덕짜다. 다름아닌. 나는 네가 순덕이 팔자만 같기를 바랬니라. 신분이 낮
아서 종이라 천하다지만, 그 일개인으로 보면 그만한 상팔자가 어디 또 있겠느
냐. 의식이 풍족한 대갓집의 종이니 먹고 입을 것을 걱정하리, 덕망 있고 학식
있는 상전의 종이니 구박받아 매 맞을 일을 걱정하리, 보고 배울 것을 걱정하리.
명색이 상전인 나는 줄줄이 다 날리는 아들을, 알토란같이 옹골지게 기르는 순
덕이가 나는 부러웠다. 순덕이 내외는 금슬도 내내 그렇게 좋았니라. 아까 보고
또 마주치는데도 무엇이 그리 반가운지 온 얼굴에 웃음이 피어 눈짓하고 지나치고."
장날이면, 아껴 놓았던 물빛 치마에 흰 저고리 날아가게 차려 입고는 머리도 곱
게 빗고, 만석이와 나란히 어깨를 맞대어 대문을 나서는 그들의 뒷모습에 햇살
은 다사롭고 투명한 발을 내렸다. 장날, 장에 가는 심부름은 으레 이 두 사람이
맡아 했던 것이다. 안채의 심부름은 순덕이가, 사랑채 심부름은 만석이가 하였
다. 그들이 다정한 걸음으로 장에 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세상에 순덕이 팔자를 누가 당하리."
싶어졌다. 날이 저물어 어스름이 내릴 무렵이면 두 사람은 또 그렇게 나란히 돌
아왔다.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양손에 각기 주렁주렁 보따리와 꿰미들을 든
채로. 얼굴에는 아직도 장터거리에서 본 광경들과 새로운 풍물에서 묻은 흥분이
홍조로 남아, 내외 마주 손짓 발짓 흥에 겨워서.
"그럴 때 순덕이 얼굴은 참 보기에 좋더라. 사람 사는 게 저런 것이지 싶고."
그래서 효덕의 모친은 효덕에게
"너는 순덕이 팔자만 닮아라."
하였던 것이다.
"순덕이가 이 세상에 오직 갖지 못한 것이 있다면, 양반 하나뿐인데, 이미 순덕
이한테는, 양반이고 아니고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단다. 그까짓 허울이나 경계
같은 것은 무엇에도 쓸 일 없는, 그냥 자연. 그냥 사람, 사람다이 사는 사람으로
나한테는 보이더라."
사리반댁은 이야기하며 웃었다.
"그래서 내가 순덕이 덕짜를 쓰는 사람이라네."
효원은 아까 무심코, 심정이 북받치어 속으로 내뱉던 말
"내 차라리 상것으로 났더라면."
을 떠올렸다. 그리고 양반의 고명따님, 무남독녀 금지옥엽 어여쁘고 애중한 여식
의 이름에 종의 팔자 닮으라고 이름을 붙인 그 어머니 심정이 짚일 듯도 하였다.
"순덕이 덕짜도 무색허지 무어. 나는 시집으로 신행 오자 새낭군님 신랑은 동경
으로 갔으니. 공부하러 떠나는 사람을 원망할 수도 없고. 독수공방이라는 말조차
도 못 꺼냈지. 그래서 내가 낮으로는 시어른 섬기고, 밤으로는 빈 방에서 혼자
무얼 한 줄 아는가?"
""무얼 허셨든고?"
"노래를 불렀지."
"노래요?"
효원이 의아하여 사리반댁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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