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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28)

카지모도 2024. 10. 10.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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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수모

 

"남편이 소실을 두는 것은, 나 자신에게 몹쓸 질병이 있거나, 몸소 집안일을

할 수 없건, 혹은 혼인한 지 오래되었어도 아들을 낳지 못해 제사를 받들 수 없

게 된 데 까닭이 있다. 남편이 비록 소실을 두려 하지 않더라도 이런 정황이면,

옛날의 어진 아내는 반드시 그 남편한테 권하여, 사방에 널리 알아 보아 어질고

정숙한 사람을 구해다가, 그 여인을 예법대로 가르쳐 자신의 수고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어느 겨를에 투기를 하겠느냐. 혹 내게 병이 없고 아들이 있는데도 남

편이 여색을 탐내서 여러 희첩을 두어 본성을 잃고 행실을 어지럽게 가지며, 미

혹하고 음란한 일에 빠져 부모를 돌보지 아니하고 집안의 재물을 탕진한다면,

마땅히 정성스러운 뜻으로 힘써 두 번 세 번 간절하게 권하며 경계하고, 듣지

아니하거든 울기까지 하여, 말하는 마음이 사랑하고 아끼는 데서 나온 것이지

투기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인다면 어찌 그가 감동하지 않으

며, 깨닫지 않을 리 있으랴. 다만 부녀자가 성품이 좁아서 그 분함과 독기를 참

지 못하고 화를 터뜨려 부부 서로 반목하게 만들며, 심지어는 저주하고 해치는

등 못하는 짓이 없기에 이른다면, 어찌 가히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붉은 비단실로 옆구리를 꿰어 묶은 필사본의 궁체 글씨는, 아직도 그것을 옮기

어 쓰던 그때의 먹빛을 임리하게 머금고 있다.

"선량하고 정숙하지 않고서야 어째 부녀자로서의 몸가짐을 지키며, 순하고 부드

럽지 않고서야 어찌 남을 섬기며, 정결하고 성실하지 않고서야 어찌 신명을 흠

향하게 하겠는가. 부지런하고 검소한 행실에는 좋은 보람이 있는 법이라, 여기

부녀자의 예절에 관한 책을 짓는다."

도톰한 백지를 펼치어 한 점 한 획 먹을 찍어 글자로 옮길 적에, 마음에도 그처

럼 지워지지 않은 자문을 새기라, 효원의 모친 정씨 부인은 출가 앞둔 여식에게

일렀었다. 바늘 끝에 먹물 찍어 살을 찌르며, 비명 대신 무늬를 핏속에 저며 넣

는 문신보다 더 아프게 한평생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하는 것이 '부의'이니.

이름하여 '부녀자의 예절'이라. 명나라 성조의 후비 서씨가 지은 내훈과 명나라

반소가 지은 여계, 그리고 당나라 송악소가 지은 여논어에 명나라 유씨부인이

지은 여범이 곧 '여사서'이니, 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여헌, 여교, 명심보감, 내

칙, 내규 수십 권을 등불 아래 한 절 한 절, 책함으로 하나가 되도록 밤마다 읽

고 베끼어, 이토록 이고 지고 시집으로 왔건만. 내 이것을 쓸 적에는 그저 아녀

자의 성품과 행실을 올곧게 하는 가르침이려니 하였을 뿐, 참으로 내가 이 말에

해당하는 사람이 될 줄이야 어이 알았으리. 한 집안의 주부 된 부인지덕으로 반

드시 갖추어야 할 어진 성품과 바른 행실이며 언어, 복식, 행동거지, 교육, 그리

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 인류와 조상 받드는 제사의 법도,

거기다가 집 안팎 살림살이와 대인 관계에 대한 이런 일 저런 일을 가리고 가르

친 이 책들은, 이제 장차 남의 문중으로 시집갈 처자의 머리맡에 밤낮으로 놓이

어 필사되었으니. 이는 휘황한 보패, 오채 비단이 따르지 못할 소중한 혼수였다.

그리하여 후일에 그네가 어머니 되었을 때, 딸이 또한 그 책들을 소중히 베끼어

시집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다. 효원이 필사한 부녀자의 예절과 도리들도 모두

모친 정씨부인이 친정으로부터 해 온 것이니, 그것은 또 정씨부인의 안어른이

그네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책을 보고 쓴 것이었다.

"효원아, 부인은 마땅히 경서, 사기와 논어, 소학을 대강이라도 읽어서 그 뜻을

통할 수 있어야 하고, 여러 집안 가문들의 성씨며 조상의 계보를 알아두어야 하

느니라. 역대 나라 이름에 성현 군자의 이름자도 익혀야지. 그 중에서도 여사서

만큼은 읽는 데 그치지 말고 한 자 한 확을 모두 외우도록 하여라. 외운 구절들

이 곧 네 마음이 되도록, 허나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오직 큰 덕인즉. 사

람들이 너한테 재주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옳지, 남들로 하여금 네가 덕

이 없다는 말을 하게 해서는 안된다. 남의 부인으로서 덕이 없는 것만큼 부끄러

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

효원의 부친 허담은 또 그렇게 일렀었다.

"명나라 말엽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만, 들어 두면 훗날 도움이 될일도 있으리

라."

우아현이라 하는 땅에, 공생 손패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공생이란 그 고을에서

뽑혀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된 사람을 말허지, 그 손패가 진씨를 아내로 맞었

드란다. 진씨는 현숙하고 덕성스러운 부인으로 시아버지 시어머니를 지극 공순

하게 섬기는데다 남편을 극진히 받들었지만, 서운하게도 아들이 없었다. 그래 손

패를 위해서 널리 사람을 구한 끝에 하씨라 하는 이를 들여 첩으로 삼었는데,

이 하씨도 역시 유순해서 진씨와 더불어 나날을 즐기며 사랑하기 꼭 자매같이

했다더라. 그러던 하루, 그만 뜻밖에도 손패가 죽고 말었구나. 진씨는 그때 그렇

게도 기다리던 아이를 잉태하여 회임하고 있었지. 하씨 나이는 겨우 열일곱 살

이었다. 그 정경이 딱하지 않으냐. 하여 부인 진씨가 낭군도 없는 첩 하씨를 불

쌍히 여기고

"나이 아직 피지도 못한 그대의 인생이 아깝고 가엾다. 개가하라."

권하니, 하씨는 울면서

"첩이 비록 천한 몸이나 어찌 감히 한 지아비를 따르는 의리를 배반하리이까. 원

컨대 곁에서 모시고 살면서 늙게 해 주소서."

간곡히 애원하였으나

"네 앞길이 너무 길다."

고 진씨가 끝내 듣지 않으려 했더니라. 이에 하씨가 결연히 은장도를 뽑아 들고

제 귀와 코를 단칼에 잘라 결심을 보이려 했단다.

"놓으라. 이 무슨 짓이나."

놀란 진씨가 급히 그 칼을 빼앗고는 같이 붙들고 통곡하며, 외로운 앞날에 서로

의지한 것을 깊이 맹세하였다. 그리고 하씨는 아들을 낳았다. 이로부터 두 사람

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이 아들을 어루만져 기르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길쌈을

하며 고달픔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었는데, 아들이 점점 자라자 공부하기를 권하

고 가르치기에 힘써, 훗날 이 아들은 박사제자에 임명될 만큼 훌륭히 되었더란

다. 그리고 진씨와 하씨, 두사람은 다 같이 칠십여 세수를 누렸단다.

"이 말을 왜 허는고. 어떤 경우에라도 부녀자가 남몰래 덕행을 쌓으면 반드시 그

아들딸들이 번성하고 잘 자라, 후분이 좋은 것인 즉. 내 대에 참으면 자식 대에

보답이 따르느니라. 헌데 사납고 표독한 부인은 곧잘 한 가지 작은 일로 분함을

못 이기어 원망하며, 신세를 한탄하고, 가슴을 두드리고, 울부짖어 앙칼진 소리

로 집안을 할퀴는 일 허다하나, 부디 그런 사람 어디 있다는 말도 너는 듣지 말

아라. 정실부인과 첩의 사이에 은혜를 베풀고 의리를 지키는 사람 고금에 비록

많지 않지마는, 내가 남의 아내 되어 한 집안의 주부가 되면, 뜻밖의 일도 혹 생

길 수 있으니, 이런 옛이야기도 허실삼아 들어 두면 그럴 때 서로 견주어 고찰

할 수 있으리라."

항상 마음을 너그럽고 넉넉하게 먹어라 허담의 음성이 귀에 울린다. 이상한 일

이었다. 이와 같이 질정하기 어려운 순간에 그네는 어머니 정씨부인이 아니라

아버지 허담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하오나, 아버지. 이 일은 다릅니다. 단순히

첩을 본 일이 아닙니다. 저는 몸에 몹쓸 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히 집안일에

힘쓰지 못할 그 무슨 까닭도 없으며, 봉제사할 아들을 두지 못한 것도 아니었습

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오유끼라는 기생첩을 두었삽고, 그 일에 저는 단 한

마디 언급은 그만두고라고 낯빛조차 바꾼 일 없어, 전혀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내, 이 일을 아는 체하는가보라."

주먹을 어금니 물 듯 쥐고 마음도 그같이 사려먹었습니다. 속은 상하여도 하치않

어서, 어이없고 우스운 마음이 앞선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희첩이란 사내들이

항용 두는 것인지라 한편으로는 그러려니 여기려고 마음을 누르기도 하였습니

다. 하온데 이 사람은, 이제, 단순히 여색을 탐내어 음란에 빠지거나 열첩을 들

인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차마 입 밖에 내어 말하기 참람한 일을 저지른 채,

부모를 돌보지 아니하고, 종손으로서 선영을 버리고, 처자 명색 또한 다 팽개치

고, 간 곳을 모르게 되었으니. 이 사람이 과연 무엇 때문에 본성을 잃고 이대도

록 미혹에 빠졌으리이까. 아니면 이것이 바로 이 사람의 본성이겠습니까. 효원은

강실이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눈을 감아 버린다. 그리고 양미간을 깊이

찌푸린다. 주름 잡힌 눈살이 칼날같이 패인다. 그네는 격양된 심정을 다스리기

어려워 은연중, 자애로운 어머니보다 엄중하신 아버지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아버지 또한 남자이기에 그를 빌어 강모의 내면을 더듬어 보

고자 한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친정에서 아버지의 소실을 본 일은 없었을지라

도. 그러나,'소실' 때문이라면 내 심정이 이토록 무참하리. 효원은 저도 모르게 고

개를 저었다. 안상에 펼쳐 놓은 필사본 책 위에 두 손을 주먹 쥐어 얹은 채 우

뚝하니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은 그네는 오직, 아니라. 아니라. 뇌고 있었다.

"부녀로서 남의 말만을 듣고 마음에 거슬리어, 그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않

고, 높고 낮은 신분도 헤아리지 않고, 발끈 노여운 기운을 일으켜 낯빛이 붉어지

고 목까지 빨개져서 말을 가려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다 길하지 못하

고 상서롭지 못한 형상이다."

효원의 눈빛이 글자를 훑어내린다.

"이런 이는 남편에게 대접을 받지 못하거나 혹은 일찍 죽거나, 혹은 일찍이 과부

가 되거나, 혹은 아들딸을 낳아 기르지 못하느니."

이런 강경한 말씀의 경계가 없다 하여도, 효원이 그렇게 경박한 성행을 드러낼

사람은 아니었지만, 몇몇 번이나 무망간에

"콩심이를 불러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물어 볼까."

싶다가, 차라리 봉출이를 다잡아 묻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보다는 봉출이가 옹

구네한테 들었다니 그 아낙을 직접 면대하여 자초지종 소상히 듣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네는 서성거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네는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그

것은 상전으로서 체신없는 일이기도 하였거니와,

"음란한 말을 입 밖에 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만약 그런 말이 들리면 귀를 가

리고 급히 피해야 한다."

라고 익혔는데, 거꾸로, 아랫것한테 들은 말을 되짚어 다시 말하고 다시 듣고 하

는 것이 어찌 당키나 한 일이랴.

"사람이 재물을 잃으면 다시 모을 수 있지만 상전이 한 번 그 위의를 잃으면 아

랫사람들한테 다시 존경받기는 어려운 일이니라. 종을 부르는 소리는 급하고 높

아서는 안된다. 그 소리가 바깥 사랑채에 가는것도 두려운 일일진대, 하물며 이

웃 사람들에게까지 다 들리도록 외장쳐 부르리오? 이는 상스러운 짓이다. 더욱

이 계집종과 무릎을 맞대고 마주앉아 집 안팎 세사 자잘한 일을 숙덕이고, 저잣

거리 바깥마을 시정 소문을 잡다히 뒤담아 듣는 것은 천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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