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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31)

카지모도 2024. 10. 13.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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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재도 인제 내년이면 입춘문 쓰게 되겄지?"

사리반댁은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하였다. '입춘대길', '건양다복' 혹은 '국태민안'

이라고 대문에 써붙이는 입춘문, 입춘서는 글 잘하는 어른이 아니라 그 집안에

서 제일 나이 어린 꼬마동이 사내아이가 썼다.

"우리 집에도 입춘문 쓸 만한 소년이 있다."

는 것을 남들에게 널리 과시하는 뜻도 있고, 그 순진무구한 고사리 손으로 콧

등에 땀방울 송글송글 돋아나게 정성을 다하여 쓴, 순결한 글씨를 부적으로 삼

아 한 해의 복을 비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철재가 올에 천자를 배우기 시작하면

내년에 이르러는 입춘문을 쓸 수 있게 되리라는 말을 띄운 사리반댁은

"국문 천자 노래가 있거든."

하였다.

"심심할 때 외워 보소."

가갸거겨 가신임은 거년에 소식이 돈절하고 고교구규 고대한님 그리다가 구곡간

장 다녹는다 나냐너녀 아의회포 너라도 전해다오 저기러기 노뇨누뉴 노던정경

눈앞에 완연히 삼삼하네 다댜더뎌 달에갈길 저물고 더디고 더디도다 도됴두듀

동산위에 두견새 소리도 구슬프다 라랴러려 낙엽성에 역력히 과거사를 생각하니

로료루류 뇌성소리 우루룩 속이고 지나갔네 마먀머며 마음속에 먹은정이 오나가

나 임의생각 모묘무뮤 모진임은 무정코 독하기 제일일세 바뱌버벼 밝은달을 벗

삼아 앉아서 탄식하니 보뵤부뷰 보고싶어 부지중 눈물이 솟아나네 사샤서셔 상

사한마음 서름이 솟아서 못살겠네 소쇼수슈 수시마다 수심가 자탄이 절로난다

아야어여 아바님은 어머님 정화가 진정이지 오요우유 오라버님 우리집 가사를

살펴주소 자쟈저져 잠을 자니 적적한 공방의 고독한몸 조죠주쥬 주인잃은 가을

하늘 기러기 울고간다 차챠처쳐 창문밖에 처량한 그소리 처연하고 초쵸추츄 촛

불앞에 그림자 홀로이 앉었으니 카캬커켜 캄캄하온 야밤중 올이가 없네그려 코

쿄쿠큐 코를고니 쿠루룩 쿠루룩 잠이들어 타탸터텨 탄식하니 터지는 가슴을 어

이하리 토툐투튜 툭툭치며 내신세야 이럴줄 내몰랐네 파퍄퍼펴 팔자한탄 퍼붓는

눈물은 어이하랴 포표푸퓨 풍랑에 조각배 둥실 높이떴네 하햐허혀 하릴없이 처

량한 내꿈도 허사로다 호효후휴 후세에서나 다못한 연분을 맺어보세 얼씨구 절

씨구 지화자 좋다 아니 놀고서 무엇하리 곡조를 붙이지는 않고 낭창하게 구송으

로 외어 읊는 사리반댁의 국문가를 들은 효원이

"차암, 무슨 그런 노래가 다 있답니까?"

모처럼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사리반댁 이야기를 듣고, 노래 가사를 듣고, 하노

라고 어느결에 아까의 심정이 많이 눅어진 것이었다.

"그 노래, 형님이 지으셨소?"

"배운 것이야."

"총기도 좋으시오."

"인생사 굽이굽이 구절양장이지. 가갸거겨 나냐너녀 글자 배우는 노래에 붙은 가

사가 이렇게 애간장을 녹일 적에야."

"청승스럽소."

"나도 신여성이나 되어 학교 공부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양반의 가

문에 멧방석 같은 주춧돌보다, 너른 세상 바닷가에 모래알이 더 속 시원할 것

같으데. 주춧돌이면 무엇 해. 가슴을 찍어 누르는 두리기둥이 천 근 만 근 태산

같이 무거운 걸. 온 집채 덩어리를 그 기둥으로 받쳐서 내 가슴이나 뭉개지게

짓눌러르지."

사리반댁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가슴을 눌러 보였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흔연하

고 음성이 둥글어서, 못 견딜 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사리반'이면

매안보다 못할 것 없는 범절의 가문으로, 그 결이 명주올같이 올올이 섬세하고

기상은 참대 같아 하늘을 찌르는 집안인데, 사리반댁은 멧방석 같은 주춧돌보다

차라리 저 거칠 것 없이 푸르게 트인 바닷가의 모래알이 나으리라 말하고 있었

다.

"한번 시집오면 이제 다시는 다른 세상 꿈을 못 구고, 이 울안에, 매안의 항아리

속에서만, 들앉어 살어야는가?"

"다른 세상이라니요?"

"학교도 가고 공부도 하고."

"사리반서방님 동경서 이번에 오시거든 사뢰 보시지?"

효원이 농으로 응하였다.

"순덕이 덕짜 이야기도 하면서, 나 사는 세상은 무엇이냐고 대들어 볼까? 번개보

다 잠깐 다녀가서 일년 열두 달 다시 보기 어려운 사람인데, 그나마 온 동네 인

사 다녀, 저녁마다 대접 받어, 사랑에 손님 끓어, 시어머님 동무 해드려, 언제 얼

굴도 못 봐, 나는."

"나 같은 사람도 있지요."

효원은 저도 모르게 그 말을 뇌었다. 그네는 어지간해서는 한탄을 하거나 무엇

에 자신을 비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지금은 탄식이 절로 나

오려 했던 것이다.

"말이나 이렇게 서로 허고 나면 좀 낫지. 그래도."

사리반댁은 희고 둥근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이야기하는 것이 몸에 배어, 고달

픈 말을 하는데도 찌그러지는 시늉이 없다. 한 문중의 제일 연장자로서 인품과

덕망이 인근에 널리 존경받을 만하고 학덕이 높은 어른이라 문장으로 받드는 동

계어른의 시하에서, 표 내지 않고 남편 없는 시집을 살자면, 그네도 결코 쉬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해 넘어 가겄네. 나도 가야지. 인제 보니 내일 모레가 초하루네? 영동 할머니가

올에는 따님을 모시고 올란지 며느님을 모시고 올란지."

사리반댁은 일어서며 말했다. 이월 초하룻날은 영동 할머니가 하늘에서 내려오

는 날이다. 초하룻날 내려와서 스무날을 지상에 머물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데, 그네는 바람과 농작물의 풍흉을 다스리는 신이라, 한 해 농사가 잘 되게 해

주시고 항상 재수 있게 해 주시라고, 사람들은 이날 제사를 지냈다. 할머니는 여

신이니, 고운 것을 좋아해 울긋불긋한 헝겊을 매달고 늘이워서 제단이 된 부엌

의 부뚜막과 장독대를 장식하고, 이른 아침 첫새벽 동이 트기 전에 정화수를 흰

사발에 떠 놓고, 주부가 그 앞에 손을 비비며 온 가족과 집안의 평안을 빌었다.

그리고 식구 수대로 백지에 불을 붙여 하늘에 소지를 올렸다. 이른 아침 맑은

기운에 투명한 불꽃으로 타오르며 스러지는 식구들의 소지에는 정결하고 영롱한

기원이 어려 있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콩을 볶았다.

"새알 볶아라."

"쥐알 볶아라."

"콩 볶아라."

탁, 타닥, 토닥, 툭. 튀는 콩을 주걱으로 저으면서 외우는 주문은 둘러선 아이들

차지였다. 이렇게 하면 집안에 노래기가 없어지고, 그 콩이 볶이는 것처럼 금년

농사에 모든 병충해가 다 볶이어 없어진다고 어른들은 말했다. 노래기와 병충해

는 콩을 볶아 없애고 막는다지만, 가슴속에 이는 불길을 볶아서는 무엇을 막을

수가 있을 것인가. 영동 할머니는 혼자 내려오지 않고 해마다 그 딸이나 며느리

중에 하나를 데리고 오는데, 딸을 데리고 오는 해에는 아무 일도 없으나, 며느리

를 동반하여 함께 오는 해는 심한 바람을 몰고 온다고 하였다. 며느리의 바람.

그것은 결코 순탄치 않은 것인가 보다. 먼 산에 부옇게 바람꽃 일고, 흙먼지 뒤

집히며 휘몰아쳐 그 세찬 맞바람을 못 받아 돌아서게 하는, 며느리 함께 오는

영동일이면 어찌할고, 심란한지, 하는 사리반댁 음성이 바람을 머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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