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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29)

카지모도 2024. 10. 11.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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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원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몰아내는 주문으로 부녀의 예절을 읽고 또 읽

다가, 문득 정씨부인의 모습을 떠올리고, 부친 허담의 음성을 상기하고, 그 틈바

구니로 끼여드는 강실이의 그림자에 가슴이 벌어지듯 아픈 것을 가까스로 아물

리어, 한 번 더 책에다 눈을 준다. 그러나 몰아내려 하여도 강실이의 모습은 뒷

머리에 탱화처럼 걸린다. 암채 뇌록색 구름 무늬를 밝고 벗어질 듯 살빛이 비치

는 천의를 날개처럼 두른 수수백 수수천 부처들이, 한 손에 천도 들고 한 손에

는 도화 꽃가지 벙글어지게 들어 적색, 청색 황색, 흑색, 백색이 현란한 단청에

에워싸인 탱화. 사찰의 대웅전 벽면에 걸린 탱화의 부처야 그 같은 모습을 하실

리 있으리. 그런데도 효원의 윗머리에 드리워지는 휘장은 걷어낼 길도 없이 금

단청으로 나부끼며, 스러지게 애달픈 천의에 감기어 보일 듯 말 듯, 우는 듯, 웃

는 듯한 부처가 복숭아 꽃가지를 허공에 들고 있는 것이다. 흰 고깔 쓴 부처, 깃

털 달린 홀 부채로 얼굴을 반이나 가리운 채 눈빛만 얼비치는 부처, 물결같이

흐르는 구름의 한 자락을 휘어감아 날개로 삼은 부처, 발그레 두 뺨이 꽃빛으로

물들어 바라보기 미어지게 어여쁜 부처. 스치는 미소를 자욱이 머금어 안개 뒤

에 숨은 부처, 내리감은 눈매에 처연한 속눈썹 그림자 어린 부처, 석채, 당채, 쇠

녹빛 쓰라리게 아련히 우러나는 온갖 색을 품어 들이며 옷자락 여미어 돌아서려

는 부처, 이만큼 나앉은 부처. 저만큼 연연한 부처. 성황당, 칠성각, 산신당 벽면

에 알록달록 무섭고도 휘황하게, 그러나 오랜 세월 저절로 바람 속에 풍화된 빛

깔 때문에 아득한 저승의 저 너머를 느끼게 하던, 요사르러우나 거역할 수 없는

비현실로 사람을 사로 잡는 무신도 속의 여인들 같은 그 부처들은, 하나같이 똑

같은 얼굴로 수백 수수천 모습을 지었다가, 다른 자태는 빛 바래듯 멀어지고 하

나만이 홀연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그 얼굴이 너무 덮쳐와 번지어 또렷이 볼 수

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것은 강실이의 얼굴이었다. 한 울안에 함께 사는 시누이

가 아닌 탓에 아침 저녁 얼굴을 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러면 종시매 얼굴을

모를 리 있으랴. 모르다니. 오히려 너무나 선연하여 지워지지 않을 만큼, 처음

보았을 때부터도 강실이의 모습에서는, 다만 곱다고만 해 버릴 수는 없는 자용

이 옷빛깔과 그 옷의 선에서 우러났었다. 이능애부지자매자.

"남의 아내가 되어 능히 남편의 누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 매우 드물다."

라고 예전의 어른이 글로 경계하며, 그리해서는 안된다. 도리를 가르쳤지만, 굳

이 무슨 남편의 종매여서가 아니라, 자신과는 참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놀라움

과 낯설음, 그리고 이상한 부러움 같은 것들이 휩싸고 들어와, 강실이를 마주할

때는 일부러 더 무심하고 범연한 척했던 것이다. 그런 효원의 태도는 자칫 거만

하고 붙임성이 없게도 보였다. 청암부인 아직 생존하여 있을 때, 설을 맞아 큰집

으로 올라와 방안에 둘러앉은 어른들게 세배를 하던 강실이가

"자, 이제 새형도 들어오셨는데, 오라버니 내외하고 강실이도 세배해야지?"

하는 청암부인 말에 발그롬히 귀밑이 붉어지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던 자태가 지

금도 눈에 선하다. 연분홍 치마에 연노랑 명주 저고리를 홍두깨 올려 지어입은

강실이는, 느슨하게 땋은 검은 머리에 검자주 제비부리 댕기를 매고 있었다. 강

모는 효원과 나란히 하고, 강실이는 그들의 맞은편에 서서 연분홍 포기로 수줍

게 피어난 치마폭을 부풀리며 나부시 내려앉아 절을 할 때, 두 내외는 함께 수

그리어 맞절을 하였다.

"어째 그리 강실이는 절도 곱게 허는고. 누구네 집안으로 시집을 갈란지, 그 집

에서는 아마 삼대 적선을 했을 것이네."

누군가 강실이 등뒤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훗날 들은 이야기지만 효원의

절은

"왕후당상."

같았다고 뒷말을 했다 하였다. 그날은 범상히 넘기고 만 자리였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일이 있은 다음에 그처럼 둘이 서로 앙큼하게도 시치미 떼고 마주앉은 세배

자리였던가, 아니면 아직은 그 일 있기 전인 자리였던가."

새삼스럽게 곰곰 되짚어지면서, 강수 혼신 사혼이 있던 날을 헤아려 세어 보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그들이 어떤 낯빛이었는지, 한 번 떠올렸던 광경을

다시 떠올리고, 다시 떠올리고, 하면서 그때마다 속에서 부글부글 치밀어 오르는

덩어리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마음 같아서는 몇 걸음 안되는 작은집 사립문간으

로 들이닥쳐

"이리 오라."

부를 것도 없이 강실이의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젖혀 그 얼굴을 꿰뚫어 들여다

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네는 무거운 이마를 주먹으로 받친 채 깎아지른 절

벽처럼 앉아만 있는 것이다. 수모. 효원은 이 엄청나고 뜻밖인 상황에 깊은 수모

를 느끼고 있었다.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나서 연기에 이르러 한 사람의 아내

된후, 그와 더불어 오손도손 크고 작은 일을 의논하며, 자식을 낳고 훈육하여,

그 또한 장성하면, 새 둥지를 이루도록 합심하는 부부 일상이, 첫날밤 첫 자리

처음부터 거부당한 근원이 바로 거기 있었단 말인가. 단순한 일시 정욕이 아니

라 근원적인 마음의 바탕을 그곳에 두고, 싹틔워 둥치를 이루며 제 존재를 부비

어 어우러지고 싶었던 사람이, 거기 있었단 말인가. 강실이는 일개 형상을 띤 어

떤 '여자'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이 가서 닿지는 못할 그 무슨 한 '세상'으로 효

원에게는 느껴졌다.

"본디 분가루 같은 사람인 것은 내 알아보았지마는."

향기 자욱하고 보얀 형체 보이는 것 같지만 막상 집으려 하면 가루만 묻어날 뿐

흩어져 버리는 분. 그러면서도 바르면 보얗게 드러난는 분. 그것이 강실이인 것

같았다. 강실이가 비록 종시매라 하나, 만일 색기 있거나, 암팡지거나, 요사스럽

다면 차라리 이보다 덜 무참할 것도 같았다.

"너는 어떤 사람한테 무엇인가가 되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구나."

설령 그것이 비극이나 혹독한 장형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내 몫이다. 나는 이 사

람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네가 차지하고 있는 마음 자리는 마땅히 내 자

리인 것이다. 나는 문서로 약조하고 육례로 맹세하여, 하늘이 알고 사람이 아는

그의 부인이 되었으니. 이 사람은 내 것이다. 그런데 너는 누구이냐. 내가 이 집

안으로 들어오기 전부터도 한 할아버지 한 조상의 피붙이로 태어나 한 울안에

노닐면서

"삼종은 한 부엌에서 난다."

는 말 그대로 한식구 다름없이 먹고, 놀고, 마주보고, 어제 본 달빛과 오늘 보는

햇살을 같이 나누며, 나는 모를 너희들의 시간을 지단실같이 날줄로 씨줄로 은

밀하게 엮어 냈을, 너는 대관절 누구이냐. 이리 오라. 이리 나와서 얼굴을 보이

라. 효원은 오채 단청 구름무늬 뇌록빛 뒤편에서 수수십 수수백으로 나뉘어 펄

럭이는 강실이의 챙화를 홱 낚아채, 위폭에서 아래폭까지 부욱 찢어 갈기갈기

조각조각 흩어 버리며

"네가 사람이냐."

강모에게인지 강실이에게인지 모를 분기를 한숨으로 토한다.

"내 차라리 상것으로 났더라면."

그네는 참지 않아도 좋을는지 몰랐다. 효원은 치미는 성정을 내리눌러 참는 대

신, 기껏 펼쳐 놓은 필사본의 한 구절을 몇 번이고 되풀이 읽는다.

"잔혹한 성품을 가진 부녀자는 계집종에게 벌을 줄 때, 음란하고 추잡한 형벌을

가하기를 좋아하며, 머리털을 뽑고, 볼을 쥐어틀고, 바늘로 찌르고, 쇠를 달구어

지지고, 더러운 것을 입에 쓸어 넣고, 발가벗겨 거꾸로 달아매는 등, 그 참혹함

과 악독함이 대단한데, 그런 집은 반드시 망한다."

반드시 망한다. 까지 읽던 눈이 저도 모르게 다시 앞 구절로 옮겨간다. 내 너를

거꾸로 매달으랴. 효원의 숨이 거칠어진다.

"새아씨, 방에 지싱가요."

누마루 바깣에서 안서방네가 안에다 대고 살피듯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누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내가 잠깐 올라오느라고."

방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동계어른 이헌의의 손부 사리반댁이었다. 그는 동경에

가 있는 강호의 아내로, 효원보다 대여섯 살 위였다.

"날이 아직 차지요?"

효원은 안상을 웃목으로 밀며 일어서 사리반댁을 맞았다.

"청암 할머님 영연에 와 뵈입고 이리로 들왔구만. 자네 좀 보고 갈라고. 설 쇤

지가 언제라고, 보름도 다 지났는데 사람 노릇을 여태 못했어, 내가."

"별 말씀을, 제가 가서 뵈어야 하는데."

"원, 참. 상중에 어디를 댕겨. 자네 애쓰네. 영 어떻게 신색이 안 좋아 뵈이는고

만. 가신 분한테는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남은 사람들은 또 정신채리고 살어야

지, 기왕에 당한 일 돌이킬 수가 있는가? 내 몸을 우선 돌봐야 부모한테도 효도

고, 가신 어른한테도 효도야. 사람이 많이 축났어어. 이제 기운채려. 살림할라 이

렇게 큰 집에 맥 놓을 틈이 어디있다고?"

"예. 참, 형님. 뭐 수정과라도 한 모금 잡수실라요?"

"아이고 걱정도 말어. 나 금방 가. 잠깐이라도 그냥 마음 좀 쉬었다 갈라고 들왔

지, 뭐 먹으러 왔는가?"

막 반몸을 일으키려는 효원을 붙들어 앉히며 사리반댁이 말린다.

"무얼 저리 읽어?"

"그저 산란해서."

"여교, 명감, 몸썰난다. 참말로 나도 저것 무슨 자랑이라고 궤짝으로 차고 넘치게

베껴 써서, 신주단지 보물처럼 지게 위에 무동 태워 갖꼬 덩실허니 뫼시고 왔지

마는, 우리 친정에 안어른께서 허시던 말씀이 저 무거운 책함들 열두 궤짝보다

더 진실허데."

"무어라 하시던가요?"

"내 이름이 무엇인 줄 알어? 택호말고. 효덕이야. 효도 효, 큰 덕. 자네 효짜는

새벽 효지? 소리는 같은데 나허고 뜻은 다르고만. 이 이름이 내 아명인데. 나는

그저 무심히 부르면 대답하고 컸지. 부모한테 효도하고, 덕성스러운 성품을 지니

도록 하라는 뜻인가 보다, 그러면서."

그런데 나이 되어 효덕이 매안에 정혼하면서, 하루는 그 어머니가 여식을 앞에

앉히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너, 네 이름 지은 이가 누군 줄 아느냐?"

고 물었다 그것이 궁금해 본 일 없는 터라 효덕은 새삼스러워 고개를 갸웃하였

다.

"내가 지었다."

"어머니가요?"

"내력이 있느리라."

"무슨"

지금 너는 장녀로서 형제 맨 위에 있지마는, 네 앞으로 오라비 셋이나 있었단다.

그런데 다 잃고 말았지. 일찍 떠나갈 자식들이어서 그랬던가, 그토록 희고 맑고

둥그런 아들들이었다. 참 알 수 없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태어난 그 아이

들이 어느 누가 소홀히 할 리 꿈에라도 있으랴마는 첫돌 맞기 전후해서 참 여우

한테 홀린 것같이 거짓말처럼 죽어 버리니. 하늘 아래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탄하리요. 일을 당할 때마다 내가 잘못해서 부정이나 탄 것처럼 몸둘 바를 모르

겠고, 시부모님 뵈옵기 바늘방석이며 남편을 보기가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하늘

이 부끄러웠다. 자식을 셋이나 잡아먹은 어미라고 온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는 것만 같았지. 그러다가 천만다행 네 번째로 회임을 하게 되어 온 집안이

그야말로 그날부터 산일가지 보약 탕제 약탕관 그칠 새 없도록 구완을 하면서,

이번에도 아들 낳을 것을 의심 안했지. 위로 내리 셋이나 아들만 낳았으니까. 그

리고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실한 아들을 낳어서 금이야 옥이야 잘 길러 대를 이

을 대들보로 만들어야 하니까. 너희 할머님께서는 머리에 몸소 살을 이고 삼십

리 먼 길, 부처님 가피가 남다르시다는 절에까지 그 쌀을 이고 삼십 리 먼 길,

부처님 가피가 남다르시다는 절에까지 그 쌀을 단 한 번도 머리에서 내리지 않

은 채 찾아가서 백일 불공을 드렸으며, 집에서는 날마다. 정화수에 비는 정성이

대단하셨고, 너희 할아버님 일각이 여삼추로 남아 출산 손자 보기를 학수고대하

셨는데. 한밤중 축시 복판에 막상 낳은 것은 쓸모없는 계집이라. 사랑에서 자명

종 사발시계를 고누보고 신생아 태어난 시를 놓치지 않으려 하시던 네 할아버님

께서 그만 낙심하여 분노하사, 그 구하기도 힘이 들고 값도 천금이나 나가는 귀

물시계를, 군내 모두 다 해도 가진 집 몇 안되는 그 자명종 사발시계를 번쩍 들

어 마당에다 힘껏 내팽개쳐 박살이 나고 말았었다. 대르르르. 시계가 깨지면서

부딪쳐 그랬던가. 오밤중 먹장 칠흑 한복판에 놋쇠를 두드린다. 그런 소리가 날

까. 경풍을 하게 깜짝 놀랄 그 소리에 온 집안이 소동이 나서 뒤집히고, 안방,

건넌방, 산방이 다 기겁하여 일시에 소란했다. 너희 할아버님 노여우심에 나는

간이 오그라붙고, 너희 할머님은 허탈하여 두 번도 더 너를 안 보려 하셨더니라,

부모님이 그러시니 너희 아버지도 자연 섬서하여 서먹서먹 너 있는 곳에 자주

오지 않으셨다. 아무도 네 이름을 지어 주는 이 없었지. 나는 서러워서 너를 안

고 젖먹이며 남모르게 많이 울었구나. 그런데 우리 집안에는 가내노비 순덕이가

있지 않으냐. 순덕이 말이다. 얼굴은 그저 평평하게 안 생겼드냐? 무어 이쁘다고

할 것까지는 없겠지마는, 보오얗게 살이 올라 넉넉해 보이고, 몸도 건강하고, 부

지런하고, 성품이 정직해서 집 안팎에 들어오나 나가거나 신용이 있고. 참 괜찮

지. 그 순덕이가 나 시집오니까 당혼해 있더라. 저 시집갈 나이가 차 있더라고.

나 신행 오던 해 봄, 마당에 모란꽃 필 때, 순덕이를 혼인시켰는데, 비부는 집안

에 있는 종이었다. 만석이. 큼지막하게 무심히 잘생긴 종이더라. 종들이 시집가

고 장가가는 것은 저희들끼리 뒤안 마당 한쪽 귀퉁이에서 하는 일이라 상전은

참섭을 안하는 것이 상례지만, 그래도 남치마에 노랑저고리랑 바지 저고리 예물

로 지어 주고, 음식도 푸짐히 내려서 하루 종일 재미나게 먹고 놀고 즐기게 해

주지. 그렇게 짝을 지은 순덕이 만석이가 부부 되어 금슬 좋게 지내는 것은 참

보기에도 놓았더니라. 뼈대 있는 양반의 가문 사부가의 집안에서 본데있게 잘

배우고 행신하는 종들은, 어지간히 서툰 양반 뺨을 치게 아는 것도 많고 태깔도

도드라져, 순덕이 내외가 함께 집을 나서 장을 보러 가면, 멋모르는 사람 누구라

도 이들에게 함부도 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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