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시앗
세월이 묵은 담 모양으로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는 장독대는 마당보다 두어 단
이나 높다. 자잘하고 반드러운 돌자갈을 쌓아 도도록이 채운 장독대에 즐비한
독아지와 항아리, 단지들이 기우는 석양의 붉은 빛을 받아 서글프고 정갈하게
타오른다. 여름날이었다면 이런 시간, 장독대를 에워싸고 피어나는 맨드라미의
선홍색 꽃벼슬이며, 흰 무리, 다홍 무리 봉숭아꽃들, 그리고 옥잠화의 흰 비녀가
주황에 물들 것이지만, 분꽃의 꽃분홍과 흰 꽃들도 저만큼 저녁을 알리며 소담
하고 은성하게 피어날 것이지만. 지금은 꽃씨가 숨은 껍질이 땅 속에 묻힌 채
터지지 못하고 있으니, 노을은 저 홀로 주황의 몸을 풀어 어스름에 섞이면서 장
독대를 어루만져 내려앉는다. 그 장독대에 선 네 여인의 흰 옷과 검은 머릿결
갈피로도 노을은 내려앉는다. 그림자도 없이. 율촌댁이 행주로 몇 번이나 닦아낸
독의 넉넉하고 우람한 몸체에서는 사양에 차돌같이 매그럽고 견고한 광택이 위
엄있게 돋아났다. 그리고 그 불룩한 가슴 한복판에 거구로 붙은 버선본의 커다
란 발이 저녁 하늘을 밟고 있는 모양은, 확실히 이 장독이 그 어떤 거대한 힘으
로 이 네 여인을 거으리고도 남는, 더 큰 여인인 것을 느끼게 하였다. 저 버선본
만한 발을 가진. 하늘을 밟는 여인. 그는 누구 일까. 대대로 이 집안을 지켜오며
이 독에 장을 담그고, 그 장으로 식구들의 밥을 먹이며, 살로 가고 뼈로 가게 음
식을 만들어 먹이던 가모들의 혼과 그 손들. 혹은 그 손에 묻은 세상들. 아니면
꿈. 해마다 정월이면 집안의 태평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낼 때 반드시 장독대에
올릴 시루는 따로 쪄서 떡을 시루째 올렸으며, 동짓달 동짓날에는 팥죽을 쑤어
장독 주변에 뿌리고 또 한 그릇은 정하게 바쳐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비는 장독
대. 그리고 첫새벽 이른 시각의 푸른 미명에, 가장 크고 높은 이 장독 두껑 위에
다 떠 올려 바치는 정화수 한 대접. 그 대접에 담긴 꿈을 받으시는 장독대의 신
은, 버선발을 하늘로 두르고 있다. 눈물 많은 세상에 머리를 뿌리 같이 박고, 궂
은 자리 진창이며 설움의 구덩이에 잠기어 불은 아낙의 발과 발을 다 모아서 저
커다란 버선본에 한 자루 가득 담아, 가없는 하늘을 밟게 하는 장독대의 여신.
그는 누구일까. 이 장독대 뒤편에는 살이 담긴 조그만 단지 '철륭'을 모신다. 터
신 단지인 것이다. 해마다 한가위 전날, 단지 속의 쌀을 햅쌀로 바구어 넣는데,
여기서 꺼낸 묵은쌀은 밥이나 떡을 해먹는 것이 아니라 장독대 언저리 깨끗한
곳을 파고 정하게 묻었다.
"아깝게 왜 파묻어? 쌀을."
효원이 아직 꼬막 같은 새앙머리를 하고 있을 때, 어머니 연일정씨 부인이 하는
일을 보고 옆에서 물었다.
"큰일날 소리. 이것은 그냥 쌀이 아니라 신체다."
"신체?"
"신의 몸이라, 그런 말이지. 신의 몸을 사람이 어찌 먹을 수 있겠느냐 감히 그런
말 허는 것 아니다."
"쌀인데."
"어허어."
젊은 정씨부인은 목청을 누르며 엄하게 눈썹을 찡기어 보였다. 어린 날의 눈에
비쳤던 그 모습이 지금인 듯 선한데. 이제는 그네 자신이 한 집안의 가모가 되
어 정씨부인 대신 시어머니 율촌댁을 모시고 장독대에 선 효원은, 지난 정월 대
보름날 밤, 휘영청 밝은 달 아래 호젓하게 늘어선 장독들 뒤편의 철륭 모신 자
리에 참기름 불을 홀로 밝혀 놓았었다. 온몸에 달빛을 검푸르게 받는 독아지와
항아리 단지들이 이상하게 고적한 귀기로 윤이 흐르면서, 아득한 풍물 소리의
물맴이에 감기며 이만큼에 오직 말없이 앉고 서 있는 곁에서, 효원은 불 밝힌
철륭의 주홍 그늘을 내려다보며, 장독전에 이마를 기대고 있었다. 이 세상에 그
네가 의지할 곳이라고는 아무 데도 없는 것만 같아서, 그네는 거꾸로 붙인 버선
본을 쓸어 안 듯 제 가슴을 큰 독의 가슴에 시리게 맞대며, 차가운 독전에 더운
이마를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네의 이마에는 얼음테가 둘리어지는 것 같았었
다. 눈 내린 밤 사이 부시게 흰 관을 소복히 쓰고 있던 장독들의 군단이, 정월을
벗고 음 이월 초순을 지나면서 다스운 온기로 옹기종기 마음 푸는데, 효원은 이
마의 얼음테가 아직도 뇌수에까지 끼치는 한기에 후르륵, 몸을 떤다.
"장독을 새로 살라면 꼭 한여름 칠팔월에 만든 걸로 사야 헌다. 그래야 야물어.
그런 독아지는 쇳소리가 나지. 따글따글허고. 잘 익어서."
오류골댁은 강실이한테 그렇게 일렀었다.
"좋기는 대물린 장독이 제일 좋니라. 겉보기로는 그저 다 같은 옹기 독아지 같지
마는 이 독아지 숨쉬는 구멍마다 그 집안 장맛 내는 내력이 스며 있어서, 그건
씻어도 씻기지 않고, 억지로 뭘 갖다 발러도 우러나지는 않는 것이다. 왜 사람
목소리도 안 그러디? 아들이나 딸이나 간에 그 어머니 아버지 음성들을 닮잖어?
목통에서 울리는 소리가 말이다. 장독에서 우러나는 그 맛이 꼭 그것 같어서 집
집이 장맛이 달러. 독아지 맛이 있는 법이란다. 작년 장맛이 독아지 숨구멍마다
숨어 들었다가 내년 맛에 우러나고. 그러니 빈 독이라고 함부로 해서는 안되고,
더러운 허접것들 우겨 넣어 놔도 못쓰는 거지."
그래도 대물린 장독은 맏며느리가 이어받게 마련이라, 분가하는 지손은, 여러 개
의 독 중에 하나 얻기도 하지만 새로 사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 쓰던 것이
애통하게 깨져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독아지 새로 살 때는 잘 봐야 헌다. 항아리를 거꾸로 엎어 놓고는 짚불을 붙여
서 주둥이 살짜기 들어올려 그 안에다가 들이밀어 놔. 그럼 엎어진 항아리 속에
연기가 차지 않겄냐? 모래 구녁이나 잘못된 데 있으면 연기가 새니라, 그리고,
그걸 꼭 세심허게 살펴야 해. 그냥 육안으로는 모르거든. 껍데기 멀쩡해도 그런
항아리는 못 써. 헛것이다. 장이 다 새 버려. 머리카락 같은 금만 가도 그건 헛
것이야."
오류골댁은 말했었다.
"큰집에 장 담는데 올라가 보자. 너도 그런 거 다 봐 둬야 헌다."
해 넘어가는 장독대의 즐비하고 아금박스러운 큰 독 중들이 작은독 단지 들이
가득한 한쪽모서리 귀퉁이에 위태롭게 올라선 강실이는 자신이 거꾸로 엎어진
항아리 같이만 여겨진다. 텅 빈 몸을 거꾸로 엎어 식은 땅에 머리를 조아린 채
오도 가도 못하면서 지푸라기 짚불을 지핀 가슴. 그나마 숨이 막힌 불꽃은 이미
꺼진 어둠 속에 오직 매운 연기 자욱히 들어찬 항아리. 이 항아리 보이지 않는
곳에 모래 구멍, 금 간 자리, 깨진 자국을 무엇으로도 메우지 못하리니. 기침조
차 할 수 없는 항아리는 연기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내 이러고 서 있지마는,
내 온몸에서 상한 연기 멍든 빛으로 자욱하여 냇내와 함께 흩어지겠지. 대실형
님, 저러고 내색 않고 서 계시지마는, 어찌 나를 모르시겠느냐. 상한 독인 것을
어찌 모르시겠느냐. 피어 오르면서 꺼져 버린 지푸라기 불꽃은 누구의 이름일
것이며, 그 이름이 꺼지면서 이토록 독하게 채우는 연기는 또 무엇의 흔적일 것
인가. 이 연기는 천지에 내 몸의 상흔을 드러내어 퍼뜨리고 있겠지. 몸만이랴.
그것이. 강실이는 제 머리 위에서, 어깨 위에서, 가슴팍에서, 새어 나와 흩어지는
연기의 푸른 머리카락을 망연히 바라본다. 이미 들켜 버렸구나. 그네는 아까 이
장독대 가까이로 다가설 때 그것을 깨달았었다. 독전을 붙움켜쥔 효원의 결연한
옆모습에 날카로운 소름이 돋는 것을 강실이는 보았던 것이다. 효원의 차가운
얼굴에 칼끝같이 다문 입귀를 스치는 경련과 눈썹끝조차 움직이지 않던 무서운
경직이, 강실이한테는 천만 마디 말보다 더 큰 충격으로 무너져 덮쳐왔었다. 차
라리 후려치는 것이 덜 두려웠으리라. 효원의 전신에서 뻗치는 거부와 단죄의
기는 강실이를 지질리게 하고, 차마 감히 그 앞으로 걸음을 내딛지 못하게하였
다. 효원은 강실이를 완강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장독대는 범접할 수 없는 효원
의 강력한 자장이었다. 주춤거리며 가까스로 오류골댁을 따라 장독대 가장자리
까지 올라선 강실이는 더는 걸음을 떼지 못한 채, 절벽 끝의 위태로운 사람처럼
허공에 뜬 발을 딛고 서 있었다. 효원은 강실이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새끼로 꼰 금줄에 붉은 고추를 끼워 넣는 율촌댁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율
촌댁은 새로 담근 장독의 전마다 고추 달린 금줄을 정성스럽게 두른다. 고추와
대추는 다산 풍요의 상징이니, 그네의 소망은 오직 번성에 있을 것이다. 내가 살
고 싶은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생명으로 갓 태어나 강보에 싸여 어머니의 젖
만을 먹고 자라다가 드디어 강실이가 첫돌을 맞이하였을 때. 아기의 몫으로 마
련한 오목주발 밥그릇과 국그릇 그리고 한 쌍의 숟가락과 젓가락. 그것들은 장
난감처럼 조그맣고 앙징스러웠다.
"아까워서."
이미 소용이 없게 되었으나 버리지 않아 아직도 찬장의 한쪽에 곱게 얹히어 있
는 그 첫돌 식기들을, 강실도 가끔식 들여다보며 웃곤 했었다. 어른의 수저로 눌
러 뜨면 두 숟가락이 다 못될 것 같은 밥이지만, 돌날 아침에 하얗게 씻은 흰
쌀로 정성껏 밥을 지어 이 그릇에 소복히 담고, 미역국을 끓여서는 국대접에 뜨
고, 이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가지게 되는 제 수저를 앞에 놓아 아기의 아침상
을 차려 주면, 이제 이 아기도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게 사람 대접 받는 첫상이지. 그 전에야 기어댕기는 애기지만. "
첫돌 밥그릇과 국그릇, 그리고 수저들은 대개 대여섯 살 때까지 썼다. 그러다가
예닐곱 살, 혹은 여덟 아홉 살이 되면 그보다 큰 그릇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만
큼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조석으로 대하던 제정다운 밥그릇이 하루아침에 커다
란 것으로 바뀌었을 때, 그 신기하고도 공연히 부끄럽던 기억이 강실이는 지금
도 선하였다.
"진짜 밥그릇은 바로 이것이지."
오류골댁은 반닫이 속에서 가끔식 놋그릇 반상기 일습을 꺼내어 늘어 놓아 보이
며 말했다. 그것은 강실이의 혼수였다. 찌개 구이 찜 생채 숙채 장아찌와 전 김
치 회 마른 반찬에 조림이며 간장 초간장 초고추장을 각각 놓을 수 있는 칠첩
반상기에는, 물론 신랑의 주발과 신부의 바리, 그리고 두 쌍의 은수저가 들어 있
었다. 첫돌이 되어 첫밥상을 받았던 것처럼, 신부는 성년이 되어 신랑을 맞이하
는 첫상을 이 그릇으로 차리는 것이다. 이렇게 미리 반상기를 구할 수 있으면
좋은 일이려니와 만일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준비하기 어려울 때라도, 시집가는
신부는 다른 것은 다몰라도 신랑 신부의 밥그릇과 국그릇, 수저 만큼은 생략할
수 없었다. 이것만은 반드시 마련해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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