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혼불 7권 (6)

카지모도 2024. 11. 19. 06:07
728x90

 

2. 죄 많으신 그대

 

"작은아씨."

드디어 제방에 오른 안서방네가 그만 두말 더 할 것도 없이 덮쳐들어 강실이

허리를 휘어감고 쓰러지자, 강실이는 검불 하나 꺾이듯 안서방네 팔에 허리가

꺾이며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안서방네는 강실이를 등뒤에서 또아리 감아안고, 그 등에 얼굴을 묻은 채 눈

물을 쏟았다. 찐득하고 뜨거운 눈물이었다.

오죽허시겄소.

오죽이나 허시겄소.

그렇지만 생목숨인디.

아아, 죄 많으신 생목숨인디.

너무나 가엾고, 애처롭고, 그러나 도무지 비천한 자신의 처지로는 무엇 하나

어떻게도 해 줄 힘도 없어 한없이 안타까운 강실이를 부여안은 안서방네는, 오

직, 그네의 목숨만은 어떻게든 건져야 한다고 믿어.

절대로 이 팔을 풀지 않으리라.

족쇄로 조이는 것이었다.

혼비하여 달려온 끝이라 제 정신도 미처 수습하지 못한 안서방네는, 강실이

등뒤를 덮쳐 또아리같이 끌어안았던 팔을 가까스로 풀며, 눈물 범벅진 얼굴로

목이 메인다.

"참으시오. 참으시여어."

외마디 한숨을 토해 내는 듯한 그네의 늙은 음성에, 쉰 울음이 절박하게 맺혀

있다. 엄동은 지났다고들 하지만 아직 음 이월 초순을 겨우 벗은 일기의 새벽

기운은 뼛속이 시리게 찬데, 간밤 내내 흘린 식은땀이 진액으로 엉기어 흥건히

젖은 홑저고리 무명옷 한 닢 바람인 강실이는, 이미 넋이 나가 버린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려만 있을 뿐 떨지도 않았다. 베올마다 빙결이 서려 서걱서걱, 저고

리는 진작에 성엣장이 되었을 터인데도.

그네의 두 손을 맞잡으며 주저앉히는 안서방네를 따라, 펄럭, 나부끼는가 싶게

마른 풀밭 제방으로 접히어져 앉는 강실이는, 창호지로 오린 혼백인 양 부피가

없었다.

"이리 오시오. 이리, 이리."

평소에야 언감생심 그리할 수 있었을까만, 지금 그네는 강실이를 마치 가엾고

안쓰러운 딸자식 어루만지듯, 얼음보다 썬득한 뺨이며 여원 등판을 하염없이 쓰

다듬고 쓰다듬었다.

에이구우, 죄 많으신 인생이여...

하늘 아래 세상 천지, 사램이 지 아무리 많다 허나, 우리 오류골 작은아씨만헌

사람 어디 다시 있을 거잉고.

문벌이 모지랭가 용모가 모지랭가. 앙 그러먼 성품 행실이 모지랭가. 비단실

풀쳐 내서 오색 수를 놓드래도 이만큼은 못 갖추고, 이만큼은 못 곱건만.

삼생에 누구랑 웬수진 일 있으기요오, 왜 이런 설움에 꾸정물 잡숫고, 나 이러

요, 말 한 마디 엇다 대고 헐 디도 없이, 이대도록 복장이 다 썩어서 쓴물에 녹

아 부러 껍데기만 남은 헛덕개비가 되시드락, 넘 안 사는 세상을 골라감서 사신

단 말이요오, 대관절.

이게 대체나 무신 곡절이란 말씀이요예?

비록 한 울안에 모시고 사는 상전은 아니었으나, 매안 마을 이씨 문중 종가에

서 스물 안짝 귀밑머리 풀어내리고, 몇 십 년을 하루같이 청암부인 신임받으며

늙어온 하인 안서방의 아낙으로 안서방네는, 부인의 생전에 자애 귀염이 남달

랐던 강실이를, 언제 한 번 티끌만치라도 남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던 것이다.

큰댁 작은댁이 한 핏즐인 연고로 자기한테는 강실이가, 한 울타리 상전인 건

너무나 당연할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 마음에는, 눈먼 딸내미 하나 언챙

이 머슴애 한 놈 낳아 보지 못한 처지로, 어여쁘신 애기씨 작은아씨가

"별나게도 애지중지."

한다는 말 듣고도 남게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워서 늘 싸안고 돌았었다.

결코 아무한테나 어린 애기 맡기지 않던 청암부인이 강무를 업어 기르게 한

것이 안서방네 실겁고 도타운 등이었으며

"작은집에 강실이 좀 데려오라."

하면 단걸음을 놓아 업고 온 것이 또 안서방네 투실한 등이었다.

"재롱이 보고 싶어 그러신 것을, 에미가 따라가면 조심하신다."

맨 처음 부인의 전갈을 받은 오류골댁은 안서방네한테 애기를 업히어 주며,

혼자 올라가라, 하였다.

"같이 오라시든디요."

"다 놀으셨을 만할 때 감세."

젊은 새아씨 오류골댁은 마실 가는 떡애기 강실이의 앵도물빛 동그란 볼을 다

독다독하더니 웃었다. 손가락 다독이는 대로 갓난 눈을 감작감작하는 속눈썹이

품에 안기게 귀여운 때문이었다.

"너 이러는 것 보고자 할머님이 부러 부르시는 게야."

만면에 발그롬히 미소를 머금은 오류골댁 아니라도, 안서방네는 강실이 업은

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하고 느꺼웠다. 마치 자신이 애기씨 어미나 되는 것

처럼.

"감히... "

입 밖에 내서 말해 본 일은 참 한 번도 없었지마는.

아이 업힌 느낌이 강모 때와는 사뭇 달랐었다.

어느 가문 누구씨의 그 어떠하신 혈손이라고, 언감생심 경겨망동, 몸놀림을 소

홀히 할 리 꿈엔들 없는 안서방네였지만, 그러해서 강모를 업은 등은 소중하고

무거웠다. 곰지락거리는 강보 유아 애기도령이 무겁다면 얼마나 무거우리오. 쌀

한 말, 물 한 지게 진 것에 비교할 것인가. 그러나 안서방네는 언제나 이 도련님

을 천 근같이 여기어서, 발걸음 떼고 멈추는 것이며 구부리고 일어서는 것들에,

매사 바위나 짊어진 듯 조심스럽게 행신하였다.

"마님이 나를 어찌 여기시든지, 나는 애기되렌님 등에다 업을 직에먼 똑 고대

광실 매안 이씨 종갓댁을 업고 댕기는 것 맹입디다예."

안서방네는 곰방담배를 재우는 안서방한테 그렇게 말했었다.

"허, 당연허지."

"긍게 말이요. 누가 시긴다고 그런 맘이 들겄소잉?"

안서방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는 훗날 강모의 혼행 때 청사등롱을 잡았던 하인으로 , 청암부인이 매안으

로 신행 올 때 친정 청암에서부터 데리고 온 사람이라, 이 집과는 오래 묵은 인

연이 남과 다르게 깊었으니.

"불효여식 운명이 기구하여, 필부필부 장삼이사, 평범하고 남루한 사람들도 흔

히 누리는 부부 백년 해로를 못하옵고, 금지옥엽 이 몸을 길러 주신 부모님께는

고금에 다시 없을 죄인이 되어, 면목을 바로 하기 어렵삽네다. 이제 설레고 호사

스러워야 할 신행 우귀의 길이 청상 치상 길이 되었사온즉, 대저 부모 된 이로

서 자식 보내는 배웅이 이토록 참혹 측은한 경우, 세상에 어디 또 있으리이까.

일당하온 저는 차라리 날벼락 중동에 허리가 잘리어 기어가더라도 제 인생이오

니 어쩔 수 없고, 또한 어떻게든 스습하여 헤쳐나가겠지만, 우리 친정 부모님 설

우신 앞섶인 비루로 촌촌이 멍들어 밤낮없이 피눈물 간폐를 녹이올 정경, 차마

어찌 무엇으로 위로하여 드리리요."

새각시 청암부인은 열여섯 어린 신랑 준의의 날벼락 같은 부음을 놓고, 그네

의 안어른 어머니 앞에서 통곡을 삼키며 의연히 말하였다.

"하오나, 인명은 재천이라, 서천은 가고 이 몸은 남았으니, 남은 사람 목숨이

진할 때까지, 한 집안의 종부로서 피치 못할 임무가 있을 것이온즉, 비록 황망중

일지라도 앞일을 가리어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삽네다. 비천한 목숨에 탐욕 있

어서가 아니오라, 가부 잃어 텅빈 집안에 가주가 되게 생긴 저의 전후를 살피올

적에, 저까지 정신을 잃고 수심에만 잠길 수는 없는 탓이올습니다."

녹의 홍상 빛깔도 고와 생채가 나게 떨쳐입은 여식의 넉넉 훤칠하고, 의젓하

고, 장중하기까지 하던 모습이 그만 하룻방 사리에 서리 ㅂ은 소복으로 뒤바뀌

"청천 벽력이라더니, 이런 일이 네 앞에 닥치느냐."

오직 그 한 마디 신음 소리로 밀어내고는 두말도 더 잇지 못하는 모친의 눈

에, 소복의 흰 빛은, 철갑보다 견고하게 둘러씌워져 일생 동안 벗겨 낼 길 없는

큰칼로 보였으리라.

"이에 깊이 궁리한 일이 있사온데."

"무엇이냐."

"저한테 주실 교전비 대신, 충직하고 과묵한 하인 한 사람 딸려보내주시면,

노역 일손에 도움이 크겠습네다."

인편에 매안 사가의 근황 내력을 소상히 들어서 알고 있던 모친은, 과연 그러

할 만하다고 짐작 어린 내색을 하면서

"내, 사랑에 여쭈올 터이니 너는 다만 마음을 굳건히 먹고 있거라. 그만한 일

이 무에 그리 어려우랴."

어렵기는커녕, 창졸간에 이와 같은 붕천의 슬픔을 당하여서 애통으로 무너지

는 제 한 몸 가누기도 결코 쉽지 않은 터에, 오히려 심경을 정돈하고, 살아갈 앞

일을 헤아리는 국량이 갸륵하고 눈물겨워 오직 고마울 뿐이었다.

노비란 자고로 마소 전답이나 한가지여서, 주인에게 한 번 속해지면 그 상전

의 뜻대로 소유할 수 있고, 세습하여 자식들한테 물려주며, 또 분가하거나 출가

하는 자녀들한테 재산 분배로 나누어 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더욱이나 반가의

따님이라면 누구라도 으레 혼인할 때, 시중드는 계집종 교전비 따라가는 것이

상례이거늘, 부모 재산에 누를 끼칠까 보아 조심하며 이치에 맞도록 소견을 말

하는 합리라니.

부인의 모친은 이 뜻밖의 참황 가운데서도 여식의 모습을 대견한 마음으로 바

라보았다.

"기특헌 생각이로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7권 (8)  (0) 2024.11.21
혼불 7권 (7)  (1) 2024.11.20
혼불 7권 (5)  (1) 2024.11.17
혼불 7권 (4)  (0) 2024.11.16
혼불 7권 (3)  (0) 2024.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