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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5)

카지모도 2024. 11. 17.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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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순간 장군이 깜짝 놀랐지. 아무리 불빛 아래지만, 나비보다 고운 눈썹

위의 희고 맑은 이마에 칼자국이 날카롭고 선명하게 드러나 섬찟했거든. 아니

누가 이런 못된 짓을 했단 말이요. 아깝고 참혹해라. 연유를 말해 보시오."

장군이 칼자국 까닭을 물었다.

"저는 잘 모르는 일이오나, 저의 유모 말씀이, 어느 하루, 해 저무는 봄날, 버

들이 푸르고 꾀꼬리 울어 꽃이 피는가 구경을 하려고, 등에다 저를 업고 대문

밖에 나섰다가, 웬 스님 한 분을 만나셨더랍니다. 그 스님이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더니 포대기에 싸인 애기 저를 일부러 들여다보며, 이 아이가 장차 자라서,

나라를 구한 장상의 아내가 될 것이니 곱게 잘 기르라, 하시더랍니다. 황송하고

기꺼워서 유모가 합장하고 서 있자니, 웬 무장 하나가 스님에게 다가와 몇 마

디 말씀을 주고받더니만,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번갯불이 번쩍 허공을 가르면

서 휙 칼날이 스치는데, 제 이마를 상하게 했다 합니다.

귀하게 될 애기라고 잘 기르라 당부 들은 바로 그 순간에 이처럼 되어, 유모

의 낙망이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집 안팎 대소 충절이 저로 인한 근심을 지울

날 없었는데, 날이 가고 달이 가서 연기에 이르렀지만, 아무도 이마에 칼자국 난

처자를 데려가겠다는 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출가하여 중이 될까, 몇 번이고 마

음 먹었지만 그도 뜻 같지 않던 중에, 놀랍게도 혼인말 있더니 장군의 아내가 되

었나이다."

아아,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장군은 두말 하지 않고 깊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 어린 신부의 머리와 이마의

칼자국을 다만 오래오래 쓰다듬고만 있었다.

"인연이 그런 것이란다. 억지로는 안되어. 아무리 애가 타도 앞당겨 끄집어 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 데로 가려 해도 달아날 수 없고잉. 지금 너한테

로도 누가 먼 길 오고 있을 것이다. 와서는, 다리 아프다고 주저앉겄지. 물 한

모금 달라고."

오류골댁은 웃었다.

"전에 어떤 사람은 말이다. 무슨 까닭으로 그랬던지 아주 늦게 혼인을 하게 됐

더란다. 백방으로 알어보고 천지 사방으로 사람을 놓아서 찾어도 어찌어찌 될

듯 될 듯하다가 비끌어지고 비끌어지고 했었대. 그래서 그냥 다 지쳐 가지고 힘

이 빠져 이제는 틀렸는가 부다, 헐 때 뜻밖에도 사람이 나서서 혼인 했다지 않

냐. 그런데 말이다. 첫날밤에 그만 신랑이 족도리도 안 벗은 꽃각시 신부 뺨을

불이 나게 철썩, 후려쳤다는구나. 다짜고짜 댓바람에."

얻어맞고 깜짝 놀란 신부가 영문을 몰라, 뺨을 감싸쥔 채 신랑을 올려다보자

"어디 갔다 인제야 왔는냐."

고 하면서 신랑은

"내가 얼마나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아느냐."

고 신부 손을 잡고는 목을 놓아 엉엉 울었더래.

"재미있냐?"

오류골댁이 딸의 얼굴을 이윽히 들여다보며 웃음을 머금고 묻던 것이 언제였

던가.

대실에서 효원이 신행을 오던 날, 효원의 모친 정씨부인은 멀리 시집으로 떠

나는 여식에게, 몸소 쓴 두루마리 한 통을 내주었다.

"예전의 어른들이 하신 말씀이니라.

부녀로써, 무릇 혼인이나 연회 같은 모임에 갔을 때는.

고개를 외로 꼬고 남의 뒤에 숨어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렇다고 교만하지 말고,

게으르지 말고,

방자하지 말고,

아첨하지 말고,

부러워하지 말라.

이를 보이며 고개를 젖혀 웃지 말고,

손을 흔들며 말하지 말고,

탐욕스럽게 떡과 고기를 먹지 말라.

머리를 떨어뜨려 근심하는 것같이 하지 말고,

근엄하여 노여워하는 것같이 하지 말며,

자리를 건너질러 어지럽게 걸어다니지 말라.

치맛자락이 펄럭이도록 상관하여 나대지 말고,

남의 연지 찍고 분 바른 것이 너무 짙다느니 엷다느니 평하지 말고,

옆사람 귀에 대고 소곤거리거나 눈길을 흘려 사특하게 보지 말라.

엄숙하면서도 조용하고, 장중하면서도 조용하고,

장중하면서도 온화하고,

삼가며 잠잠하고, 작은 일에도 찬찬하고 자세한 연후에야

마땅히 그 위의와 법도를 잃지 않을 것이니라."

명심하라. 어머니가 이르며 건네 준 그 글을 심중에 간직하여 품고 앉은 효원

의 모습은, 청암부인의 큰방 가득히 둘러앉은 부인들 누구의 눈에도 당당하고

떳떳하고 의젓하게 보였다.

훤출한 이마에 검은 머리 한가운데 희고 곧은 가리마 반듯이 갈라진 효원의

남치마 노랑 저고리 어깨가 견고하고 우뚝한데, 강실이는 목 언저리 머리털 수

줍게 흘러내린, 연두 저고리 연분홍 치마 안개처럼 자욱하게 에워 입고, 둥근 어

깨 달같이 두르고 있었다.

아아, 강실아.

무지개같이 둥글고 이쁜 사람아.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나의 심정이 연두로 물들은들 어디에 쓰겠느냐.

캄캄한 밤하늘의 차갑게 씻긴 별들을 바라보며 홀로 탄식하여 가슴 저미던 강

모가, 차마 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던 어깨.

그 어깨 위로 청암부인 말씀이 내려 앉았다.

"새해에는 부디 네 사람 만나거라. 네가 그 동안 갈고 닦은 부덕이 제자리 제

그릇에 담길 날이 곧 올 것이니라."

그 말씀에 방안의 부인들도 모두 강실이를 돌아보며, 어여쁘다, 한 마디씩 덕

담하였다.

"무릇 여인은 여인다워야 하고 남자는 남자다워야 조화롭고 순탄한 것인데, 그

성품이 뒤바뀌면 인생이 음양에 역행하여 고달프지. 그래 옛날 성인들도 가르침

을 베풀어서 기질을 바로잡고 그 성품을 회복하려고 하셨던 게야. 그래서 그 말

씀에 생남여랑이라. 아들을 낳으면 호랑이같이 여기고, 유공기왕이라, 오직 그가

잔약할까 걱정할 일이요, 생녀여서, 딸을 낳으면 쥐와 같이 여기고, 유공기호, 오

직 그가 호랑이 같을까 걱정하는 일이다,라고 했느니."

헌데 우리 강실이는 곱기가 천상 여자 중의 여자요, 나와 같은 우리 이가 쪽

며느리들하고는 달라서, 안순 그윽하며 성품의 빛깔이 저토록 유현, 아름다우니,

내, 저 아이의 앞날을 보고 싶노라.

그날이 어서 왔으면.

이 넓고 깊은 호수를 장쾌히 지으시고, 넘치는 청호의 짙푸른 물을 세상에 남

기시고, 그 물 먹고 세세토록 매안 마을 들판의 곡식들이 자라나도록, 또 그 곡식

먹고 당신의 후손들이 살지게 살아가도록, 죽어서도 그 몸을 푸르게 풀어 들판

과 곡식과 살람들을 먹이시는 종조모, 남기신 그림자 청청하신 할머니 청암부인

이 그렇게 말씀하시었던 강실이.

그 강실이는 지금 이 물에 몸을 던지려고, 온갖 색색깔 다 벗어 놓고, 할머니

상복으로 입은 횐옷 소복을 자신의 저승길 마지막 옷으로 입은채, 살아서는 한

올도 흐트러지게 하지 않아야 하는 머리카락, 두 번씩이나 땅에 뉘여 흙 묻힌

설움이 이미 견디기 버거워서, 그 머리 땋은 자리마다 벗을 길 없는 올무에 처

렁처렁 묶은 듯하여, 마치 덧을 풀어내듯, 오래오래 그네를 얽어매온 사슬을 풀

듯, 목숨 조인 고리를 벗기듯, 한 고 한 고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풀었다.

다 벗어 놓고 가리라.

다 풀고 가리라.

이제 그 앞에서는 모든 것이 한낱 물거품이 되어버린 장엄하고도 세밀한 온갖

부덕 여덕의 훈계와 항목들이 강실이의 머릿단에서 풀리며 검은 물살처럼 어깨

를 덮는다.

홍두깨 올린 비단과 명주에서는 방망이 맞는 자리마다 바라보기 에일 만큼 연

연한 구름 무늬, 물결 무늬, 숨어서 오히려 휘황하게 번지었건만. 보이지 않는

운명이 홍두깨와 다듬잇돌 사이에 감기어 낀 강실이는, 호되게 내리치는 방망

이를 맞으며 비명도 피명도 토하지 못하고 이 물가에 서서, 생전에 그러하였듯

정초의 세배 자리에서처럼 호수를 향햐여 절을 하고는, 신을 벗고 머리를 풀고

있는 것이다.

"아이고오, 작은 아씨이."

검은 너울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인가.

소복의 뒷머리에 드리운 흑단 같은 머리채는 벌써 저승을 머금은 채, 새벽 안

개 자욱히 오르는 저수지 제방 위에 섬뜩하고도 처연히 비쳐, 안서방네는 아악,

소리를 지로고자 하였으나 음성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그저 웅, 웅, 하

는 짐승의 신음 수리라고나 할 것이 제 귀에 울릴 뿐.

그럴수록 걸음이 헛디뎌지는 안서방네는 강실이의 모습이 가뭇 헛그림자처럼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까 봐, 가위 눌린 제자리 걸음을 조청밭에서 떼는 힘으로

"아이고, 아이고오."

옮기었다.

"작은아씨요."

죽지 마시요오, 죽지 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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