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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7)

카지모도 2024. 11. 20.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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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서 허락이 내려, 청암부인을 모시어 배행하고 온 것이 바로 부인의 청

암 친정댁에 누대로 세습되어 내려오는 씨종의 씨, 사노 순구, 안서방이었다.

그의 어미는 평생에 아들 셋과 딸 일곱을 낳아 상전에게 바쳤는데, 안서방은

그네의 아홉번째 소생으로, 무엇보다 그 성품이 정직하여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

의 눈을 기이는 일이 없었다.그리고 부지런하였다.

"내, 가장 믿을 만한 종을 너한테 주노니, 부모의 정 한 점을 떼어 다숩게 지

니고 가거라. 너도 잘 알겠지만, 종이란 종모법에 의해서 그 신분이 어미를 따라

가는 것 아니냐? 허니, 네가 순구를 잘 눈여겨 보고 있다가 너한테 공이 많거든,

노비 아닌 양민의 처자를 애써 구해서 짝을 지어 주면, 그 자식 대에는 면천을

할 수 있으리라."

"명심하겠습니다."

청암부인은 부친의 말씀에 답하였다.

"순열이는 네 교전비로 데리고 가거라."

그 어미가 순구 아래 낳은 열번째 계집종이 순열이었다.

매안으로 온 청암부인은 친정을 떠나오며 부친에게 했던 약조대로, 민촌의 상

민이었으나 살기가 궁박하여 문중에 호제로 들어와 드난살이하던, 행랑아범의

딸자식을 순구와 맺어 주었다.

"말이 종이지, 저렇게 변함없고 온순하고 경우 바른 사람은, 양반 못된 것하고

열 섬을 얹어 준대도 안 바꾸게 본데 있는 종이라."

는 말을 안팎에 듣던 순구에 맞도록 안서방네 또한 행동거지 조신하고 일손은

재바르면서도 성품은 과묵한 아낙이었다.

"이제 너는 자식을 원없이 마않이 낳아라. 아무리 낳고 낳아도 네 자식 중에

종은 나오지 않을 터이니."

순구가 안서방이 되는 날 청암부인은 덕담하며 웃었다.

그러나 그 듣기만 하여도 속이 트이고 응어리 플리어 풍요로운 덕담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고단한 사람이라 자네라도 생산 많이 해서 식구 불어나는 것을 꼭 보고

싶었는데. 닳을 것이 없어 상전 무자식 팔자를 닳노 그래, 그런 것이 충복이 아

니라 무어라고 해야 되는고."

노경에 흰머리 가득 돋아난 안서방을 이윽히 건너다보던 청암부인은, 어느 날

문득 그런 말을 쓸쓸히 건넨 일이 있었다.

"사는 게 다 한낱 시늉이고, 허망한 노릇이지마는."

그런 말을 덧붙이면서.

그 힘없는 노안에 어리는 감회를 돌아서서 묵묵히 짚으며, 안서방은 안서방네

한테 서글픈 빛 스치게 이야기했었다.

"말을 안해서 그렇제, 참, 인정으로는 못 따러올 질이드라고오. 우줄우줄 흰 덩

꼭대기가 출렁거림서 저만치 새각시 가매는 생이맹이로 앞서 가신디, 음식이랑

머이랑 이고 진 하님들이 줄줄이 따러가는 행렬이 어찌 그리 설웁고 처량튼지.

참 요상허제. 그렇게 행렬이 지일고 호사시러웅 거이 외나 더 설워 뵈드랑게."

"대체나 그랬겄소잉."

안서방네는 낮은 소리로 혀를 찼다.

그때로부터 안서방은 처음이나 나중이나 한결같이 청암부인의 충실한 손발이

되어 논 갈고, 밭 갈고, 곳간을 지키며 농사 일 안팎을 나락껍데기 한 낱 흩어지

지 않도록 단속하였다.

그리고 중늙은이 벗어나면서부터는, 일어난 살림살이에 반하여 구부러진 뒷

등에, 나락섬에 지고 나르는 일 대신 꽃잎같이 가벼운 도련님 어린 강모를 업고

는 거의 매일 시오리 길을 달려 보통학교에 가고 오곤 하였던 것이다.

그 무렵부터는 그는 험한 일은 하지 않았고, 청암부인도 그에게는 각별히 후

대하였다. 또한 안서방네도 종의 아낙이어서 그렇지 신분은 평민인지라 사람들

이 함부로 종 다루듯 대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안서방네와 안서방의 등에서 자란 강모.

그런데 안서방네는 그 강모를 업을 때와 강실이 업을 때의 정감이 사뭇 달랐

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아장아장 걸으면서 분홍 매화 수놓인 꽃당혜 앙징스럽던 그 발이, 이제는 이

승에 신던 신발 나란히 벗어 놓고, 저 시푸른 저승의 시린 물 속으로 들으려 한

다.

"작은아씨. 이런 소견이 머얼 알까마는, 사램이 세상에 나서 짓는 죄중에 지

손으로 생목심 끓는 거이 기 중 큰 죄라고 허등만요. 왜 그렁가는 모르겄어요.

즈그맹이로 앙껏도 아닌 인생도, 살다가 살다가, 이노무 인생은 대관절 언제나

끝이 난다냐, 막마악헌 때가 한두 번이 아닌디요잉, 그런 생각 허는 것도 못쓴당

만요."

전생에 죄를 져서 이생에 괴로운 일 많이 겪으면, 우선은 못 전딜 테지마는

그래도 살어서 갚는 거이 낫답니다. 그래야 탕감을 해서 개버진다대요. 죽는다고

끝이 아니라, 그 빚 끄터리가 똑 올가미맹이로 따러댕깅게, 끊어내 불든 못허능

게비여요, 그저 갚어야제. 괴로움도 갚는 거이라대요. 독하게 괴로우먼 빚도 그

만큼 많이 탕감되는 거이라든디.작은아씨. 무신 좋을 날 없다손 치드래도 목심

붙여 논 것으로 내 업장 소멸시키는 빚 갚는다 생각허시고, 두고두고 찔끔찔끔

갚으실 거 한끕에 비싸게 갚는다 허시고, 죽든 말으시겨어, 살으시겨.

아아, 앙 그러먼 이 죽을 괴롬으로 누구 구제헐 일 있으싱교오.

안서방네는 강실이 등뒤로 무릎 걸음을 옳겨, 풀어헤친 저승을 머금어서 무섭

게 검은 머릿단 너울에 손가락을 써레처럼 벌리어 집어넣고, 수욱수욱 빗어 내

렸다.

"날 새기 전에 어서 댁으로 가십시다잉? 그래야 일이 작지요."

헝클어진 머리를 거둠거둠 땋는 둥 마는 둥 걷어매고는

"업히시오."

그네는 강실이 턱밑으로 등을 내밀었다.

비록 나이 들어 흰 머리털 잿빛으로 수북하지만, 강실이는 종잇장 허깨비보다

더 가벼웁고, 안서방네는 평생토록 일로만 굳은 살 박힌 사람인지라, 후딱 업고

내달려가는 것이 빠를 것만 같았던 것이다. 자칫 머뭇거리다가 이른 새벽 무신

일로 고샅에라도 나오는 사람 눈에 뜨이면, 그런 낭패가 없는 탓이었다.

그러고 저러고 간에 우선 강실이는 검부라기 한 올만큼도 힘이 없어, 걸어가

자는 말이 도무지 나올 정황이 아니었다.

시커멓고 거대한 먹물이 져 웅크리고 있던 노적봉과 벼슬봉 연봉들이 점차 그

먹빛을 풀면서, 넌출넌출 출렁이는 새벽의 물마루가 화선지에 담묵과 진묵이 엷

게 짙게 번지듯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두 사람이 선 방죽머리에는 차가운 이내

가 자욱이 수면을 에우며 물안개로 오르는데, 안서방네는 어린 날에 그러했던

것처럼 강실이를 등에 업고, 비탈진 제방을 휘청휘청 내려왔다.

천 산을 짊어진들 이보다 무거우랴.

이 설움, 이 한세상을 어찌 살러가실랑고.

휘유우.

바튼 숨을 몰아쉬며 남의 눈에 뜨일세라 힐끗힐끗 살피면서 어푸러지듯 궁그

러지듯 막 오류골댁에 당도하였을 때, 아니, 이게 웬 일인가, 천만 뜻밖에도 그

문간에는 솟대같이 우뚝 솟은 기표가 뒷짐을 진 채로 날카롭게 서 있었다.

"어디 갔다 오는가."

안서방네는 순간 기급을 하였다.

아이고매.

이마와 등판에 진땀이 돋은 안서방네가, 저도 모르게 자지러지는 비명이 하마

터면 튀어나올 뻔한 것을 누르고는, 후르르르 떨리는 다리를 엉버틴 채, 구부린

등에 업힌 강실이를 무망간에 감추는 시늉으로 뒷걸음을 쳤다.

"어디로 가?"

"기침 허셨능기요?"

"기치임?"

안서방네 수작이 가소롭다는 듯이 말을 되받고 난 기표가, 안서방네와 강실이

를 번갈아 훑어보는 폼이, 아까부터 그렇게 사립문간에 서서, 저쪽 제방머리에서

무엇이 희끗희끗 나부끼는 모양부터 그 물체가 딱 코앞에 온 지금까지, 여지껏

눈도 깜짝 안하고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것들이 골짜기 낮은 계곡으로 가뭇 내려가 가리워졌다가 고샅 모퉁이 돌 때

는 안 보였겠지만, 이윽고 텃논 모퉁이를 돌아나올 때는 수상한 것 형상이 바싹

가까워져, 기표는 눈에 비늘을 일으키며 모를 세우고 기다렸던 참이 분명하였다.

기표의 눈썹에 날이 서 꼿꼿하다.

오금이 오그라붙어 옴짝달싹 못한 채 마른침만 꺼르르윽, 목줄기를 깎아 내리

게 삼키는 안서방네를 송곳눈으로 찌르면서

"커흐으음."

기표가 큰기침을 했다.

못마땅한 빌미를 정통으로 움켜잡은 기침이었다.

이른 새벽 등잔 불빛이 시름없이 배어 나오던 오류골댁 장지문과, 사랑으로

쓰는 건넌방 문짝이 안쪽에서 덜커덕 소리가 나게 열렸다.

그 소리에는 놀란 기색이 역연하였다.

일부러 그러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거칠게 땅을 차며 들어서는 기표를 내다보

는 오류골댁과 기응의 낯빛이 샛노랗게 질려 버린다.

두 사람은 기표가 난데없이 너무 이른 시각에 나타난 것에도 놀랐지만, 그보

다 강실이를 업고 선 안서방네 후줄근한 꼴을 보고는 기함을 하게 놀라서, 벌어

진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거기다가 그네들이 기표와 맞닥뜨리다니.

오류골댁 얼굴이 일순에 아득히 캄캄해진다.

기표는 다시 한 번 찍어 내리는 소리로 기침을 뱉으면서, 노기 등등한 발로

댓돌을 굴렀다. 그 서슬에 집안이 쿠웅 울린다.

기표가 기응의 방으로 문짝을 메다붙이게 닫으며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고서

야, 오류골댁은 버선발로 우루루 달려 내려와, 강실이를 덤썩 붙들어 안았다.

"아이고, 이게 웬일이냐."

들어오소.

안서방네한테는 눈짓으로만 시늉하며 강실이를 부여안아 안방으로 들어가는

오류골댁은 이미 어제 보던 모습이 아니었다. 밤사이에 훌쭉하니 들어가 버린

볼이며, 붉은 기운 피 비친 듯 번들번들 불안하게 퀭한 두 눈과, 납빛으로 죽은

입술들이 도무지 산사람 모색 같지가 않았다.

이제는 틀렸다.

틀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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