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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20)

카지모도 2024. 12. 6.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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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구름이 퍼렇게 물들어 번진 하늘이 나지막하면서도 아득하게 광목필처

럼, 거멍굴 근심바우 너머 무산 날맹이 저쪽 어딘가로 음울 스산한 자락을 드리

운 아래, 홍술은 임종할 때 모습 그대로, 일흔 남은 머리털을 허이옇게 흐트러

난발하고 서 있었다.

마른 장작같이 여위어 불거진 광대뼈와 훌쭉하니 꺼진 뺨에 북어껍질로 말라

붙은 거죽이며, 핏기 가신 입술을 반이나 벌린 입 속에서 적막 음산하게 새어

나오는 검은 어둠.

홍술은 시푸레한 무명옷을 입고 맨발을 벗은 채 발가락을 갈퀴처럼 오그리고,

백단이네 사립문간에 서 있었다. 제멋대로 자라나 어우러진 대나무로 울을 두른

뒤안에서

수와아아

음습한 바람 소리가 밀리며 홍술이를 씻어 내리는데, 백단이는 마침 손에 흰

종이꽃을 들고 마당으로 내려서는 중이었다. 누군가의 굿에 쓸 지화였을 것이다.

"왜 안 들오고 거가 서 자시요예? 발 한질라 벗고."

꿈에서는 시아비가 죽은 것을 몰랐던 백단이가 창호지 종이꽃을 두손에 받쳐

들고 이만큼 사립문간으로 걸어 나와 홍술이를 바라보았다.

신분이 미천하여 상투조차 좆을 수 없었던 홍술이는 산발이 된 머리카락 흰

터럭을 올올이 떨면서, 잿빛 삭은 음성으로

"아이고, 추워. 내가 추워서 못 전디겄어."

어흐으흐윽.

하더니 뼈만 남은 어깨를 흔들어 소름을 커다랗게 털고는, 백단이 쪽으로 몸을

쏟으며 나뭇가지같이 앙상한 열 손가락을 있는 대로 뻗치어 그네를 움켜잡으려

하였다.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었지만 순간 그네는 가슴이 덜컥, 써늘하게 내려앉으며

무섬증이 와락 끼쳐, 그만 시아비 손아귀를 피하여 홱 옆으로 배켜섰다. 그 바람

에 홍술이는 백단이 손을 호되게 치면서 앞을 헛짚어 대나무 울타리로 곤두박질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이고, 아부니이.

미처 붙잡을 겨를도 없이 놀라 당황한 그네가 손에서 떨어뜨린 종이꽃은, 한

가운데 수술 박은 꽃심이 뭉툭 빠져 나가면서 그만 매맞은 것처럼 꽃부리가 산

산이 흩어져 검은 허공에 소리 없이 분해되면, 낱낱 이파리를 창백하게 한 잎씩

날리어 버리고, 홍술이가 백단이 대신 부동켜안고 쓰러진 대나무 울타리는

우수수스으

검은 댓잎을 어둠 속에 토악하듯 쏟으면서, 그대로 쏠리어 먹빛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어, 어, 어. 어매매. 우리 울 넘어가네에.

백단이가 기겁을 하여 시아비 고꾸라진 것보다 울타리 쓰러지는 것에 놀라 소

리를 지르려는데, 그 울타리 쏟아진 댓잎들이 와스스 검은 물살을 이루며 마당

을 흥건히 적시는 것이 흡사 집채만한 먹물통을 엎은 것 같았다.

그 물살은 숨돌릴 틈도 없는 사이 마당을 뒤덮고는, 눈 깜짝 새, 백단이 발등

까지 차올랐다. 겁이 덜컥 났다. 시커멓게 잠기는 발등에 소스라쳐 깨어났으나.

그 얼음장같이 시리고 차가웠던 검은 물살의 냉기 감촉이, 깨어나서도 너무나 역

력하게 남아 그네는 저도 모르게 두 발을 감싸쥐며 주물러 보았던 것이다.

무신 그런 수악헌 꿈이 있이까잉.

아이고, 그 대울타리 쏟아진 꺼멍 냇물이 저승 가는 황천이여 머이여. 시방.

백단이는 진땀 돋은 이마를 짚고 골똘히 생각에 생각을 되집었다.

아니 근디, 아부니는 왜 추우싱고? 자리가 안 좋응가? 넘들이 암만 멩당 멩당

허드라도 망제하테 지기가 안 맞으먼 그게 바로 흉산될 수도 있을 거인디. 질가

테 한디다가 내불디끼 파묻어 놨어도 여지끄장 안 그러시드니 어찌 투장해 디리

고는 춥다고셔어.

더 좋다는 거이 아니라.

참 요상헌 일이그만잉. 이게 암만해도 예삿일이 아닝게빈디.

대관절 머이 잘못되었이까.

하도 고대광실 지체 높으신 마나님 산소라, 어디 안쪽으로는 언감생심 찌웃거

려 보도 못허고 배깥으서만 눈치 봄서 오돌오돌 떨고 지시능거잉가.

산 자와 죽은 자의 세상이 이승 저승 서로 별반 다르지 않다면, 부처님이 성

불을 해도 성질은 남는다는데, 청암부인 서릿날 같은 성품이 무덤 속에서라고

훈풍의 도화꽃 가지 될 리는 천만 없을 터이니, 혹 살아서 당한 것보다 더 처참

가혹한 수모 봉변을 당한 채 봉분 바깥으로 쫓겨난 것은 아닐까.

시아비가 어푸러지며 친 손목도 아직 얼얼한 것 같거니와, 부서진 꽃이며 무

너진 울타리가 도무지 예사롭지 않아 백단이는 새벽 머리부터 극조심을 하던 중

이었는데. 난데없이 들이닥친 원뜸의 머슴 종 호제들이 저승 차사처럼 춘복이를

휘갑쳐 에워싸며 잡아가는 것을 보고는, 지은 죄가 있어 후둑후둑 속가슴이 뛰

는 백단이한테, 고리배미 아낙은 부득부득 당사주를 보아 달란다.

"신수 볼라고요? 어디 대 보시오."

백단이는 기름 먹여 도톰한 유지를 덮어서 맨 진누런색 책뚜껑을 젖히며 아낙

한테 바깥 주인 대주의 생일 생시를 묻는다.

당사주책은 어느 문자속 있는 사람이 진서 달필로 쓴 괘 글귀에다 쪽물로 남

색 칠하고 당홍으로 붉은 물감 칠하면서 채색 그림을 노랑 초록 곁들여 그려 놓

은 것도 있고, 담백한 먹그림에 연분홍 진분홍 꽃핀 장면이나 사람의 입술에만

연지를 찍은데다가 향체 언문 글씨로 풀어 구구절절 줄줄이 적은 것도 있었다.

한참 동안 이마를 찡기고는 손가락을 꼽작거리면서 뽑아낸 사주대로 척 펼쳐

든 책장의 그림을 보고 아낙의 낯색이 흙빛으로 바랜다.

"이거이 머이여?"

"머이 머이여? 오구그만."

"오구라니?"

"벨라 좋든 않구만이요잉."

"오른짝이여, 외약짝이여? 좋든 궂든 간에."

"인자 들어 봇시오."

백단이가 오른쪽 그림을 우선 손가락으로 누르며 가리킨다.

아낙의 눈이 손가락을 따라 내려와서 껌벅껌벅 멈춘다.

그네는 해왈을 듣기도 전에 땅이 꺼지는 한숨을 먼저 후욱 토하고 만다. 들으

나마나 왼쪽도 오른쪽도 참혹 흉악한 형상을 하고 있기 ㄸ문이었다. 그런데 아

낙의 대주금년 해 운이 오른손 편 그림인 모양이니, 한 집안의 가장인 대주의

운수가 그러하다면, 그 대들보 따라 살아야 하는 서까래들이야.

"이게 긍게 구신들이여?"

"그렇제."

연기나 불길 같은 머리카락이 불불이 뻗쳐오른 귀신들 다섯이 한 동아리로 뭉

쳐서, 가마솥보다 더 큼지막한 북청색 향로에 오그르르 들어앉아, 무엇이 그리

옹골지게 우스운지 전을 두드리며 하늘을 보고 앙천 대소 입 벌리어 웃는 듯,

속셈을 감추고 크크큭 낄낄대는 듯, 빰따구니 불룩하게 회심의 미소를 참고 있

는 듯, 심술이 잔뜩 나서 대주가 하는 일마다 헤살을 놓으려는 듯, ㄸ귀신이 각

각의 작해로 드글거리는 당사주 그림은 참 모골이 송연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

다.

"산에 가서 공딜이고 물에 가서 공딜이고, 공 많이 딜이야여어. 이런 운수 들

오먼 천하대장군도 쇠양없어요오. 지둥 뿌랭이 밑동부텀 흔들어 부링께로."

"어쩐디야."

"여그도 있잖에요? 보살 시님이 오구 밑이서 두 손 맞잡고 비빔서 염불허고

기도허고 헝만. 이렁 것 들먼 굿을 해도 큰굿 해야여."

"그런디 이옆으 껏은 또 머이대? 누가 왜 누구 머리 끄뎅이를 잡는당가? 이것

도 나한테 닥칠 일이래?"

"그건 상관없는 거이고."

"쳅이 본마느래한테 끄집힝만이? 대주가 작은각시가 많응게비네. 저 그 뒤에

또 한나 딱 섰그만."

"넘의 살림 속 귀경헐 뜸이 없겄는디요."

"또 머이라고 나왔간디?"

"올 신수가 참 괴악허요잉. 이런 괘 나오먼 나도 참 팍팍헌디, 그래도 헐 수

없제. 나온 대로 일러줄 수배끼. 거짓말은 못허겄고. 새겨서 들어 뵈겨."

갈마상산에 절무스천이라.

목마른 말이 산으로 올라간 형국이니 샘물이 전혀 없도다.

"엄동설한 눈 속으다 밭 갈고 씨가시(씨) 뿌리니, 수고는 뼈를 깎는디 공은 없

겄다네요."

설리경종 도로무공이고잉.

귀소양상 재화불소라.

귀신이 들보에 우니 재앙이 적지 않도다.

심중유고 항사출가라.

심중에 괴로움이 있어 늘 집을 나가려 한다아.

라고 했네요.

"아니 무신 그런."

아낙은 중치가 막혀 말을 못 잇고, 백단이는

"내 속도 시끄러 죽겄그만 왜 오늘따라 해왈이 이렇다요? 참."

한 소리를 뱉고 만다. 이상하게도 그 괘들은 아낙의 것이 아니라 마치 제 운

수를 예시하며 자기 앞으로 떨어지는 점괘 같았던 것이다.

백단이는 한문을 알 턱이 없었으나 그림만 보고, 그에 따른 글귀는 배운 대로

외워서 뜻을 풀어 일러준다. 그것은 시어미 점데기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점데

기는 또그네의 시어미한테 시나위 구음 넣듯이 그렇게 그림에 곁들인 글씨를 노

래처럼 읊는 법을 배웠을 터이고.

"까막눈이 문자속 어설픈 선비 뺨친다."

는 말을 들을 만큼, 청 홍 녹 황 그림만 보면 저절로 그에 따른 글귀들이, 단 한

자도 읽지는 못하지만 청산유수로 흘러넘쳐 읊어지도록 백단이는 당사주책을 익

히고 익히어서,

"백단이가 당골네 하기는 아까운 식견이 있다. "

는 말을 들을 정도로까지 되었다.

귀신살이 문에 비치니

질병을 부디 조심하라

비밀한 일 이루기 어려워

꾀하는 일이 불리하도다.

"내 코가 석 잔디 어느 하가에 남을 돌아볼꼬잉."

백단이가 막 그 구절을 중얼거리며 읊어 짚을 때였다.

사립문간에 웅성웅성 사람 소리 들리는가 싶더니, 벼락을 치듯이, 지게 문짝이

떨어져 나가게 덜크덩, 발칵 열어제친 장정들이 방안으로 들이닥쳐 불문곡직 백

단이한테로 달려들어 멱을 틀어쥐었다.

"왜 이러요?"

놋쇠 깨지는 소리로 백단이가 비명을 질렀다.

영문을 모르는 고리배미 아낙이

"아고매애."

놀라서 방구석으로 달아나 제 머리통을 붙움키며 자지러지고, 뒤안에서 아들

놈 귀남이 썰매를 고쳐 주고 있던 만동이는 백단이보다 먼저 잡혀 이미 새파랗

게 질린 입술을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한나절에 두 번씩이나 , 없던 일을 당한 거멍굴 사람들은 혼이 반이나 나가

아무 경황이 없는데, 매안의 원에서 명을 받고 들이달은 머슴과 종 호제들은 만

동이와 백단이를 앞세우고 뒤세워 끌고 가니.

거멍굴에서는 물론이고, 매안에서도 사람들이 고샅으로 몰려나와 둘씩 셋씩

서서, 이 사단이 대관절 무엇인다,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좌불안석 초조하게 수

군거리며 구경하였다.

이제 이기채의 엄청난 추단이 있을 것인데 죄상을 심문해서 처단하자면 덕석

말이 몰매는 피할 길이 없을 터이고, 또 그러자면 피몽둥이 몇 개는 좋이 부러

질 것 아닌가.

상서롭지 못한 일이었다.

노종부 초상 치른 지가 엊그제인데, 해가 바뀌자마자 상청에 더러운 피 튀기

며, 살 찢기는 울음 소리 마당에 낭자한 것이 과연 당키나 한 일이랴. 그것도 굴

건제복에 베옷 입은 상주가 몸소 몽둥이 들어 난도로 후려치며 짓ㅈ는다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라는가 부다.

누구 하나 죽어 나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지레 숨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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