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진 놈이 죽는 것은 아니할 말로 오히려 불행 중 다행이지. 저러다 만일 억
울하고 원통한 분기를 못 이긴 증손이 그대로 성질이 북받쳐 기색을 해 버리면
어쩔꼬."
그러다 자칫 절명할 수도 있는 일이어서, 남평 이징의는
"남 잡다가 나 잡기 쉬운즉, 남을 놓아 주어야 나도 놓여 날 것이데. 저토록
탱천하게 노여우니 큰일이로다."
혀를 찼다.
그런 염려가 들 만큼 이기채의 분노는 하늘을 쪼개게 치솟아 있었고, 그 분노
를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그의 기력은 쇠하여 있었다.
이 와중에, 내일이 오마던 날인 황아장수가 어찌 다른 때보다 하루를 앞당겨
매안으로 올라오다가, 이 뜻밖의 정경에 놀라서, 원뜸의 종가로 얼른 올라갈 염
을 못 내고 우선 아랫몰 임서방네 집으로 들어갔다.
"죽을 일을 헝 거이제 살 일을 헝 건 아니여."
임서방은 어서방과 고샅에서 고누 듣던 것을 걷어치우고 휘잉하니 머슴 사랑
쪽으로 걸음을 놓았고, 집에는 입서방의 아낙 앵두네와 딸내미 앵두가 마주앉아
시래기를 다듬고 있었다.
"아 야, 앵두야. 너는 왜 꼭 눈먼 큰애기 시라구 다듬디끼 그렇게 건성 대충
헛손질로 더듬거리고만 있냐? 손이 공중에 떠 갖꼬."
"어머이. 나 쩌어그 조꼐 가 볼라고."
"쩌어그가 어디여?"
"매맞는디."
"에라이, 썩을 년. 그래 귀경헐 거이 그렇게도 없어서 넘 매맞는 것 체다볼라
고, 크대 큰 거이 치맷자락 펄렁거리고 쫓아갈라고 그랬냐?"
앵두의 대가리를 쥐어박는 임서방네한테 황아장수가
"심바람 조께 시켜 보시오. 쩌어 원에 시방 살째기 가도 허겄능가 어쩌겄능가.
꽃니에미한테 물어 보래."
하고 말을 붙인다.
'원'이란 '원뜸'중에서도 이씨 문중의 종가를 남들이 부를 때 공경하는 마음을
담아 하는 말이었다.
"피난 난리 북새통에 인편 있다고 편지 전해 주라겄네."
임서방의 아낙은 눈꼬리에 웃음을 묻히며 핀잔같이는 말하지만, 앵두보고 얼
른 갔다가 말만 건네고 피잉 오라고 으름장을 놓아 보낸다.
실은 자기도 좀이 쑤시게 궁금했던 것이다.
앵두는 시래기 다발을 동댕이치고 튀어나가는데, 앵두네는 황아장수한테 마루
로 좀 올라앉으라 권하며 걸레로 탁, 탁, 마루를 친다.
앵두네가 황아장수한테 상냥한 것은 잇속이 있어서다.
매안으로 들어오는 초입인데다가 임서방이 사람을 좋아하고 이야기도 잘하는
것이 이무러워, 방물장수나 비단봇짐 황아장수나 해물장수나 간에 쉽게 들어와
다리를 쉬는 것이 임서방네 집이었다. 그러면서 물도 얻어마시고, 밥도 한술 얻
어막고 또 더러는 날이 저물면 좁은 대로 끼어서 한 밤 자고 가기도 하였다. 그
런 일이 여러 번 되풀이되면 방물장수는 신식 꽃핀이나 빨간 단추 같은 것을 앵
두 주라고 내놓기도 하였고, 황아장수는 만지기에도 아까운 모본단 짜치(옷감을
마르고 남은 헝겊 조각)를 옷고름이나 하라면서 주기도 하였던 것이다.
"해 다 저물어 가는디 여그디 자제 왜 수선시럽게 집안 뒤집힌 디로 갈라고?
오늘 시방 매안에 난리 나 부렀소."
황아장수는 임서방의 아낙 말에 뜻 모를 고개만 끄덕이었다. 그러면서도 굳이
지금 바로 갈 일이 있는 듯이 말하는 것은, 아무리 난리가 났다 하더라도 저녁
밥은 먹어야 하겠는데, 여기 있는 것보다는 원뜸으로 올라가는 편이, 무엇이 나
아도 나은 까닭이었다.
"오라시네요."
얼마나 있다가 앵두는 꽃니까지 달고 내려와 헐떡헐떡 숨이 차서 한마디 던지
고는, 다시 머뭇거리다가는 행여 어미한테 잡힐세라
"꽃니야아, 꽃니야아."
마치 꽃니 불러 급하게 시킬 일 있는 것처럼 뒤쫓아 달아나 버린다.
"에이구우. 빌어먹을 년. 헤기사 이 세상에 지일 재밌는 거이 불구경 쌈구경이
라는디 오죽허겄냐? 패든지 맞든지 우리 일 아닝게로, 가서 보든지 말든지 맘대
로 허그라."
앵두네는 딸년이 뛰어간 쪽에다 눈을 한 번 흘긴다.
꽃니어미 우례는 침비라, 황아장수가 원뜸에 오르면 으레 먼저 큰방에 비단짐
을 내리지만, 혹시 묵고 가야 할 형편일 때는 우례의 행랑에서 한숨 붙이곤 하
였다.
아까 춘복이를 잡으러 갈 때도, 지금 막 만동이와 백단이를 잡아 올때도, 꽃니
아비 사노 정쇠가 끼었던 탓에, 우례는 안채의 효원과 사랑채 마당 귀퉁이에 선
정쇠 사이를 오가며, 벌어지는 일 정황을 상세히 효원에게 전하였다.
마침 큰방에서 효원이 율촌댁과 근심스럽게 마주앉아 있는데 우례가
"황아장수가 왔는디요."
말씀을 사뢰자, 율촌댁은 역증 섞인 대구를 하였다.
"그 아낙은 눈이 없다드냐?"
머쓱해진 우례는 무렴하여 얼굴을 붉히며 새아씨 효원한테 원정하듯, 어찌할
까 바라본다.
그러나 효원의 낯빛은 냉랭하다.
"안서방네한테 물어 보아라."
뒷걸음을 치며 물러나온 우례는 공연히 후우 가슴을 쓸어 내리고는, 안서방네
를 찾는다. 안서방 내외는 정지문간 토방에 있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이기채가, 죽은 그만두고 미음만한 곡기조차 하지 않은 채
저토록 극노하여, 혹시라도 나서는 아니 될 탈이 나면 어찌할 것인가, 마음을 졸
이며 노심초사 애가 탄 안서방이 안서방한테 껍질은 두드려 은행을 까 주면서
"어뜨케라도 한술 뜨세야 헐 거인디."
애가 바텄다.
안서방네는 저녁에 은행죽을 쑤려는 것이다.
"황아장수가 왔는디요."
우례는 큰방에 사뢴 말을 그대로 안서방네한테 다시 한다.
"집안이 왼통 혼비백산이라 어디 궁뎅이 붙이고 앉것냐잉? 기양 우리 방으로
가서 조께 쉬고 있으라제."
심상한 듯 말하는 안서방네 손끝이 저도 모르게 떨린다.
우리 작은 아씨, 인자 어쩌꼬잉.
인자 참말로 어쩌꼬잉.
황아장수 왔다는 말이 무슨 저승사자 왔다는 말처럼, 옮도 뛰도 못하게 목을
조이는데, 우례는 아무 가닥을 모르는 사람이라
"기양 나한테 있으라지요 머."
하고 돌아서려 하였다.
"자 좀 봐. 무단히 두 번 말을 시키네."
우례는 안서방네 성격을 잘 알아서, 거기 무슨 말을 더 붙이지 않고 얼른 시
키는 대로 해 놓고는, 사랑마당 옆구리로 나갔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기채는 사랑 누마루 꼭대기에 송곳처럼 날카롭게 서서, 뼈다귀 싼백지 보자
기를 공중으로 치켜들었다.
만동이는 아예 대가리를 꿇고 앉은 무릎 틈바구니에 박아 넣고는, 어깨마저
오그라지게 움츠린 채 전신을 와들와들 떠느라고, 감히 고개 들어 어디를 바라
볼 생각조차 못하였다.
그러나 백단이는, 어젯밤의 꿈 때문에 깨어나는 순간의 새벽부터 지금까지 가
슴을 졸이며 긴장을 한 끝인지라, 차라리, 올 것이 왔구나 싶은 낭패감에, 무슨
각오라도 단단히 한 사람인 양 또렷하게 시선을 들어 이기채 손 끝에 매달린 보
자기를 쏘아보았다.
그것은 시아비 홍술의 뼈다귀 싼 백지덩어리가 분명하였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기채가 다시 놋재떨이 깨뜨리는 카랑카랑한 소리로 물었다.
"모르겄는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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