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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31)

카지모도 2024. 12. 19.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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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루 아무 까닭도 없이 앓기 시작하던 애기엄마가 끝내 자리에서 못 일

어나고,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버리고 말았구나.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한하리요.

"니가 인제 나중에 얼마나 울라고 그렇게 웃냐."

귀신이 시기를 했던 모양이지.

그래서 옛날부텀도 복이 너무 차면 쏟아진다고, 항상 어느 한 구석은 허름한

듯 부족한 듯 모자라게 두어야 한다 했니라.

천석꾼 만석꾼 부잣집에서도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대궐마냥 덩실하니 짓는

거야 당연할 일이겠지만, 대문만은 집채 규모에 당치않게 허술하거나 아담 조그

맣게 세웠고, 작명을 할 때 또한 사방 팔방이 복으로만 복으로만 숨통이 막힐

만큼 꽉 차게 짓지는 않는단다. 지나치면 터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거든. 그리서

부부 금슬이 유난히 좋아 떨어질 줄을 모르면 예전 어른들은 오히려 사위스럽다

고 나무라셨더니라. 그런 사람들이 상배하기 쉬운 탓이었다.

그뿐이냐 어디, 귀하고 잘난 자식이 아무리 자랑스러워 사랑이 넘쳐도 남 앞

에서는 물론이고 혼자 앉아 있을 때 또한

"우리 애기 잘생겼다."

"예쁘다."

는 말은 결코 입밖에 내면 안되는 법. 사기가 끼칠까 두려운 ㄸ문이지. 뿐 아니

라 잘 먹고 잘 노는 애기가 실팍하다고, 들어올리면서 무심코

"아이구 무거워라."

한 마디 하잖어? 그럼 참 누가 꼭 지켜본 것처럼 애기한테 탈이 나서, 설사를

하든지 앓든지 그만 살이 쭉 빠지고 볼테기가 홀쪽해져, 업어도 헛덕개비마냥

가볍게 되고 말더라.

옛말 그른 데 없거든.

옛말이 내려올 때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느니다.

사람이 살다가 고생끝이 되었든 노력끝이 되었든 웬만큼 뜻이 이루어져서 마

움에 흡족해도, 아직은 미흡한 구석이 남아 있는 게 좋지.

"이만하면 됐다. "

"더 할 나위가 없다."

고 행복이 목까지 그득 차면 꼭 토해 낼 일 생긴단 말이다.

그런 순간 일생에 몇 번 있기도 어렵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그 사람이 '웃은 죄'로 어처구니없게 아내를 잃고는 오죽이나 상심하고

시름에 겨웠겠느냐. 새장가 들 생각이야 물론 못하고.

허나. 날 가고 달 가면 밤낮이 바뀌고 염량이 바뀌듯이 사람의 마음도 바뀌는

것이라, 다시는 아내 얻지 못할 것만 같았던 이 사람이 재취를 얻게 되었더래.

그래도 처복은 있는 사람이었는지 재취부인 역시 초취댁 못지않게 심덕 있고

부지런했더란다. 다만 한 가지, 그 재취가 아들을 하나 데리고 들어온 것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재혼 전에 어머니와 아들이 마주앉아 의논하기를

"차라리 자식 낳고 키워 본 사람이 제 자식을 생각해서 에미 없는 남의 자식

곧 불쌍히 여기지 않겠는가. 흠이 외나 덕이 될란지 모를 일이니 허물을 말자."

하고는 며느리를 맞이했대.

"생김새 투실투실 모난 데 없는 것으로 보아 장화 홍련이네 같은 모진 계모

노릇은 안허게 생겼다만."

재취 모색을 마주하고는 은근히 마음이 놓였으나 사람 속은 또 모르는 것이

라, 혹 전실자식 구박이나 허면 어쩌꼬, 암만해도 눈치 살피게 안되겄냐? 고슴도

치 제 새깨하는데. 하물며 사람 인정이야. 어디가 달러도 다르겄지 싶은 심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는구나.

헌데 참 놀랄 만한 일이었단다.

이 계모의 행동거지를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서도 보

았지만 도무지 남의 어미 계모라고는 할 수는 없을 만큼 전실자식한테 전심전력

극진히 대하는 것이야.

솥에서 밥을 퍼도 언제나 전실자식 것을 먼저 푸는데 고실고실 흰 쌀로 고봉

밥을 소담스럽게 담어 주고, 제 속으로 낳은 제 자식 것은 보리 눌은 잡곡 깜밥

어씩어씩 주걱 닦어 훑은 놈으로 담어 주어. 옷을 입힐 때도 새옷은 형만 해 주

고 동생은, 그러니까 계모가 데리고 온 자식은 전실소생보다 나이가 어렸던가

동생이었드래, 동생은 형이 입다 내버리는 다 떨어진 걸 주워 입히고, 빨래를 허

드라도 전실자식 것은 진솔옷보다 더 번듯하게 다듬었는데, 갑옷같이 풀먹여서

다림질 미끄러지게 해 주고, 제 자식 것은 너펄너펄 찢어진 걸 아무렇게나 듬성

듬성 꿰메 입히기나 할 뿐 별로 깨끗허게 빨어 주는 것 같지도 않었단다. 그러

니 늘 꾀죄죄허지. 세수도 제대로 시키지 않고, 전실자식은 아침 저녁 씻기고 빗

기고 다듬어 주면서.

그러니 안 이상헐 것이냐?

"저것이 무슨 속셈이 있어 저렇게 일부러 꾸며 허는 짓이냐. 뭐냐."

하고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대. 그럴 것 아니야잉? 무어 내 자식이나 전실자식이

나 차별 않고 똑같이 대한다는 것은 하늘이 내린 보살인가 하고 고맙게 여길 수

도 있지만, 이것은 앞뒤가 아조 바뀌어도 상정에 너무 어긋나게 바뀐 것 같았거든.

그래. 안 그런 척하면서 지금까지보다 더 면밀 유심히 며느리 행동거지 일거

수 일투족을 송곳눈으로 살펴보았더란다.

허지만 시종여일, 처음이나 나중이나 변함이 없어. 누가 보나 안 보나, 말 한

마디라도 전실자식이 물어 보면 온화 다정하게 대꾸하는데, 제 자식이 어머니를

부르면, 바쁘다고, 저리 가라고, 대답도 잘 안하니, 아무 물정 모르는 사람이 혹

지나가다 그 광경만 보면, 전실자식이 제 자식이고 제 자식이 구박덩이 전실자

식이나 되는 양으로 오해할 만했단다.

참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는 일이었지.

무슨 그런 일이 있겠느냐.

전에 들으면 혹 부모 자식간에도 전생의 은원이 있어 이새에 그걸 갚노라고

서로 남 못 살 세상을 사는 수가 있다고는 하지만, 시어머니는 재취 며느리 소

행을 이해할 수가 없었대.

"저것이 집안에서는 사람들 눈이 있으니 제 속마음대로 못하고, 밭 매러 나가

서는 아무도 안 보는 데서 전실자식은 꿍꿍 힘든 일 시키고, 제 자식은 그늘에

앉혀 놓고 낮잠 자라 할는지도 몰라."

며느리는 밭일을 하러 갈 때도 밥바구리 머리에 이고 꼭 큰 놈은 앞세우고 작

은 놈 뒤세워서 데리고 나갔거든.

그에 생각이 미친 시어머니가 하루는 콩밭 매러 간다고 소쿠리에 밥을 담어

이고 나가는 며느리 뒤를 살짝살짝 밟었드란다. 참, 사람으로서는 그러면 못쓰는

것이었지만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도저히 궁금증을 누를 수가 없었던 게지.

헌데 이번에도 시어머니 추측이 빗나가 버렸다지 뭐냐.

이마만큼 멀리 똘어진 둥구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한나절이 넘도록 지켜보았

지만, 글세, 시어머니 짐작과는 반대로 전실자식은 상수리나무 그늘 아래 앉혀

놓고, 제 자식은 땡땡 땡볕에서 낯바닥이 홍시가 되도록 어미를 도와 콩밭을 매

고 있더란다.

며느리는 어린것한테 쉬란 말도 안하더래.

"나, 세상에 나서 이런 일은 처음 봤다. 듣지도 못했다. "

그날 밤에 시어머니는 아들한테 그렇게 말을 했대.

"니 복인가 부다"

"먼저 간 에미가 자식 못 잊어 보낸 사람일까요?"

헌데, 그런데 말이다.

아무리 그런대도 또 하나 알 수 없는 일이 생겼단다.

하루 이틀 아니고 날 가고 달 가서, 일년이 넘었는데, 묘한 일이지, 그렇게 잘

먹이고 잘 입히고 편안히 건사한 전실자식은 안색이 누렇게 떠 파리한데다가 살

도 안 오르고 기운도 없고 키도 안 컸더란다. 아 그런데 거꾸로, 솥바닥 닥닥 긁

은 깜밥에 헌옷 입혀 험한 일 마구 시킨 제 자식은 동지섣달 설한풍에 맨발을

벗고 섰어도 얼굴이 포동포동 발그롬히 복사빛이 도는 거라. 살집도 실허고 키

도 훌썩 크고.

너 같으면 어떻겄냐. 네가 시어머니라면, 이상 안허겄냐?

"저것이 분명 필유 곡절이 있을 것이다. 내 기필코 그 까닭을 밝혀 내고 말리라."

시어머니는 다시 한 번 결심을 했지.

자, 지금까지 눈뜬 대낮에 일어나는 일은 안 본 것 없이 다보았는데, 집안에서

고 집 바깥에서고, 남 다 자는 오밤중에 혹 무슨 조화를 부리는 것이 아닐까, 그

렇게 고누었더래.

시집온 이래 며느리는 항상 두 아들을 한 방에 같이 데리고 잤거든. 서방님은

사랑에서 자고. 시어머니는 큰방에서 자고.

"철모르는 어린 것을 꼬집고 때려서 소리도 못 내고 울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저렇게 마를 리 없다. 남이 볼까 싶은 대낮에 아무리 간을 내먹이게 잘해도, 저

어린 것 속에 오갈주눅 깊이 들 일을 밤마다 쥐도 새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면,

어디다 말도 못허고 저 혼자 병이 들었을 터인즉, 고기 반찬에 비단옷이 무슨

호강일 것이며 상수리나무 그늘이 가시방석이지 꽃방석일 리 꿈에도 없지 않겠

느냐."

아이구, 무서워라.

시어머니는 순간 며느리 행동거지며 보름달처럼 원만 둥그런 얼굴, 부드러운

말씨들이 모두 너무나 감쪽같이 사특한 무엇을 교묘하게 감추는 짓거리 같기만

해서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더란다.

만일 그 짐작이 정말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들겄지?

저것이 여시가 둔갑한 것 아니여?

때가 되먼 우리 식구 모다 다 잡어먹을라고?

시어머니는 간이 다 떨렸대.

그러지 않겄냐? 옛적부터, 백 년 묵은 여시나 구미호, 꼬랑지 아홉 달린 여시

가 재주를 넘어 가지고 이쁜 여자로 변해서 사람을 홀려 놓고는, 그만 달라들어

간을 내먹느다는 이얘기를 흔히 허잖어.

암만해도 의심이 점점 더 생긴 시어머니는, 도무지 불안하고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더란다.

그래서 하루는,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가만히 방에서 빠져 나와 며느리

잠든 건넌방에 귀를 대고 기울여 보았대, 무슨, 소리 죽인 소리 들리지 않는가

하고, 그런데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부시럭거리는 소리도. 아무리 오래 그러고

지켜서 있어도 말이다. 그냥 천지가 캄캄헌 오밤중만 깊을 뿐.

"하, 이럴 리가 있느냐."

시어머니는 문설주에서 귀를 떼고, 이번에는 창호지에 침을 발라 문구멍을 폭

뚫었구나, 들여다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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