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792

혼불 6권 (29)

효원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몰아내는 주문으로 부녀의 예절을 읽고 또 읽다가, 문득 정씨부인의 모습을 떠올리고, 부친 허담의 음성을 상기하고, 그 틈바구니로 끼여드는 강실이의 그림자에 가슴이 벌어지듯 아픈 것을 가까스로 아물리어, 한 번 더 책에다 눈을 준다. 그러나 몰아내려 하여도 강실이의 모습은 뒷머리에 탱화처럼 걸린다. 암채 뇌록색 구름 무늬를 밝고 벗어질 듯 살빛이 비치는 천의를 날개처럼 두른 수수백 수수천 부처들이, 한 손에 천도 들고 한 손에는 도화 꽃가지 벙글어지게 들어 적색, 청색 황색, 흑색, 백색이 현란한 단청에 에워싸인 탱화. 사찰의 대웅전 벽면에 걸린 탱화의 부처야 그 같은 모습을 하실 리 있으리. 그런데도 효원의 윗머리에 드리워지는 휘장은 걷어낼 길도 없이 금단청으로 나부끼며,..

혼불 6권 (28)

21. 수모  "남편이 소실을 두는 것은, 나 자신에게 몹쓸 질병이 있거나, 몸소 집안일을 할 수 없건, 혹은 혼인한 지 오래되었어도 아들을 낳지 못해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된 데 까닭이 있다. 남편이 비록 소실을 두려 하지 않더라도 이런 정황이면, 옛날의 어진 아내는 반드시 그 남편한테 권하여, 사방에 널리 알아 보아 어질고 정숙한 사람을 구해다가, 그 여인을 예법대로 가르쳐 자신의 수고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어느 겨를에 투기를 하겠느냐. 혹 내게 병이 없고 아들이 있는데도 남편이 여색을 탐내서 여러 희첩을 두어 본성을 잃고 행실을 어지럽게 가지며, 미혹하고 음란한 일에 빠져 부모를 돌보지 아니하고 집안의 재물을 탕진한다면, 마땅히 정성스러운 뜻으로 힘써 두 번 세 번 간절하게 권하며 경계하고, 듣지 ..

혼불 6권 (27)

옹구네는 한숨을 늦추며 중치 대신 늑막을 질렀다. 대가리 송곳맹이로 세우고 달라들어 밨자 놀랠 사람도 아니고, 무단히 잘못 건드러 노먼, 아닝게 아니라 일은 저릴렀능게빈디, 이 마당에 머이 아숩다고 나 같은 년을 지 저테다 둘라고 허겄냐. 떨어낼라고 허겄제. 성가싱게. 그렁게 숨돌려. 너는 마느래가 아닝게로. 시앗 본 본마느래맹이로 길길이 뛰고 굴르고 허먼 니 손해여. 너는 시방 그럴 처지가 아닌 걸 너도 알어야여. 설웁지만 처지는 알어야여. 숨쥑여. 씨리나 애리나 쉭이고 들으가. 야를 저트다 둬도 벨 손해는 없겄다, 아니 이문 볼 일이 많겄다, 그런 생객이 들게 해야 여. 그러고 뒷날을 바. 알었제? 뒷날에 갚으먼 되야. 내일 안 죽응게. 모레도 안 죽응게. 오냐. 내 채곡채곡 싸 놨다가, 실에다 바늘..

혼불 6권 (26)

"어디 갔다 왔대?"재차 물어도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무겁고 깊은 한숨을 토하였다. 어찌 보면, 그가 힘없는 창호지처럼 펄럭 쓰러지지 않는 것은 뱃속에 삼키고 있는 그 한숨의 무게 때문인 것도 같았다. 춘복이는 제 한숨 속으로 가라앉았다. 내가 왜 이러까. 자꾸만 몸 속에서 진기가 연기같이 빠져 나가는 것이었다. 손금 사이로 힘없이 새는 속 기운은, 주먹을 쥐어도 모아지지 않고 그만 스르르 풀리며 흩어져 버리었다. 다리에도 힘이없어, 깍지를 끼고 모아 세운 무릎이 픽 모로 쓰러지려 하였다. 꿈인가. 안 그러먼 내가 헛것이 씌여 도깨비한테 홀렸이까. 그게 아니라먼 그런 일이 대관절 어뜨케 그렇게 꿈맹이로, 참말로, 똑 거짓꼴맹이로, 일어날 수가 있단 말잉가. 그러나 그것은 꿈도 아니고 거짓말..

혼불 6권 (25)

두려움과 호기심과 조롱으로 펄럭이며 불꽃 따라 너울대던 아낙의 날렵한 혓바닥들은 어느새 시퍼런 비수처럼 곤두서고 있었다. 칼날은 베거나 찌르고 싶어한다. 그들을 불너울 이쪽에서 힐긋힐긋 훔쳐보는 옹구네 검은 눈에도 비수 같은 불길이 파랗게 일었다. 장사 댕기는 예펜네가 이런 일에는 제 격이제. 지일이여. 이 집 저 집 문밖마동 말 뿌리고 댕기는 디는 이만헌 사람들이 없제이. 그네는 벌써부터 날 새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흥겹고도 음모에 가득 찬 밤이 한바탕 거꾸러지도록 징 치고 꽹과리 치며 놀고 싶은 들쑤심을 감당히기 어려웠다. "야는 어기 갔다냐."공배가 춘복이 찾는 말 하는데 공배네는 옹구네를 저도 모르게 돌아보았다. 고리배미 사람들이 너나없이 나와서 뒤설킨 솔밭 삼거리 ..

혼불 6권 (24)

20. 남의 님  "자알 했그만. 잘 했어. 하이고오. 이뻐서 등짝을 패 주겄네 기양. 아조 쪼개지게 패 주겄어어."휘유우. 옹구네는 시퍼렇게 심지 박힌 음성을 어금니로 짓갈아 응등그려 물면서 그렇게 비꼬고는, 외마디 한숨을 토했다. 춘복이는 주빗주빗 뒤엉켜 부수수 일어선 부엉머리를 봉분만하게 이고 앉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성질 같이 뻗세게 쑤실쑤실 휘감아 솟구친 눈썹도 웬일인지 숨이 죽어 시커먼 빛이 가시고, 낯색도 해쓱하여 여윈 듯한 모습이 도무지 평소의 그답지 않은 춘복이는, 넋 나간 사람처럼 두 팔로 무릎을 깍지 끼고 앉은 채 꺼부정한 등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그는 입술조차 퍼르스름 핏기 없이 질린 빛이었다.그는 푸른 물이 묻어난 백지장같이 얇아 보였다. "아니, 얼빠졌능게비. 정신채려어..

혼불 6권 (23)

"그렁게 궁리를 해야능 거 아니여? 테머리를 매고.""아이고, 무단히 언감생심 맞어 죽을 궁리허고 있다가, 새터서방님 덜컥 돌아오세 불먼 어쩔 거이요? 헛심만 팽기제.""그렁게 못 오게 해얄 거 아니라고? 아조 못 오게.""못 오게요?"우례의 두 눈이 옹구네가 보아도 놀랄 만큼 벌어졌다. 이 무슨 황당하고도 어림없는 이야기란 말인가. 수천샌님 안픾의 양주는 말할 것도 없고, 제 상전의 댁 청암마님, 율촌샌님, 율촌마님, 그리고 양쪽 집안 대실아씨, 새터아씨들이 날이 새면 까치 우나 감나무를 올려다보고, 밤이 오면 돌아오나, 행여라도 잘새들의 날개치는 소리에 섞여 오는가,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두 서방님. 그들은 두 집안에서만이 아니라 온 문중에서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오지 못하게 해..

혼불 6권 (22)

"그렇다면 그렁갑다, 그렇구나, 허먼 그렁 거이여.""그러먼 시방 있는 우리 아배는 또 누구여?"봉출이는 정쇠를 떠올리며 머뭇머뭇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그 아배도 아배제잉."우례는 한숨을 쉬며 탄식같이 대답하였다. 왜 이렇게 나는 몰르겄으까아. 어미 우례는 봉출이가 아부님과 너무나 똑같이 닮아서 하늘 아래 누구라도 한 번 보면 두 말을 더 못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막상 봉출이는 그 아부님을 똑바로 뵈온 일이 없어서, 그리고 제 얼굴도 본 일이 없어서, "누가 부자지간 아니라께미 원 저렇게도 판백이로 같으까잉."하는 옹구네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느님이, 이렁 걸 보먼 꼭 지신단 말이여. 하늘이 무심치 않으싱게로 설웁고 속 아픈 꽃니어매, 불쌍허고 가련헌 우례 신세, 사람 보고는 어따 대고 말도 ..

혼불 6권 (21)

고샅에서 그를 본 사람들이, 하루 종일 우례가 봉출이 찾으로 다닌 것을 아는지라 "자, 봉출이 아니여? 야, 너 어디 갔다 오야?"저마다 감짝 놀라 물었다. "오수 갔다 와요오."봉출이는 기진맥진 겨우 끌어내는 음성으로 대답하였다."아이, 봉출아, 너 한 죙일 어딨었냐? 느그 어매가 아조 죽을 혼났다. 너 찾이로 댕기니라고. 어디 갔었더?" "오수 갔다가 와요오.""오수?"아낙이 의아하여 반문하는데 봉출이는 다리까지 절룩절룩하며 발을 지일질 끌고 걸었다. 그는 몹시도 지쳐 보였다. 그리고 허기져 보였다. 조그만 몸둥아리가 동그랗게 고부라진 봉출이를 발견한 우례가 그만 우르르 달려들어 대가리를 야무지게 쥐어박고는, 하루 종일 애가 탄 끝이라 돌아온 것만 해도 반가워, 한마디만 물었다. "너 어디 갔었냐."..

혼불 6권 (20)

"아이, 수천샌님은 그렁게 참말로 무신 언질 한 마디도 없능가? 개닭 보디끼 봉출이한테 완전 넘맹이로 허세? 그러든 안허시겄지, 설마. 신분이 웬수라 그렇제 자식은 자식인디. 누구 넘들 눈에는 안 띠여도 속새로는 머 오고 간 끄터리가 있을 거 아니라고?"나이 우례보다 한 둘 더 먹은 옹구네는 우례를 한쪽에서부터 살살 돌려가며 변죽을 긁어 두 사람 사이를 조였다. 우례한테 파고들기 위해서는, 우례한테 제일 아프고 서러운 끌텡이를 건드리어 들추며 동정하는 것이 제일 손쉬운 때문이었다. "산지기 박달이 자식도 보통핵교 가고, 수악헌 백정 택주네 자식도 책보 둘러메고 핵교 가등만. 온 시상이 다아는 양반의 자식으로 이씨가문 피 받어난 봉출이가 무신 죄 졌다고 넘 다 가는 학교를 못 가, 긍게. 시절도 인자는 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