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원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몰아내는 주문으로 부녀의 예절을 읽고 또 읽다가, 문득 정씨부인의 모습을 떠올리고, 부친 허담의 음성을 상기하고, 그 틈바구니로 끼여드는 강실이의 그림자에 가슴이 벌어지듯 아픈 것을 가까스로 아물리어, 한 번 더 책에다 눈을 준다. 그러나 몰아내려 하여도 강실이의 모습은 뒷머리에 탱화처럼 걸린다. 암채 뇌록색 구름 무늬를 밝고 벗어질 듯 살빛이 비치는 천의를 날개처럼 두른 수수백 수수천 부처들이, 한 손에 천도 들고 한 손에는 도화 꽃가지 벙글어지게 들어 적색, 청색 황색, 흑색, 백색이 현란한 단청에 에워싸인 탱화. 사찰의 대웅전 벽면에 걸린 탱화의 부처야 그 같은 모습을 하실 리 있으리. 그런데도 효원의 윗머리에 드리워지는 휘장은 걷어낼 길도 없이 금단청으로 나부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