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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47)

"암만해도 이건 태맥이라......."그러고는 차마 무어라고 더 덧붙이지 못하면서 겨우 "비장이 몹시 말러서, 제가 보중익기탕을 한 번 써 볼랍니다. 그게 비장을 보허고 약이 닿을 것 같그만요."비장이 상허고 마른 것만으로도 강실이가 몸을 지탱하기 이미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아이까지 들었으니. 그렇지 않은 사람도 앞앞이 입덧이 다 다른 마당에, 물 한 모금도 목에 못 넘기며 온 밤을 뜬눈으로 새우기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인즉. 어째 어제 아니고 오늘에야 기색하며 쓰러질 것이야. 강실이는 살았다 할까. 죽었다 할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진의원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우루루루, 검은 하늘이 부서져 무너지며 집채만한 바위 덩어리로, 오류골댁과 기응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그 정수리 빠개지는 소리가 진의원에..

혼불 6권 (46)

진의원이 혀를 찻다. 그러나 그네는 어느새 일어서 버리고 말았다."저런 버르쟁이."다시 진의원이 무어라 하려는데, 방문이 열렸다. 비오리어미가 술상을 개다리 소반에 보아 막 들고 들어오는 것이다. "야가, 야가, 야, 너 멋 허고 섰냐? 절 헐라고 그리여?"방안의 수작을 다 엿들어 알고 있는 그네가 오똑 서 있는 비오리를 나무라며, 딸년의 어깨를 눌러 주질러 앉혔다. 할 수 없이 술상 머리에 앉은 비오리한테 오리 모가지 술병을 안기고는 어미가 눈치 빠르게 제 이부자리를 붇움어 안고 저 방으로 건너가 버리자, 진의원은 술잔을 들었다. 그는 비오리어미의 반색이나 비오리의 앵돌아짐조차도 잊어 버린 듯 아까처럼 무표정으로 무겁게 잔을 들고만 있었다. 비오리가 얼른 술을 따르지 않은 까닭에 얼마 동안이나 그렇게 ..

혼불 6권 (45)

24. 진맥  "어찌 오시오?"비오리는 낭창한 치마꼬리를 한쪽으로 휘이 걷어 감으며 일어서서 진의원을 맞이하였다. 그의 탯거리에는, 한때 그의 소실이었던 흔적과 원망이 아직 다 지워지지 않은 토라짐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이때쯤은 올 줄 알기나 했던 것처럼 흔연한 기색도 배어났다. 그것은 여러 해 주모 노릇으로 닦이어, 날선 몸의 모서리가 둥그름해진 흔연함이기도 하리라. 사람의 몸에도 세월이 묻으면, 어느결에 장롱이나 반닫이에 스미는 손때 같은 것이 저절로 눅눅하게 스미어 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마음에도. 비오리는 지금 스물한 살이 아니었다. 진의원은 그런 비오리를 비스듬히 내리뜬 눈길로 바라보며 방문 앞에 흰 구두를 나란히 벗어 놓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중절모를 그네한테 건네준다. 그의 ..

혼불 (6권)

혼불 6권   13. 지정무문  혼인하면 반드시 따르는 것이 사돈서였다. 이는 일생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부녀자로소 각기 그여아와 남아를 성혼시키고 난 후에, 서로 얼굴도 모르지만 시 세상에서 제일 가갑고도 어려운 사이가 된 안사돈끼리, 극진한 예절을 갖추어 정회를 담은 편지를 서로 주고 받으면서 양가의 정의를 더욱 두텁게 하고, 자식들의 근황이며 집 안팎 대소사를 마치 같이 겪어 나가는 것처럼 이야기로 나누는, 정성과 격식이 남다른 편지였다. 허물없는 친구에게 흉금을 털어놓는 사신이 아니면서도 자식을 서로 바꾼 모친의 곡진한 심정이 어려 있고, 그런 중에도 이쪽의 문벌과 위신에 누가 되지 않을 만큼 푹격을 지녀야 하는 사돈서는, 조심스러우나 다감하였다. 궁체 달필로 문장을 다하여 구구절절 써내려..

혼불 6권 (44)

"지금 애기씨가 작은집으로 내려가야겠는데요?"거두절미한 효원의 말에 율촌댁보다 더 놀란 사람은 오류골댁이었다. 그리고 누워 있는 강실이도 그 말을 어렴풋이나마 들었는지 몸을 움칠하였다."너 지금 정신 나갔냐? 아니, 아니 너. 너 , 누구 앞이라고.""긴 말씀은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서두르셔야 해요.""이런 괘씸한 아, 이런...... 이런 일은 내 나고 첨 보겠네. 아니 너."율촌댁이 얼굴에 기가 질린 노기를 띄우며 강실이 쪽으로 한 무릎 다가앉았다. 절대로 안된다는 표시였다. 오류골댁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만 있다. 서글프고 야속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어머님. 사정이 있습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말을 해라.""지금은 안됩니다."어기가 찬 율촌댁이 엉버티고 앉은 효원..

혼불 6권 (43)

"누구대?"가까이 다가온 그림자 하나가 원뜸의 깔담살이인 것을 알아보고는 짐짓 그렇게 목청을 냈다. 깔담살이와 함께 오는 사람이 누구인가 궁금했던 것이다. 깔담살이도 옹구네를 알아본 것 같앗다. "여가 왜 있당가요?""응. 나 집이 가니라고오. 저물었네? 어디 갔다 온디야?"나이 든 사람은 옹구네 곁을 휙 스쳐 잰 걸음으로 저만치 질러 가고, 깔담살이는 옹구네한테 붙잡혀 몇 마디 대꾸를 하느라고 뒤쳐졌다. "저 냥반이 누구냐?""광생당 진의원님 아니싱교."그러먼 그렇제. 옹구네는 손뼉이라도 치고 싶었다."진의원님이 왜? 이 밤중에.""아이고, 나 얼릉 가 바야요. 시방 아무 정신이 없고마는.""원뜸에 뫼시고 가냐?""작은댁 애기씨 때미.""오오."어서 가 바라. 옹구네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손짓으로 깔..

혼불 6권 (42)

꽃니는 목을 질금 움츠리며 제 어미 눈치를 헬금 살폈다. 어매가 무어라고 하든, 옹구네가 나타나면 꽃니는 재미가 있었다. 이제 열 살 막 넘은 계집아이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어른들의 비밀스러운 수군거림이 옹구네한테서는 늘 쇳대 소리같이 절렁절렁 울렸고, 어린 눈에 보아도 가무잡잡 동그람한 얼굴에 샐쪽한 눈꼬리며 도톰한 입술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예뻐 보였던 것이다. 거기다가 옹구네는 꽃니를 애들이라고 무질러 몰아 버리지 않고 꼭 말참례를 시켜 주었다. 그런 것들이 꽃니는 은근히 좋았다. 언젠가 뒤안 마당에서 콩심이는 철재를 업고 서 있다가, 히끗 모퉁이를 돌아가는 옹구네를 보고 꽃니한테 "아이고, 촉새, 나는 옹구네만 보먼 준 것 없이 밉드라."고 입을 비쭉 했었지만. "우례도 나맹이로 전상으 죄가..

혼불 6권 (41)

"이 말 하나 헝 것만도 사지 멀쩡헤기는 힘든 일인다. 믿을 자리라 내가 참 죽을 작정허고 헌 말이요. 그런디 그보담 더 헌 소리를 시방 내가 해야는디, 이 말은 나 하나만 죽고 사는 거이 아니라 여러 사람 생목심 달린 거이요. 그렁게 내가 보장을 받어야 말을 허제.""보쟁이라니?""혼자만 일고 있겄다고 맹세를 해야지.""허께 해 바.""말이 쉽소.""그러먼 어디다 달어매 꼬아주까? 에럽게?""나도 암만 상년이지만 살고 잪지 죽고 잪든 안헝게 그러제.""그보담 더헌 소리란 거이 머이야, 그렁게.""내 이얘기 좀 들어 보시오. 내가 조상을 잘못 타고나서 천하 상것으로 났소. 허나, 상것이라고 넘 사는 세상을 못 살 거이요? 나도 이팔 청춘 이쁜 나이 되야서, 옹구 아배 만나 귀영머리 마주 풀고 작수 성례 ..

혼불 6권 (40)

"네가 혼인해서 이제 시댁으로 갈 때 이 신랑 주발에다가는 흰 찹쌀을 담고, 신부 바리에다가는 붉은 팥을 하나 가득 담는 거란다. 그래 가지고 각각 이렇게 대접에다 받쳐서 홍보에 싸지. 수저는 네가 곱게 수놓은 그 모란꽃 화사하게 흐드러진 수저집에다가 한 벌식 넣고. 그렇게 가지고 가면, 느그 시댁에서는 신부를 새로 맞이해서 구고례를 치르고는, 큰상을 채려 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날 저녁에는 신부가 식기에 담어 온 흰 찹쌀 붉은 팥으로 찰밥을 지어 밥상에 놔 주니라."그것은 신랑 신부가 서로 찰밥처럼 찰지고 다정하게 살라는 축수와 붉은색이 모든 액을 물리쳐 주기 바라는 벽사 제액의 기원이 깃든 밥이었다. 성년의 첫 밥. 내 그 밥그릇을 채울 일이 없으리라. 이제는 내가 누구에게로 혼인하여 시집을 가..

혼불 6권 (39)

23. 시앗  세월이 묵은 담 모양으로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는 장독대는 마당보다 두어 단이나 높다. 자잘하고 반드러운 돌자갈을 쌓아 도도록이 채운 장독대에 즐비한 독아지와 항아리, 단지들이 기우는 석양의 붉은 빛을 받아 서글프고 정갈하게 타오른다. 여름날이었다면 이런 시간, 장독대를 에워싸고 피어나는 맨드라미의 선홍색 꽃벼슬이며, 흰 무리, 다홍 무리 봉숭아꽃들, 그리고 옥잠화의 흰 비녀가 주황에 물들 것이지만, 분꽃의 꽃분홍과 흰 꽃들도 저만큼 저녁을 알리며 소담하고 은성하게 피어날 것이지만. 지금은 꽃씨가 숨은 껍질이 땅 속에 묻힌 채 터지지 못하고 있으니, 노을은 저 홀로 주황의 몸을 풀어 어스름에 섞이면서 장독대를 어루만져 내려앉는다. 그 장독대에 선 네 여인의 흰 옷과 검은 머릿결 갈피로도 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