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66

카지모도 2016. 6. 16.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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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3. 1.(화)


나는 이제껏 어떻게 살까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기 위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도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의 연소를 안타깝게 생각한 적도 없다.

도피일지도 모른다. 무서워서.

그저 막연히 기다리고 있다.

기회를 노리는 것도 아닌, 그저 망연히 앉아서.

일종의 천재주의, 자기도취에 빠져서 어떤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잘 난 점이 뭔가?

남보다 잘난건 아무 것도 없다.

무슨 여건이라도 좋은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우연, 찰나적인 확률은 남보다 더 많다고 자신하는가.

아니다. 난 재수좋은 놈이 되지 못한다.

그럼 무얼 기다리고 있냐?

아버지란 사람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느냐?

시간을 움켜 쥐고 죽어버릴 날을 기다리냐?

자, 똑똑똑똑- 저 초침이 흘러가는 소리를 들어 보아라.

아깝지 않느냐?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느냐?

어린 시절 꾸었던 꿈.

꿈 속에서 누군가에게서 받았던 진귀한 크레용. 현실세계에선 볼수 없는 진귀한 색깔의 크레용. 나는 꿈 속에서 본 그 크레용이 이 세상 어딘가에는 분명히 존재하고 언젠가는 그 선물을 받을수 있을거라는 그 확신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줄곧 그 크레용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까지도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데서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그 꿈은 꿈으로서 버려야 한다.

실존하지 않는 상황은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그런 희열은 내 정신 속에만 가두어두고 이제 정말 시간을 갉아 먹으면서 살아야 한다.

우둔한 깨달음.


1966. 3. 2.(수)


종일 커단 부담을 의식하며 보냈다.

어머니. 당신은 어쩌면 자식을 무척 잘 못 키우고 있는건지 모릅니다.

우리 치열한 당신의 아들로서만 키워 주십시오.

그것이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손자, 조카.. 관습과 의타심 속에 그토록 의식적으로 밀어 넣지 마세요.

무척 안이합니다.

차라리 서럽게 하세요.

아버지없는 놈이라고.

절치부심 이를 악물고 일어 서게 하세요.

아무리 나약하여 불쌍하더라도 말입니다.

이런 상황은 자랑이 아닙니다.

마음의 큰 부담을 늘 의식한다는건 고통입니다.

마음 약하고 지극히 소심한 나는 내 생존이 남의 덤같이 느껴지면 결국 쓰레기가 될까봐 두렵습니다.

아!아니에요.. 당신의 안이가 나를 자극하는게 아니에요.

내 자신이, 쥐새끼같이 눈깔만 반짝이는 내가 나를 그렇게 느끼나 봐요.

또 날 변명해 버렸군요.


고쳐야지. 암, 고쳐야지.

좀 더 단순해 저야지. 좀 더 그냥 편하게 받아 들이자.

덤이 아니고 상헌이라는 한 생명이 공기를 마시고 밥을 먹고 똥을 누는게 아니냐?

좀 자신을 확고히 의식하자. 자신을 갖자.

이 거꾸로 된 생각들은 온통 내 성격 탓이다.

누구 탓도 아닌 내 탓이다.

선영을 생각지 말고 내 무덤만을 생각하자.


1966. 3. 3.(목)


비가 쏟아졌다.

비오는 날은 마음이 평화롭다.

복잡한 교류의 두절과 모든 사람이 외로울 것같은 그런 일종의 범죄심리(?) 때문인 것 같다.

차단된 고독. 외로우면 순수해 지나?

이런 날, 영미같은 계집애와 한 우산 속에 갇혀 버렸으면.. 로맨티시즘..

그렇게라도 않으면 고독은 심심하다.


그래서 오늘은 심심했다.

음악실 가고 싶은 욕망을 참는다.

무기력한 젊음의 집합소같아서.

쓰던 습작 "카인의 집"을 진행시키려 하였으나 펜만 잡으면 왜 그렇게 글쓰기 싫어지는지.

비오는 날은 차단된 고독을 맛보고 순수해지고 심심하다.

계집애와의 밀어가 그립고 감상에 젖는다.

그러다가도 햇볕이 잠시 보이고 질퍽질퍽한 행길을 장화들이 오가면 그 감상은 역겨운 현실의 회복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슬프고 그래서 미치는가보다.

비오는 날은 심심하다.


1966. 3. 8.(화)


주원이 서울로 떠났다.

새로운 생활의 기대와 해방감에 가슴을 부풀린채.

학교는 12일부터 개강이다.


내가 만나는 놈들은 어째서 그렇게 무기력한 놈들 뿐인가?

갈 곳이라곤 당구장밖에 없고.

기탁이에게 알바이트 부탁하였는데 어찌 될는지 모르겠다.

성주는 꼭 결핵환자같다. 덮수룩한 머리에 야윈 얼굴, 멋은 지독히 부리는데.


영화 "유정"을 봤다.

이광수작, 김수영감독. 아버지를 사모하는 양녀. 앳되면서 사근스근한 남정임. 사회의 비난을 받으며 최교장은 정처없이 떠난다. 그도 정임을 사랑하고 그 때문에 그의 인격은 괴로웠다. 그런 스스로의 위선을 자학하고 정임은 죽음에 이른다.


1966. 3.11.(금)


교도소에 영대 아저씨면회를 갔다.

모시고 간 서울할머니 말씀이 아저씨는 너무 성실하여 요령이 없기 때문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너무 성실하여서 실의의 인생을 허비한 것이란다.

교도소- 대기실의 풍경.

모두 죄가 아니고 하나의 운수?

죄수복을 입고 앉아있는 아저씨를 경멸해야 할지 존경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회는 모순이라고들 굳게 믿는 듯 하였다.

서글퍼진다. 그렇다면 이 사회는 우스꽝스러운 연극이 아닌가.

푸른 죄수복으로 앉아있는 저 쪽과 이 쪽편으로 구분지어져 있다는게 꼭 장난같다.

기준은? 인간사회의 근본적인 기준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영어의 몸이 되게하는 법률이란건 또 무어란 말인가?

새로운 형태의 인간사회 기준이 현대라는 상황 속에서 서서히 굳어져 가고 있다.

감방, 감방장, 답답함, 햇볕, 전과자, 좌절감, 고독, 소외당했다는 몸부림, 그 속에서 선이라는 걸 생각할수 있을까?

악하지 않은 사람들, 모두 내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

타당한 행위가 단지 운에 의하여 죄가 되는 세상인가.


1966. 3. 14.(월)


학교에 갔으나 수업은 없었다.

햇살은 따스하고 몸은 노곤하게 늘어진다.

이제 봄이 온거야.

살살 봄바람이 불어온다. 내 가슴에.


"날이 지고 날이 샜다.

달이 뜨고 달이 젔다.

오라. 소녀야.

초원을 맨발로 춤을 추자.

꽃송이처럼 웃으면서

나비처럼 훨훨 춤을 추자.

오라. 소녀야.

이제 봄이 왔구나."


1966. 3. 15.(화)


학교에서 태상이 만나 다마치다.

일용이 집에서 뒹굴다가.

오랜만에 칸타비레 들린다.

비는 촉촉히 내리고. 봄 비.


1966. 3. 16.(수)


슬프게두 난 눈동자만 빛나는 굼뱅이가 돼버렸다.

간유구는 열심히 먹으면서 당구는 죽자구 치고, 자제심이 지독히도 없는 허풍선이!

내가 스스로 돌보고 가꾸어 무언가를, 펴지다 지는 한이 있더라도 피워봐야 하지 않는가.

과정이 가치있는 것인데 완성만을 몽상하는 지독한 허풍쟁이!


소리예술에 심한 매력을 느낀다.

희곡을 써야지. 내 작품을 내가 무대에 올려 내가 지껄여 봐야지하는 욕망이 있다.


기탁이와 되지도 못한 철학적 얘기 씨부리는데 정말 되먹지 않은 놈들이다.


1966. 3. 17(목)


전에 봤던 영화 "가슴을 펴라" 또 보았다.

문학병, 허약, 반출세, 부자애, 이용자, 엄숙한, 서불리, 지리박...

등장인물의 성격이 곧 이름이다.

주제는 가난한 젊은이들의 고뇌와 낭만을 그리면서 기성세대와의 갈등을 극복하는데 있는 것 같지만, 감독의 어설픔일까? 나는 그저 그 출연진들의 낭만과 멋, 뭐 그런것만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학병은 무궁무진한 낭만의 보고를 가지고 있어. 그러나 끝에 가서는 언제나 현실의 쓰레기통에 오고 말아."

"가슴을 펴. 가슴을 펴고 걸어. 이까짓 현실이 무어야. 코 앞에 있는 이따위 사소한 고민이 무어야? 가슴을 펴."


그런 낭만, 그런 기개에 비하여 자! 상헌이란 놈아.

네 지금 왜소한 도피주의의 마음을 한번 보라.

네 지금 마음은 바로 이런 거다.


"아무나 오너라. 이 으스스한 공간으로. 아무나 오너라. 바치겠노라. 미련없이 바치겠노라. 나의 존재를 송두리째 바치겠노라.내가 사라져서 이 땅덩이의 무게가

억만분의 일만큼이라도 가벼워 졌거든 네가 와서 거짓말처럼 메꾸어주려므나. 아무나 오너라."


1966. 3. 18(금)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홀로 태종대의 산길을 달린다.

비안개 자욱한 드넓은 공간, 바다와 하늘이 맛닿은 곳이 어디쯤인지..

그저 확 트인 저 넓고 넓은 공간에서 비가 내린다.

진달래꽃, 뻐꾸기우는 소리, 꿩도 보았다.

절벽위 바다를 내려다 보면 피가 들끓는 것 같다.

또는 허공에 몸이 날려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추락할 것 같은 기대와 공포도 있었다.


1966. 3. 19(토)


영화 "태양의 제왕"

수업은 빼먹은채.

율 부린너가 좋다. 하얀 망막에 동그란 눈동자, 두툼하게 닫은 입술에는 야성적이지만 또 여간 지성적이지 않다. 거칠고 단단한 피부속에는 한없이 부드러운 내면을 갖고 잇을 것 같다.

그의 적역은 아마도 "건화이터의 초대"가 아닌가 싶다.

한말숙의 단편집 "별빛 속의 계절" 읽다.


1966. 3. 22(화)


연극부의 CASTING에 합격.

흥분된다.

연극- 영남학생 연극 경연대회.

유진 오닐의 "위험지역"

정말 오랜만의 만족감.


1966. 3. 26(토)


아침, 나무 판때기를 뚝딱거려 개집 완성.


대청동 미공보원에서 대본일기 연습.

연극부장 언뜻 비치는 언질, 드리스콜과 콕키중 하나를 맡을 듯 하다.

드라마를 진행시키는 전형적인 선원, 난폭하고 단순한 반면 끈질긴 성격에다 선실안 선원들에게 카리스마를 갖고있는 주연급이 드리스콜이고, 풋내기선원, 겁이 많고 약하면서도 허풍이 센 피에로같은 성격의 역할이 콕키이다.

부산방송국의 여수중선생 연출.

작품해설에 권위가 흐른다.

그러나 선배라는 대가리들의 독선적인 행동이 가끔 역겹기도 하지만 연극이라는 이것에 나는 무척이나 만족하고 잇다.


1966. 3. 28(월)


콕키역으로 확정.

부장이 드리스콜.

나를 불러 내어 부장이 하는 말이 콕키가 연기상을 노릴수 있는 역이라는둥..

피에로-

콕키역은 무척 서운하다.


1966. 3. 29(화)


뜻밖에 서울서 철주와 형서가 내려왔다.

충무동 숙소를 정하였다.

팔자좋게 학교를 쉬어가며 여행다닐수 있는 녀석이 부럽다.

일주일동안 머문다니 실상은 골치 아프다.

명색 친구라고 찾아 내려 왔는데, 집에서 숙식은 못할 망정 함께 어울리기는 해야 하니까.

첫째 예산이 둘째 시간이 골치아픈 것이다.

본격적인 연습인데.


1966. 3. 31(목)


철주와 형서 제주도로 떠나다.

푸짐히 쓰는 돈에 오히려 내가 한이틀 잘 접대받은 꼴이다.

아직 등록을 못한 학교.

책값은 그렇다 치고 등록금은 빨리 되야 할텐데.

연극을 시작하고 나서는 학교가 재미있다. 학교란 다닐만 하다.


1966. 4. 1 (금)


막내 작은아버지 내려 오셨다.

삼촌들에게서 슬금슬금 피하게 되는 주눅은 내 아픈 무엇일까?


기탁이 보여 준 영화.

윌리엄 와일러 감독 '우리 생애 최고의 해'. 무척 인상적인 영화다.

2차 대전 끝나 고향으로 귀환한 제대군인들. 의수를 한 해군 출신, 그는 자신의 불구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합을 회피한다. 비행기 전투의 괴로운 기억에 고통당하는 공군 출신.

전쟁의 상처들을 안고 현실에 서서히 적응해 가는 그 영상이 눈물겹다.

전후 미국이라는 사회가 참으로 리얼하게 그려저 있다.

흑백의 잔잔한 톤이 더욱 인상깊었다.

윌리엄 와일러는 거장이고 프레드릭 마치는 명우이다.


등록금. 책값. 애순이에게 빌린 돈...


1966. 4. 4 (월)


내 전공이라는 것. 초조해진다.

1년이 흐르고, 또 시간은 흘러 가는데 건축에 대해서 공부한게 도대체 뭐냐?

오늘도 수업은 빼먹었지?

등록금? 책이 없어서? T자가 없어서? 아무것도 준비없는 건축학도라서?

아니다. 내 향학열,

아니 산다는 욕망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난 죽어두 철판아니라 신문지 하나 얼굴에 깔 위인이 못된다.

그저, 약해 빠진, 눈치보기, 내 언행에 대하여 상대방의 반응만 살피는 쥐새끼.


1966. 4. 9 (토)


연일 마셔대는 술. 술.

연극을 시작하고 나서 갑자기 접촉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

대개 선생님, 형이라고 부르는 대가리 큰 사람들이지만 김동진이라는 친구도 사귀다.

매일 12시 넘어 통금을 이리저리 피하여 겨우 돌아 온다.

예술적인 분위기. 그것이 그저 좋아 매일 술을 마신다.


1966. 4. 11 (월)


연극 연습에 때로 환멸이 엄습한다.

선배라는 작자들의 꾼을 가른 반목.

예술이라는 황홀한 기대감과는 거리가 먼 행태들.

벌써 2주일째 과수업은 한시간도 받지 않았다.

양재서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뜻 밖에도 김상영 소식도 함께 전해 왔다.

보고 싶은 자하문밖 중학 친구들.

편지를 해야지.


"왜 아무 것도 믿지 않으려 하세요?

하타라는 꽃을 보세요.

오늘 안 피었다고 슬퍼할건 없어요.

내일이면 반드시 어디엔가 피어 있을 거에요."


1966. 4. 14 (목)


관능에 몸부림치고 싶을 때면 그 때는 반드시 게으른 때이다.

오늘이 그렇다.

1년전까지만 해도 늘 관능을 생각하였는데.

요즘 그것이 뜸하다고 해서 발전하였다는 것인가?

웃기는군. 피곤하고 시간에 쫓기는 생활이어서 발전하였다는 건.

맞다. 현재에 충실하여 게으르지 않으면 그것이 발전이 아니고 무어겠는가.


촛불을 생각하라.

겉불꽃, 속불꽃, 불꽃심.

불꽃심이 파아랗게 살아있는 것. 이게 곧 생명이다.

속불꽃과 겉불꽃까지 피워 낼수 있는 사람은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걸 다 잃어버리더라도 최후까지 남아 있는 생명력. 불꽃심.

그 불꽃심으로 살자!


1966. 4. 15 (금)


미공보원에서 한성여대 김일구 학장의 "현대 연극론" 강좌 듣는다.

불안,고독,기교,복잡- 현대의 특성.

그루몽,지이드,싸르트르,까뮤.

과거에 절망하고 미래에 불안하고, 사회적 단절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고독하고, 결국 자기만을 의지하여 스스로의 책임 속에서 절망하여.죽음에 이르는.... 신을 버리고.

신은 죽었지만 과학이 호주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런 실존적 사상의 연극을 안하려면 차라리 쇼,음악극을 지향하라...

오리무중의 칵테일식 강의.

곧이어 김수용감독, 남정임이 참석하여 시네클럽의 영화 대담이 이어졌다.

김수용감독의 능란한 말솜씨, 남정임 빨간 옷의 아름다움, 한마디 발언도 못한채 넋이 빠저서 앉아 있는다.


1966. 4. 16 (토)


여학생회관에서의 연습.

여학생 전용 공간에서 여학생들을 모두 몰아내고 연습장으로 쓸수 있다는 것이 성철이형의 능력이다.


바람부는 캠퍼스에 어스름 황혼이 깔리는데 녹색의 잔디들은 엎드려 울고.

하얀 도서관 건물에는 흙먼지가 스친다.

마치 몰락한 페르샤의 화려한 정원 같은 쓸쓸함이 가득한 캠퍼스.

'슬픈 도시엔 일몰이 오고

시계탑 지붕위에 청동 비둘기.

바람이 부는 날은 구구 울었다.'


1966. 4. 17 (일)


일요일, 화창한 날씨다.

거리마다 야외로 몰리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대본들고 학교로 올라가는 신세.

ROTC 한무리의 훈련만이 운동장에 있고 캠퍼스는 고즈넉하게 봄을 맞고 있었다.

이따금 사진 찍는 여학생의 모습도 보인다.

잔디, 꽃이 화사한 색깔을 자랑하고 있는 캠퍼스는 아담한 어느 궁전의 정원같다.

연습은 비교적 즐겁게 진행되었다.

여자들이 있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근수형, 부자집 막둥이, 돈을 잘 쓰고 늘 여자들에 둘러쌓여 있는 형.

매일같이 과자를, 오늘은 찬합에 볶은 밥을 그득히 담아 와서 전원이 배불리 성찬을 먹었다.

여수중 선생님을 줄곧 쫓아 다니는 예쁜 목소리의 성우아가씨. 중년을 넘은 여선생님에게는 과분한 듯 하지만 연습 마칠때까지 조용히 앉아 기다리는 성숙한 여인이다.


1966. 4. 18 (월)


수업은 받지 않고 아침부터 기탁이란 놈을 꼬셔서 학교앞에서 막걸리에 흠뻑 취했다.

무슨 마음으로 이른 아침부터 술을 퍼먹었는지 모르겠다.

술잔에 벚꽃을 띄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들르는 여학생들 다 쫓아 보내고 여학생회관에 쓰러져 잠을 잤다.

좀 춥길래 일어나 보니 벌써 3시.

부산일보사 기자가 사진을 찍고 프로필을 인터뷰 하고 갔다.

연습은 10시까지 이어졌다.


1966. 4. 22 (금)


술. 술. 술.

KBS의 여수중씨, 중앙대의 김동규씨, 김승일씨, 김승우씨, 선배라는 양크형,성철형,종만형,근수형,상훈형, 동진이......

연일 계속되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와 그리고 술.

이곳이 있어야 할 내 영토이다.


1966. 4. 28 (목)


국제극장.

2시20분 막이 올랐다.

침착해 지기 시작하니까 리액션이 자연스럽게 나올수 있었다.

연극이라는 것이 말할수 없이 매력있는 것이었다.

공연 끝났을 때, 커튼 콜후의 허전함은 실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여관 합숙.

선배라는 치들의 치고 받는 싸움.

종만형 최우수연기상.


이후 8개월간 일기없음.


1967. 1. 1. (일)


양숙 만나다.

태양다방에 양숙이와 앉아있는데 기탁이 찾아 와 신년선물이라면서 편지를 준다.

"너와 나는 정답게 앉아 있다. 그러나 너는 다른 사람들과 교활하게 인사를 한다. 너는 왜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이려 하는가? 그들이 너를 숭배하고 있는줄 아느냐. 감상에서깨어나라. 너는 감상적 자세만으로 살고 있는 놈이야. 그런 감상과 허영으로 너는 영원히 아름답게 살아갈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림없다. 감상의 끝은 자살이야." 云云.

요는 요즘 내가 자기도취에 빠져서 그 나르시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 것 같다.

나르시스트.. 나는 나르시스트...

놈은 오해다.

나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나의 이 엉터리 나르시즘이 얼마나 힘든 쇼인지 놈은 모른다.

이 나르시즘의 흉내가 얼마나 교활한 몸부림인지 놈은 모른다.

나는 엉터리야. 나는 늘 외로웁다. 기탁아.


양숙과 걷다가 남포동에서 KBS 백웅씨 만나다.

양숙이는 방송국 소문이 염려스럽다.

처녀 총각 만나 데이트 좀 하는데 씨발놈들.


돈. 돈.

수다방은 아지트.

나르시스트가 되기 위하여 돈이 필요한가.

계획을 세우자.

나르시스트로 살지 않기 위하여.

순교자의 흉내는 중순부터.

일기는 계속 쓰자.

아령은 부산 돌아 오는 날부터.

희곡은 그 구상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자.

술은 기회있을 때마다.

담배는 좀 줄이자.

양숙이와 데이트 계속. 그리고 광숙,영미와도.

전과문제는 2월 안으로 결정짖기로 하고.

편지지, 우표, 봉투는 늘 준비해 두도록.

올해 어머니에게는 좀 더 구차함을선물해 드리자.


1967. 1. 2. (월)


윤상천 선생의 결혼식.

정능시절의 회억.

경동중 시험치기 전날 밤. 공부방 벽의 드러 난 흙벽에는 끝없이 꼬리를 무는 개미의 행렬. 옆에는 윤상천 선생이 잠 들어 있는데. 나는 누운채 그 행렬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지.

결혼식에 가지는 않는다.


이명규형, 양숙과 술 마신다.

나는 명규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재능?

서울 1964년 겨울을 각색한 그의 실력은 대단할 것도 없다.

그 뛰어난 원작을 그정도도 옮기지 못해서야 말이 아닌 것이다.

독설가, 약아 빠져서 아무리 술에 취하여도 눈동자는 반짝이는 서생원 상.

인간성운운하는 그의 열변은 우습다.

그에 비하여 영국의 왕 내게 화형당하는 바비도 이형환형은 얼마나 인간미 넘치는 분위기의 선배인지.


수다방으로 동진, 기탁 찾아오고.

다방족, 놈팽이.. 싫다. 싫다.

난 정말 싫다.


형의 못마땅한 듯 내뱉는 한마디에 의하면 나 때문에 할아버지가 난리가 났다고 하는데,

불안하다.


1967. 1. 3 (화)


안좋은 속이 불쾌하고, 지저분한 머리가 불쾌감을 더욱 가중시키고, 술집에 잡힌 옷문제, 그리고 밖에 저질러 놓은 여러 책임문제가 초조하다.


돈 잘 번다는 원이에게 돈 좀 빌리려 그 집에 갔으나, 원이가 없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있기 때문에 문 앞에서 돌아 왔다.

묘한 감정이다. 있어라, 아니 없어라. 아이 새끼, 그런데 하필 집에 있구나. 돈 얘길 꺼낼까 말까. 자식 하필이면 있을게 뭐람....

없기 때문에 돈을 빌리지 못하였다는 자신에게 행하는 변명거리.

그런데 녀석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변명도 헛것이 되었다.


내일.

내일은 계획을 세우자. 꼼꼼히 구상하자.

목욕을 해야지. 머리를 깎고 내의를 갈아 입고.

정리 정리 정리가 필요하다.

너무 많이 벌려 놨다.

대담하게 지울건 지우고, 버릴건 버리자.

약한 마음을 가져선 안된다.

모질게 강인하게.


1967. 1. 4 (수)


옥랑이 마산집 2층에서 술을 사준다.

이순원.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딱 부러지는 폼을 잡는 여자.

윤옥랑. 이화여대 성악과, 그 목소리보다 얼굴이 더 예쁜 미인.

두 여학생을 앞에 앉혀 놓고 세되를 마시다.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을 많이 하여 심오한척 떠들고 있으나 실은 그 화려하고 세련된 서울의 여자들 앞에서 열등감에 잠겨 있었다.

이런 옥랑이가 동진이 놈 무얼 보고 그토록 좋아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고작 동아대생 신성일 아류따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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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 公開의 辯  (0) 2016.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