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귀향> <서러워라 늙는다는것은> <타망고> <마땅한대책도없이>
<귀향>
-그레이엄 그린 作-
***동우***
2013.06.04 06:23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 1904~1991)’의 ‘귀향’
아래, 이문열은 이 소설의 해설에서 <시간에 따라 변모하는 천진성의 의미>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러나 천진성이 美이고 섹슈얼이 醜인가.
소녀와 요부는 야누스의 두 모습이다.
남성성에 있어서는 순결도 판타지이고 섹슈얼도 역시 판타지이다.
군대시절.
호방한 사수에 이끌려 들어간 술집에서 술집여자로 만난 초등학교(혜화초등학교)적 한반 여자아이. (말을 섞다가 알게 되었는데).
그토록 어리고 이뻤던 여자아이의 현란하게 화장한 얼굴과 거침없이 구사하는 음란한 말짓과 몸짓....
처음에 좀 서글펐을까마는, 좀 시간이 지나자 나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스스럼이 없었다.
<무척 어렸을 때에 나는 마음 속 깊이 서로 모순되는 두 감정을 느꼈었다. 생의 혐오와 생의 황홀. -보들레르->
보들레르여, <모순되는>은 당신의 오류가 아닐까.
혐오와 황홀은 어쩌면 형용모순이 아니라 동어반복.. ㅎ
아래는 이문열의 작품해설 (이 소설 역시 '이문열의 세계명작산책'에서 업어 온 것입니다)
++++
<의미에 간섭하는 시간 혹은 천진성의 의미>
-이문열-
기억은 시간의 파괴력에 저항하는 우리의 유일한 수단처럼 보인다. 어떤 기억들은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이나 가치 때문에 특히 추억이란 이름으로 소중히 갈무리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세월이 많은 것을 변화시키고 사라지게 한 뒤에도 옛 그대로인 그것들을 그리움과 회한으로 되돌아보거나 축복처럼 즐긴다.
하지만 결국은 기억도 시간의 파괴력에서 벗어나는 수단은 못되며 추억은 더욱 그러하다. 시간은 우리의 의식에 작용함으로써 그것이 받아들이는 사물의 의미에도 간섭을 한다. 특히 추억처럼 주관에 많이 좌우되는 기억은 더 많은 간섭을 받는다.
이 작품은 적당히 속인이 된 중년의 주인공이 30년만에 어릴 적 살던 곳을 찾아가서 겪는 이야기로, 전편을 흐르는 감회는 돌아보는 쓸쓸함이다.
그가 떠난 뒤에 흐름 사간은 고향의 많은 것을 사라지게 하고 바꾸어 놓았다. 돌아보는 그의 쓸쓸함 속에는 사라지고 변한 그 모든 것들에게서 느끼는 상실감과 허전함도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파괴되어가고 있는 자신을 확인하는 서글픔이 더 커보인다.
시들어가는 육체에 야망과 이상을 상실한 정신, 성숙이란 말 속에 감추어진 타락, 현명이란 이름으로 단련된 영악 같은 것들이 그에게서 진행되고 파괴의 내용일터이다.
그런데 고행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아이들이 댄스교습을 받는 관행으로 그는 그것에 관한 기억을 따라 자신의 옛 천진성을 추적해본다.
그때 좋아했던 소녀에게 보낸, 아이 적의 순수한 사랑을 표현했다고 믿는 자신의 쪽지를 찾아보는 일이다.
뜻밖에도 그 쪽지에는 조잡한 춘화가 그려져 있었고 당혹한 그는 묘한 배신감마저 느낀다.
하지만 그는 이내 깨닫게 된다. 그 춘화는 틀림없이 천진성으로 그려진 것이며 변한 것은 다만 그 의미뿐이라는 걸. 시간의 파괴력은 사물의 의이에마저 간섭한다는 걸.
원래 이 작품의 제목은 '천진한 아이" 였고 작가도 감상적인 귀향 소설로서 보다는 천진성의 의미를 파고드는 쪽에 작의을 모으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번역과정에서 한 번 제목이 '귀향'으로 바뀐 뒤로 국내에서는 신기하리만치 그 제목으로만 알려지고 귀향소설의 한 전범으로 취급되었다.
나는 한때 이 작품에게 원래의 제목을 찾아주고 '비틀기와 뒤집기'편에 집어 넣을까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검토하면서 나는 꼭 그래야 할 필요성을 찾기 어려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천진성의 문제도 시간의 파괴력이 사물의 의미에 간섭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 작품이 여기 실려 안 될 까닭은 없다. 거기다가 전편을 흐르는 담담하면서도 절실한 감회는 틀림없이 잘된 귀향소설의 한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 그레이엄 그린은 무엇보다도 소설을 '노블'과 '엔터테인먼트'로 나누어 문학적 진지함과 대중적 오락성을 각기 그 특성으로 삼고 자신의 작품에도 엄격히 적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 두 특성의 치명적인 불화 때문에 문학적으로는 일생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죽기 전까지 거의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끝내 '위대한 비수상자'의 대열에 남고 말았다.
그린은 오스포드 대학에서 공부했고 한때는 공산주의에 경도되었으나 곧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상적 이력을 갖고 있다. 작품으로는 장편 '내부의 나' '스템블 특급' '권력과 영광' '사건의 핵심' '정사의 종말' '말없는 미국인' 등 깊이와 무게를 아울러 지닌 대작들과 '밀사'를 비롯해 '공포성'등 대중의 인기를 끈 일련의 스릴러물에 '스물한 개의 단편들'이란 단편집도 남겼다.
자신의 구분과는 달리 그의 작품들은 노블 속에서도 스릴러적인 요소가 있고 엔터테인먼트에도 내면적인 깊이가 있어 어떤 이는 그를 '형이상학적 스릴러 작가'로 규정짓기도 한다. 많은 작품들이 영화화되었는데 우리에게는 '제3의 사나이'가 잘 알려져 있다.
++++
<타망고>
-메리메 作-
***동우***
2013.06.06 05:26
'카르멘'의 작가 메리메(Merimee, Prosper, 1803~1870)의 '타망고'를 포스팅합니다. (그의다른 소설 '마테오 팔코네'는 전에 올린바 있습니다)
번역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문장이나 문맥을 좀 고쳐서 올리려다가 그냥..) 노예무역의 현장이라는 특이한 素材와 절제된 냉정한 문체가 주는 소재의 리얼리즘이 워낙 강렬하여 원작의 느낌에 훼손되는바가 그닥 크지는 않을듯.
역사 속 일정 시공의 '삶의 자리'란 저토록 천연덕스럽고 자연스럽습니다.
백인들의 탐욕과 부도덕성, 그리고 흑인들의 무지와 어리석음.
인간적 윤리의식이나 짐승같은 무지와 잔인함 따위는 흑인이거나 백인이거나 의식에 떠오르지도 않는가 봅니다.
추측건대 '타망고'는 어떤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였지 싶은데, 담담하지만 적나라하게 그 얘기를 들려주는 메리메의 그 객관(客觀)에 나는 감탄합니다.
<서러워라 늙는다는 것은>
-E.아리아스 수아레스 作-
***동우***
2013.06.19 04:35
<늙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결코 불행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늙기 때문이다.>
<로사리오야 말로 황혼에 접어든 나의 인생에 빛을 비쳐주는 사랑의 천사가 아니고 그 무엇인가? 그러나 나는 어쩐지 두려웠다.>
나이 든 내 벗들이여.
우리는 노인이 아니라네.
우리, 늙음을 앓는 것이 아니라 늙음을 겪고 있을 뿐이로세.
카나리아처럼 지저귀며 한떨기 꽃처럼 어여쁜 소년이여 소녀여.
로사리오여, 아도니스여, 그리고 로리타여, 은교여.
너희 푸르고 푸른 아름다움에 이입(移入)하는 우리 감정 다발 역시 푸르고 푸르리니.
다만.
세월의 더께 켜켜한 분별력(分別力)이라는 이름.
그것이 승복(承服)케 하는 '늙었다는'의식, 그것이 쬐끔 서러울 뿐이라네. ㅎ
***eunbee***
2013.06.19 17:01
우리나이
살다가 몇번이나 더 저같은 로사리오를 만날 수 있을까요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사랑스럽게 여겨지는, 사랑하고 싶은, 사랑하는
로사리오를...
인생의 기적이 울리네요.
하얀 손수건을 흔들어줄 그 누군가는
나의 베란다 혹은 그들의 베란다에 서 있을까요.
혹여 로사리오가 못되더라도
마음 열어 따스한 입김 불어주며 삽시다
우린 그런 세월 앞에 서 있지않는가요.
그것이 올바른 분별력일 수도 있다우.
***동우***
2013.06.20 06:33
진짜배기 삶을 살 줄을 아는 은비님.
그처럼 올바른 분별력 갖춘 사람 흔치 않다오. ㅎ
마음은 원이로되 세월따라 발 뒷꿈치처럼 굳어가는 의식의 경직화..
마음 열어 따스한 입김 불어주며 삽시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은비님이여.
나도, 딴에는 아름답게 웃어 봅니다그려ㅎ
***eunbee***
2013.06.21 16:39
땅에 그리도 발을 굳세게, 힘차게 딛고 있으면 굳은살이 새겨져요.ㅎㅎㅎ
파리는 그 굳은 살을 제거해 주는 묘약을 가진 도시랍니다.
우리나이, 그것이 에로스던 아가페던...
말랑거리는 감정이 새살 돋듯 어느새 생겨나 있다우.
아름답지 못한 은비를 아름답다고 립써비스할 줄 아는 동우님도
파리의 감성이 있기에 그리 말하고 그리 웃을 줄 아는 것이 아니옵니까? ㅋㅋㅋ
이 아침의 파리의 내음은 한껏 향기롭습니다.
흠흠대며 쏘거리에 넘쳐흐르는, 쏘 하늘로 번져오르는 이 꽃향기들을 들이킵니다.
앗, 은비엄마가 이방으로 와서 창문을 닫습니다. 옆 침대에 와서 전기담뇨에 불을 지피며 눕습니다. 이애는 온 공기에 섞인 이 꽃내음보다 당장 추운것이 문제인가 봅니다.
그러니 내가 거리의 꽃향기 풍겨내는 가로수 아래로 나갈 수밖에요.
파리는 늘 사랑의 감정이 나풀대게 하는 공기들로 가득차있는 곳이랍니다.
오늘도 그공기를 한껏 마시고, 내 처지려는 정신을 말랑대는 사랑의 감정으로 충전시켜
온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렵니다. ㅎㅎㅎㅎ
<마땅한 대책도 없이>
-아서 모리슨 作-
***동우***
2013.07.04 05:51
처음 접하는 작가 '아서 모리슨 (Arthur Morrison, 1863~1945)의 '마땅한 대책도 없이'
자본과 노동.
한세기도 훨씬 더 前의 영국, 1920년대의 미국, 또는 1970년대의 한국.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도 그렇거니와 저 노동자의 현실에 깃든 한줌 인정이라는 것,
산업화 그때 우리의 노동현장, 이것과 다른 색감으로 내게는 생생하다.
다음은 이문열의 해설입니다.
++++
<분배의 그늘에서도 엇갈리는 삶의 명암>
-이문열-
생산에서의 불평등은 개인의 능력이나 운수의 문제로 치부되어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로 인한 소유의 집중에 관대했다. 하지만 그럴 때도 부정한 수단을 쓴 과다한 생산은 진작부터 비난받고 경계당했다. 거기다가 불평등한 생산으로 집중된 소유는 곧 힘으로 전화돼 분배의 불평 등을 심화시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생산의 불평등 문제는 분배의 불평등 문제로 수합되었다.
분배의 불평등은 일쑤 우리 삶을 밝음과 어둠으로 갈라놓는다. 그로 인한 소유의 집중은 대개 그만큼 다른 동료의 몫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집중된 소유의 초과분이 향상된 생산력과 정확히 일치해서 다른 동료의 몫을 건드리지 않은 경우에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번에는 상대적 빈곤감이 불화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마땅한 대책도 없이'는 바로 그런 분배의 불평등이 연출한 세상의 어두운 측면을 그려보이고 있다.
곧 소유의 집중으로 노동력밖에 가진 게 없게 된 사람들이 파업으로 노동력을 팔 기회조차 잃고 떠돌면서 겪는 일들을 짤막하지만 인상적으로 그린 단편이다.
이런 얘기를 쓸 때 흔히 작가들이 빠지는 유혹은 세상을 눈먼 정의로 재단하는 것이다.
곧 힘없음과 못가짐을 바로 선으로 간주하고 그래서 그 반대편에 있는 힘있고 가진 자들을 악으로 단정하는 게 그렇다.
그리하여 한쪽에는 끝없는 미화를 바치고 다른 한쪽에는 그 악덕의 한없는 과장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유혹에 빠져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선 눈길을 끈다. 작가는 틀림없이 그들 힘없고 못가진 부랑 노동자 집단에 대해 연민을 품고 있기는 하지만 무조건적이지는 않다.
다같이 어두운 삶에 던져져 있어도 거기에는 나름의 분별과선악이 있음을 작가는 날카롭게 꿰뚫어 보고 있다.
뉴먼은 언젠가는 노동운동 현장에서 목소리 높은 선동가로 나타날 것임에 틀림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선량한 동료를 등치고 궤변으로 자신의 게으름을 합리하다 마침내는 도둑질 중에서도 가장 비열하고 파렴치한 도둑질로 정체를 드러낸다.
이에 비해 데이브는 진정한 동료애로 병든 클레이튼을 돌본다.
그도 끝내는 클레이튼을 버리지만 그때도 절규와같은 판서를 남긴다. '제발 부탁입니다만, 이 사나이를 구빈원에 데려다 주십이오.'
인정의 애틋한 묘사도 이런 종류의 작품들이 가지는 상투성에서 벗어나 있다.
조이 클레이튼 부부가 아마도 그들의 마지막 재산인 듯한 3실링을 놓고 벌이는 실랑이는 비록 몇 줄 삽화로 처리되어 있지만 읽는 이를 눈물겹게 한다.
가진 자를 비난하는 백 마디의 격렬한 구호보다 분배의 그늘에서 죄없이 고통받으면서도 따뜻한 사랑과 인정을 잃지 않는 이들의 행태가 집중된 소유의 부당함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일깨워 주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분배의 불평등보다도 그걸 받아들이는 인성의 차이에서 삶의 명암이 엇갈린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은이 아서 모리슨은 영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다.
기자로 활동하던 1880년대 초엽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 1894년 단편집 '초라한 거리의 이야기'를 출간하면서 유명해졌다. 그의 대표작은 1902년 발표된 '벽에 있는 구멍'이며 1894년부터 마틴 헤위트를 주인공으로 해 발표한 일련의 탐정소설들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동양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일본의 화가들'이란 책을 내기도 했으며 말년에는 소설 창작을 그만두고 영국과 유럽 대륙을 돌며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는데 열정을 바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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