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윤흥길]]
<아홉켤레의구두로남은사내> <날개 또는 수갑> <기억 속의 들꽃>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윤흥길 作-
***동우***
2013. 06. 03
대한민국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곳이라는 성남의 분당. (신흥 부르주아의 동네. 내 동생을 비롯하여 여러 친지와 벗들이 살고 있는...)
그러나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본시 성남은 도시철거민을 실어다 짐짝처럼 부려다 놓은, 1970년대 도시빈민의 움막만이 그득한 고장이었다.
그러한 성남이 이제는 '천당 아래 분당'이 되었다.
필경 그 땅은 개발의 열기, 욕망(투자 투기)의 웃음과 부당함의 눈물을 질료(質料)로 하여 자본이 기름진 땅이 되었을 것이다.
윤흥길(1942~ )의 '아흡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
우리의 권선생, 무에 큰 욕심이 있었을까.
고작 소시민을 꿈꾸는 자그마한 사람이다. 나처럼.
그런데 1971년 이른바 광주(성남의 옛이름)대단지 사태때 어떤 계기로 그의 의식은 깨어났다.
그리하여 당대(當代)의 광기 앞에서 맞선 그의 액추어리티는 무참하였다.
'안동 권씨'에다 '대학을 나온 사람'의 자존(自尊)을 아홉켤레 구두로 남기고 그는 사라졌다.
이 소설의 종장은 좀 중동무이한 느낌인지라, 권선생의 그 후 행적을 얘기하자면 이렇다.
윤흥길의 후속작 '직선과 곡선'에서 권선생의 그 후 행적이 나오는데, 음독자살마저 실패하고 결국 권선생은 도시빈민의 현실을 수락하고 열켤레의 구두들을 태워 버린다. 그리하여 어떤 산업체의 노동자로 편입된다.
빈곤의 수락.
묻건대, 빈곤의 수락은 오로지 패배주의자의 항복인가.
그에게 무슨 다른 방도가 있었을손가.
차라리 범죄의 선택이 아니라서 비겁하단말가.
그의 빈곤은 필경 혁명을 음모해야만 하였던가. <누가 말했던가, 빈곤은 혁명이냐 범죄냐 선택의 문제라고.>
개발독재 시절의 압축성장시대.
얼마나 횡행하였던가. 부조리와 부당함, 권력과 금력과 아부력과 배짱력과 사바사바력과 굽신굽신력과..
권선생의 구두코처럼 반짝반짝한 의식은 일단 마비되어 버리는게 편하였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일단 잊어버리는게 좋았을 것이다. 일단은 말이다.
그 시절, 빈곤은 단순히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생계의 문제였으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남없이 가난하였으니까.
궁핍은 본격적인 이념과 자유와 권력과 불평등의 문제로 미처 대두되지 않았으니까. (이 소설과 같은 저항은 곳곳에서 벌어졌지만)
40여년 지난 작금의 상대적 소외감은 아직 권선생의 구두코처럼 반짝이지는 않았으니까.
2013년, 그런데 저를 어찌하랴.
어제도 북한의 꽃제비 영상을 보았다.
내 손주 비니미니 모습이 오버랩되어 가슴 쓰라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무시기 얼어죽을 체제이고 무시기 개뼉다귀같은 이념이란 말가.
백번천번 미제(美帝)아니라 악귀(惡鬼)에게라도 영혼아니라 그 할배라도 팔아야 할게 아닌가.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지배한다' 김일성주의의 교조(敎祖) 마르크스의 말이다.
꽃제비의 사회적 존재, 꽃제비의 의식이 무엇인줄 모른단 말가.
굶주리는 인간의 의식, 그 인간을 모르고 어찌 인간의 경제를 이해할 수 있는가.
유물론이지만 사회주의는 경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체제이다.
사회주의 경제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 모냥이지만 그건 손가락 놀음이고 관념의 놀음이다.
월요일 꼭두 아침부터 소설과는 엉뚱하게 열을 올렸구나. ㅎ
좌우당간.
작금 유무형의 가치에 있어서 극심한 양극화의 나라, 대한민국.
낫살들어 이도저도 직수굿이 순복하지는 말자.
내 구두에도 광을 내자.
***eunbee***
2013.06.10 07:21
참으로 우울할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나게'읽도록 쓰는 재주. 제목부터가 흥미롭더니....
내가 생각없이 술술 재미나는 리듬으로 잘못 읽은것일까요?
“성자와 악인은 종이 한 장 차이랍니다. 악인이 욕망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대신에 성자는 그것을 꿈으로 대신하는 것에 불과하답니다”
성자는 욕망을 꿈으로 대신한다. 이말도 참으로 흥미롭습니다.ㅎㅎ
은비 컴 차지하고 앉아서 이 저녁을 굳세게 자리물림하지 않고 있지요.ㅋㅋ
이제 동우님의 새벽.
맑고 싱그러우시길요.
그리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날개 또는 수갑>
-윤흥길 作-
***동우***
2014.11.13 08:31
옷이 날개라지요?
개별적 자유, 개성의 표상..
그렇다면 제복(유니폼)은 수갑인가요.
집단과 조직과 소속, 개성의 말살, 개별의 왜소화, 피동성...
그런데 혹 유니폼 그 자체가 바로 권력의 표상은 아닐까요?
어꺠에 별이 번쩍이는 군복 뿐 아니라, 1970년대 즈음 개발독재시절.
이리저리 얽히고 설킨 甲질과 그에 대한 乙노릇질들, 난만한 접대문화,
유니폼의 끝발.
한시절, 로고 새겨진 유니폼에 명함 한장이면 남포동 유흥가 첫 외상도 가능하였어요.
유니폼 뿐 아니라 개성의 날개인 '옷'.
그 배후에도 음험한 권력의 조작이 있답니다.
자본권력의 권력운용방식은 말할수 없이 교묘하고 교활합니다.
옷이 날개라구요?
개성을 뽐내면서 개별적 자유를 구가하는 것 같아도 어쩌면 부처님 손아귀.
자본권력은 교묘한 방식으로 트랜드를 창출하기도 하지요.
개성에다 유행이라는 수갑을 채워버립니다.
***동우***
2014.11.14 04:52
소설 속, 제복이라는 것의 상징성에 연연하는 사무직 직원들에게는 다분히 허세가 섞여있습니다.
이를테면 '치열도'의 문제로서.
생산직 잡역부 '권씨'가 들이대는 '팔값'에는 한줌 허세없이 그저 절실하기만 한것인지.
제복에 꼽다시 두손 드는 장상태와 어정쩡하게 순응해 들어가는 민도식.
사표를 던지는 우기환도 저항하는듯 하지만 그 또한 현실도피적입니다.
윤흥길의 이 소설은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旣 포스팅) 연작소설중 하나입니다.
<바야흐로 제복 지향의 빳빳한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나팔 신호>
50 여년전, 개발독재 시절의 저 나팔소리가 작금에도 액추어리티가 있을까요.
2010년대의 세상.
내 귀에는 전혀 다른 나팔소리가 들리는데. ㅎ
<기억 속의 들꽃>
-윤흥길 作-
***동우***
2014.09.14 04:34
윤흥길(尹興吉,1942~)의 '기억 속의 들꽃'
피난길에 폭격으로 부모를 잃고 천지간에 홀로 '되똑하니' 남겨진 소녀.
죽어가면서 아버지는 금가락지 몇개를 남겨 주었나 봅니다.
어린 고아에 대한 한줌 인정은 커녕, 금반지를 노리고 탐욕으로 눈깔들 뒤집힌 어른들의 끔찍한 비정함과 추악한 위선. (숙부라는 사람까지 몇푼 재물이 탐나 조카를 죽이려 하였다니.)
전쟁통의 비정한 현실.
살아내기 위한 어린 계집아이의 생존전략은 너무 안타깝고도 애닯습니다.
동정(同情)을 바라서는 결코 살아낼수 없음을 명선이는 익히 깨닫습니다.
계집아이로서는 불리하지요.
어떻거든 악바리 남자아이로 행세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저 교활한 어른들이 아무리 겁박하고 회유하더라도 생명줄 금가락지들을 수월하게 내어 주었다가는 큰일납니다.
아, 영악해야 삽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습니다.
가슴이 에입니다.
저 어리디 어린 것, 이 악물고 독하게 난리통을 살아내고자 하였던 명선이.
그토록 강인한 생명력에도 불구하고 가냘픈 들꽃으로 강바닥으로 떨어져 죽습니다.
'빨간 고양이'를 패대기쳐 죽여버린 소년은 훗날 후회하지요. (루이제 린저의 소설)
'조그만 고양이가 먹는다 해도 과연 얼마나 먹었을 것인가'하고.
강바닥으로 추락한 '기억 속의 들꽃'
그리고 강물에 떨구어 버린 금가락지 주머니.
소년은 저 두 기억이 어떤 슬픔과 아쉬음으로 오버랩 될런지요.
아, 느끼건대.
통사(通史)라던가 남성사(男性史) 따위 부질없습니다.
전쟁의 비극.
아이들(또는 남성보다는 여성)의 미시사(微示史)를 들여다 보아야 그 속살이 보입니다.
‘반딧불의 무덤’
열네살짜리 오라비 세이타와 네살짜리 누이 세츠코.
애타게 오빠를 부르는 계집아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니짱! 니짱!"
'금지된 장난'
다섯살짜리 계집아이 폴레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미셀! 미셀!"
울음 가득한 계집아이의 목소리.
나르시소 예페츠의 애끓는 기타 선율.
그마저 사치롭습니다.
-독서 리뷰-
<장마>
-윤흥길 作-
***동우***
2014.09.25
윤흥길(尹興吉, 1942~ )의 '장마'
"어머니의 진한 핏빛 울음은 어느덧 두루마기 멍석이 되어 어둠에 잠긴 마당 쪽으로 끝없이 풀려 나가고, 그 위로 꺼끔해졌다 되거세어지는 장맛비가 소리를 지르면서 두텁디두텁게 깔리고 또 깔렸다."
상징적으로 병렬(竝列)된 이미저리, 전쟁이라는 인재(人災)와 천재(天災)일 터인 장마.
'장마'는 시골아이가 자신의 할머니와 외할머니를 통하여 겪는 어느 6.25 이야기입니다.
젊은세대야 "에이, 또 6.25?" 하실런지 모르겠지만 6.25는 언제나 내게(우리 또래로서는) 진부(陳腐)하지 않습니다.
외할머니는 간 밤에 예지몽(豫知夢)을 꾸었습니다.
<"내 말이 틀리능가 봐라. 인제 쪼매만 있으면 모다 알게 될 것이다. 어디 내 말이 맞능가 틀리능가 봐라">
장맛비는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습니다.
외삼촌의 전사통지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
극성스럽게 짖어대는 개짖는 소리와 함께 차츰 가차이 다가오는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기척.
동생의 죽음,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러나 아들을 잃은 외할머니는 독하게 의연합니다.
외할머니의 충혈된 두 눈에 가득 담긴 희열, 자기 예감이 적중된 것을 누구한테나 자랑하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역연한 기색.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의기양양해하고 있는 그 표정...
자신의 예지몽이 들어맞음 만을 희열하고자 하는, 자식 잃은 어머니의 통렬하게 아픈 저 심리의 패러독스....
<"나사 뭐 암시랑토 않다. 진작서부텀 이럴 종 알고 있었응게 나사 뭐 암시랑토 않다.">
윤흥길의 중편소설 '장마'
여섯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동우***
2014.09.26.
외할머니와 할머니의 전쟁.
두 어머니 한(恨)의 전쟁.
6.25.
이념 한톨 담겨있지 않은.
사돈끼리의 저 경우는 그래도 양반이다.
형은 의용군으로 동생은 국방군으로.
서로 총질하여 어느 산하에서 죽어간 두 아들.
어머니 심장 켜켜이 쌓인 한.
6.25..
월북한 아버지.
남녘에 남겨진 아들은 외친다.
'때려잡자 빨갱이'
서슬 퍼런 구호.
그 또한 6.25..
***동우***
2014.09.27.
불과 30여년전까지만 하여도 이 땅의 연좌제는 삼엄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고모님은 우리 삼남매에게 자주 말씀하셨지요.
어떤 식으로든지 '아버지'로 부터 연락같은게 있거들랑 반드시 고모한테 가장 먼저 알려야 한다고. (당시 고모부께서는 상당한 고위직.)
그러나 아버지의 자취 바람결에도 내게 들린적 없었습니다.
이날 이때꺼정.
불고지죄(不告知罪)라는게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친족에 한해서는 예외규정이 있는 모양이던데, 미쳐 돌아가는 전쟁통에 그런것 아랑곳일까.
부모 형제 자식들 끌어다 주리를 틀었습니다.
그리하여 핏줄들에게 윤리적 죄의식을 뿌리깊게 심어주었어요.
아이의 자의식에 또아리 틀고 들어앉은 저 죄책감.
차라리 동만이는 원했을겁니다.
아버지가 '마테오 팔콘느' (시계 하나에 신의를 저버린 어린 아들을 처단하는 코르시카의 아버지-旣 포스팅-)였으면 하고.
***동우***
2014.09.29.
외삼촌의 전사통지.
외할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는 참척(慘慽)의 고통.
그 방어기제, 애통한 모성이 도망가 숨는 곳은 어디일까.
딱 들어맞는 예지몽(豫知夢)이 짐짓 대견한, 신비한 샤먼의 영역이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필경 다시는 만나보지 못할 빨치산 아들.
그 아들의 귀환이 '아무날 아무시'라는 눈먼 점쟁이의 점괘(占卦).
이 또한 샤먼은 완벽한 신앙으로 치환되어 할머니의 절망적 감정을 도피케 한다.
아들을 위한 옷을 짓고 음식을 하고 문간에는 불밝힌 장명등을 내다 건다.
삼촌이 찾아왔었음을 고해 바쳤던 아이의 죄책감.
삼촌이 돌아온다는 그 '아무 날 아무 시'가 견딜 수 없이 두렵다.
삼촌은 오는가.
사위가 적막한 한밤중.
성근 빗소리 사이로 무슨 소리가 들린다.
먼 바다에서 울리는 뱃고동 같은 소리가.
아, 뉜가 오고 있다.
어떤 신비한 곳.
아득히 먼 곳으로 부터 오고 있는 어떤... 구원의 소리...
샤먼의 기척.
***동우***
2014.09.30.
삼촌과 외삼촌.
좌우로 갈라 그들을 죽음으로 끌고 간것은 사상이란 놈일런지 모르겠지만, 할머니와 외할머니 두 사람에게 이념따위 무슨 아랑곳일까.
각자의 아들로 인한 빨갛고 퍼런 것들은 생경하기 짝이 없는 색채들이다.
그 이질감의 대립이란 애시당초 할머니들의 것이 아니었다.
아들들의 죽음.
그것은 가혹한 운명이 가슴에다 실어준, 절절한 포한(抱恨)일 뿐이다.
사상이다 이념이다 하는 것들은 한나절 쏟아지는 빗줄기 같은 것들이다.
끈적끈적 불쾌하고 무덥고 지루한 장마철의.
그러나 아들을 잃은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한(恨), 그것은 연연(連延)하게 연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한은 두 할머니의 의식 깊숙한 곳에 토속적 정서의 동질성으로 자리잡고 있다.
할머니와 외할머니는 구렁이의 출현이 삼촌의 현신(現身)임을 대번에 알아보지 않는가.
어쩌면 '샤먼'은 이 땅 모성에 뿌리박힌 집단무의식인지도 모른다.
모성은 사랑일 것이다.
사랑은 결국 수렴한다. 그리고 화해하고 용서한다.
느끼건대, 양극으로 좌악 갈린 작금의 세태는 화해와 용서를 모른다.
각기 제 멋에 겨운채, 장마철 빗줄기에 한 때 생각을 적실 뿐이다.
나라고 다르랴.
화해와 용서, 인색하기 짝이 없어 스스로 답답하고나.
내 한(恨)의 영토에, 구렁이는 현신하지 않아... ㅎ
<"고맙네, 이 사람! 집안 일은 죄다 성님한티 맡기고 자네 혼잣 몸띵이나 지발 성혀서 먼 걸음 펜안히 가소. 뒷일은 아모 염려 말고 그저 펜안히 가소. 증말 고맙네, 이 사람아.">
구렁이를 달래서 떠나보내는 외할머니의 주술.
샤먼.
큰 무당 황해도 만신, 미꼬 이해경님이 생각난다.
무당이란 한(恨)과의 화해를 이루어주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그녀에게서 들어 알았다.
그녀의 소망이 한맺힌 이들을 위무하는 커다란 센터(넉두리의 집)을 마련하는 것이었는데, 얼마전에 화천에다 큰 역사를 이루어 '희방신당'을 완공하고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가보지 못하였는데, 마음으로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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