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에 갔던 금부도사가 서림인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서림이가 봉산군
수를 잡으러 갔다가 하마터면 봉산군수에게 되잡힐뻔하고 청석골로 돌아와서 여
러 두령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봉산가서 한 일을 자초지종 다 이야기하고 끝으
로 꺽정이를 보고 “제가 금부도사 노릇은 의수하게 했지만 박응천이가 워낙 참
새굴레 씌우게 약아서 속지를 않으니 할 수 있습니까?”자기의 실수 없는 것을
발명하여 말하니 꺽정이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무엇이 잘못된 줄루 생각하
십니까?”“군수가 나오거나 장채들이 나오거나 양단간 끝장을 보구 올 것을 지
레 도망한 것이 잘못된 것 같소.”“장채들이 나온 뒤에야 무슨 수루 도망합니
까. 끝장을 보려구 있었으면 저는 지금 봉산 옥중에서 죽을 곡경을 치르게 되었
을 겝니다.”꺽정이는 더 말을 아니하는데,이봉학이가 꺽정이의 뒤를 받아서 “
대장 형님 말씀과 같이 지레 도망한 것이 자겁해 한 것 같소. 서종사는 발각이
나서 도망했다구 하지만 뒤쪽으루 도망해서 발각이 났는지 누가 아우?”하고 말
하여 서림이가 무안 본 사람같이 얼굴을 붉히며 “나중에 알아보시면 알 일이지
만 박응천이가 금부도사를 가짜루 간파하구 체포하러 든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
인 줄 압니다.”하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이봉학이는 서림이의 단언을 믿지 아니
하는 듯 “글쎄.”하고 고개를 한편으로 기울였다. 곽오주가 입짓 콧짓 다하며
“서종사 하마트면 봉산 귀신 될 뻔했소.”말로 비웃을 뿐 아니라 말없는 다른
두령들도 눈으로 비웃는 것 같았다. “전교가 내렸다면 원이 동헌에 있다가두
곤두박질해서 나올 것인데 절에서 들어와서 바루 객사루 오지 않구 동헌에 가서
안연히 앉아서 도사의 성을 알아들이는 것이 도사를 의심하구 전교를 의심하는
증거가 아닙니까. 원이 관가루 들어간 줄 알구는 곧 일어서구 싶은 것을 그래두
혹시를 몰라서 관가의 동정을 알아본즉 관문 밖에 장교,사령,군노 들이 자꾸 모
여들더라니 이것이 체포하려는 거조지 무업니까. 지레 뺑소니치지 않았으면 꼭
박응천이 손에 걸렸습니다.”
서림이가 열이 나서 발명하는 말을 꺽정이는 웃으며 듣고 “지나간 일은 잘됐
는 못됐든 덮어두구 박응천이를 달리 처치할 도리나 생각해 보우.”하고 말하였
다. “박응천이 같은 약은 위인을 달리 욕보이기는 좀처럼 어려우니까 그저 군
수나 떼어먹구 마는 수밖에 없습니다.”“군수를 떼어먹기는 그리 쉽소?”“서
울 가서 한온이 시켜 주선하면 쉽사리 될 수 있을 겝니다.”“한온이가 이조판
서나 된 줄 아우? 제가 무슨 수루 군수를 떼구 달구 하겠소.”“윤원형에게나
지금 시색 좋은 이량에게 다리를 놓구 말 한마디만 들여보내면 봉산군수는 곧
떨어집니다.”“무슨 말을 들여보낸단 말이오?”“청석골패 대장 아무개가 조관
행세하구 봉산읍에 들어간 것을 군수가 몰라서 잡지 못했다구 말을 들여보내면
박응천이의 뒷줄이 여간 좀 든든하더래두 떨어질 줄 압니다.”꺽정이는 빙그레
웃었다. “제가 서울을 한번 더 갔다올까요?” “천왕동이를 보내선 안될까”
“황두령이 간들 까닭이 있습니까? 한온이더러 그렇게 주선하라구 부탁만 하면
될 일인걸요.” 꺽정이가 황천왕동이에게 “너 내일 잠깐 서울을 갔다오너라.”
하고 말을 일렀다.
황천왕동이가 서울 가서 서림이 말대로 한온이에게 부탁할 때 한온이 말이 이
량의 심복인 이령에게 말을 들여보낼 만한 좋은 계제가 있다고 하더니, 불과 십
여 일 후에 봉산군수 박응천은 체차하고 그 대에 윤지숙을 임명한다는 정사가
기별지에 나게 되었다. 윤지숙은 이때 당항호반 중 쟁쟁한 사람이라 적당을 잡
으라고 특별히 택임한 것이었다.
청석골 적당이 송도서 백주에 살인한 뒤 조정에서는 토포사를 내보내서 적당
을 토멸시키자는 공론도 있었고, 토포사를 내보내면 민폐만 더 되니 고만두고
개성유수와 황해도관찰사를 각별 신칙하여 적당을 체포시키자는 공론도 있었다.
어느 날 영중추부사 윤원형과 대사간 이량이 편전에 입시하였을 때, 위에서
적당 토멸할 방법을 하문한즉 원형은 토포사 내보내기를 주장하고 량은 토포사
그만두기를 주장하여 각기 주장을 세우려고 말을 다투는데, 위에서 사가로 치면
외숙인 윤원형은 꺼리고 중전의 외숙인 이량은 특별 총애하는 중이라 량의 주장
을 옳다고 말씀하여 원형이 무료하고 있다가 함문밖으로 물러나와서 “적당이
나라를 떠가면 내 나라를 떠가나?” 혼잣말일망정 무엄한 말을 입밖에 내기까지
하였다. 권신들이 서로 틀개를 놓은 중에 조정 공론이 이것저것 다 무력하여져
서 하등 조처가 없이 달포를 지내왔다.
적당이 조관으로 가장하고 봉산군수를 노락한 일이 위에까지 입문된 때, 위에
서 삼공과 영부사에게 적당이 횡행하는 것을 가만두고 보는 것은 국가의 수치니
빨리 조치할 방법을 상의하라고 하교를 내리시어 삼공과 영부사가 정부에 회좌
하였다. 상좌에 영의정 상신이 앉고 그 다음에 좌의정 이준경이 앉고 그 다음
우의정 심통원이 앉고 영중추부사 윤원형은 말좌에 앉았다. 세력 좋은 윤원형이
정부 좌차에 말좌하게 된 것은 이야말로 팔자 소관이니 유명짜한 장님 호계관이
윤원형의 사주를 보고 영의정이 되면 불길하다고 말하여 윤원형은 영의정을 고
사하고 영중추를 자원하였었다. 상좌의 영의정이 무거운 입을 열어서 “영부사
대감 말씀하시지요?” 말하고 우의정과 함께 말좌를 바라보니 “소생에게는 묻
지 마시구 어서 말씀하십시오.” 하고 윤원형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무엄한 말
을 입밖에 내던 배짱이 아직도 남아서 도리머리를 친 것이었다. 그제는 영의정
이 말하라는 눈치로 좌의정을 돌아보니 좌의정은 눈을 아래로 깔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우상 대감 먼저 말씀하시오.” “소생의 생각에는 개성유수와 황해관
찰이 각각 정병을 조발하여 가지고 비밀히 기일을 정해서 출기불의로 적굴을 음
습하여 일거에 적당을 섬멸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인제 대감 말씀 좀 들읍
시다.” 영의정이 다시 좌의정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재촉하였다. “지금 우상 말
씀이 좋습니다. 그런데 개성과 황해도에서 출병할때 평안.강원 양도에서 지경을
지켜서 도적의 도타할 길을 막으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영의정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뒤 “영부사 대감, 지금 두 분 대감의 말씀이 어떻습니까?” 윤원
형의 의향을 물었다. 윤원형은 좌우의정의 의론을 귀담아 듣지 않고 사인방에서
나오는 풍류 소리와 기생 노래를 듣고 있다가 영의정 묻는 말에 무턱대고 “좋
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소생이 탑전에 들어가서 개성유수와 황해,
평안,강원삼도 관찰에게 각각 밀유를 내리시도록 아뢰고 나오리다.”
영의정만 승지,사관들과 함께 합문 안에 들어갔다가 얼마 뒤에 다시 정부로
물러나와서 좌우의정과 영부사를 보고 “위에서 윤종하십시다.” 하고 말하였다.
말좌의 영부사가 먼저 일어나가고 삼공들도 좌차대로 차차 일어나서 정부의 회
좌가 끝이 났다.
송두유수와 황해감사가 상감의 밀유를 받고 군병을 조발한다는 소식이 득달같
이 청석골로 들어왔다. 꺽정이가 여러 두령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각처에서 들
어온 소식을 이야기하는데, 출모발려를 맡아놓고 하다시피 하는 서림이가 “우
리는 차차 형편을 봐가며 자리를 옮기더래두 주체궂은 안식구들만은 먼저 이천
광복산으로 보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말하니 다른 두령은 말한
것도 없고 서림이의 말이라면 으레 뒤받는 곽오주까지 희한하게 찬동하였다.
꺽정이가 서림이의 말을 좇아서 안식구들을 이천 광복산
으로 보내는데 두령 중의 이봉학이,황천왕동이 두 사람을 같이 보내고, 또 양주
갖춘 두목과 졸개 수십 명을 따라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두목과 졸개들은 각각
저의 식구를 데리고 뿔뿔리 떠나게 하고 두령들의 안식구는 혹 말도 태우고 혹
소도 태우기로 하였는데, 탈것 외에 양식바리,세간바리도 적지 아니하여 마소가
있는 것으로 부족되어서 근처 아는 사람의 것을 얻어들이기도 하고 또 난데 들에
매인 것을 끌어오기도 하였다. 이봉학이와 황천왕동이외의 다른 두령들도
여러 차례에 전줄러서 떠나는 내행을 배행들 하느라고 잠시는 청석골을 비다시
피 하였다.
청석골 꺽정이패가 강원도로 달아났단 소문이 있어 송도 포도군관들이 듣고
각처로 알아본즉, 말 탄 소 탄 여편네들과 빈몸 아이업은 사내들이 우봉길 토산
길로 십여 일 동안 매일같이 나간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 포도군관들이 이 사
연을 유수께 아뢰니 유는 큰 시름을 놓은 것같이 여기서 곧 황해감사와 약회하
고 만나 상의한 후에 청석골 적당이 강원도 땅으로 도망하였다고 각각 장계하고
군병 조발하던 일을 다같이 중지하였다. 청석골에 있는 꺽정이 이하 여러 두령
들은 이것을 알고 감류의 처사가 맹랑한 것을 웃었다. 서림이가 꺽정이에게 말
하기를 아직 얼마 동안은 여기 있는 표적을 내지 않는 것이 좋으니 이 근방에서
는 행인의 보따리 하나라도 강탈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자고 하여 꺽정이가 그 말
을 좇아서 부하를 단속한 까닭에 송도 부하와 강음경내에 일시 적환이 없어졌다.
각 집안 식구들이 죄다 없고 보니 청석골 안이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어린애
를 기하는 곽오주가 좋아하고 홀아비로 지내는 김산이가 심상할 뿐이지 그외의
다른 두령들은 모두 불편도 하고 허우룩도 하였다. 그나마 일이 많은 때 같으면
일에나 골몰들 할 것인데 하루 한 번씩 탑고개 큰길에 나가서 순을 돌던 것까지
페지하고 가만히 산속에들 들어앉았는 중이라 밤낮으로 술판만 벌이어서 독술이
번쩍번쩍 들어났다. 꺽정이가 심심한 것을 견디다못하여 청석골 일을 늙은 오가
와 서림에게 쓸어맡기고 단신으로 서울을 올라왔다. 겉으로는 남소문 안 한첨지
의 문병을 볼일로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서울 살림하는 여편네들을 와서 볼 생
각이 긴하였던 것이다. 꺽정이가 서울 오던 날 바로 남소문 안으로 들어와서 한
온이에게서 저녁을 먹고 남성밑골 박씨에게 가서 자고, 이튿날 아침 후에 동소
문 안 원씨와 김씨를 보러 왔다. 원씨집과 김씨집은 서로 격장이나 김씨집이 가
는 길의 첫머리라 꺽정이가 김씨집으로 먼저 들어가려고 집 앞에 와서 보니
문이 닫아 걸려서 “문 열어라!” 하고 문짝을 흔들었다. “누구요?” 김씨의 목
소리가 나서 “나야.” 꺽정이가 대답하니 김씨가 쫓아와서 문을 열어주며 “아
니구 이게 웬일이세요? 오신단 선성도 없이.” 하고 싱글싱글 좋아하였다. “내
가 어제 선성 놓구 다니는 사람인가, 그런데 아무두 없어 혼자 있으니 웬일이
야?” “빨래 보냈세요.” 김씨가 마루에 돗자리를 내다 깔고 “웃옷을 아주 벗
고 앉으시지요.” 꺽정이가 벗어주는 의관을 받아서 방안에 갖다놓고 꺽정이 옆
에 와서 앉았다. “서울을 언제 오셨세요?” “어제 저녁때.” “남소문 안에서
주무셨나요?” 꺽정이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었다. “어제 오시는 길로 기별
이나 좀 해주시지요. 그랬으면 집안이나 깨끗하게 치워놨지요.” “이만해두 깨
끗해서 좋은데 무얼 그래?” “깨끗한 게 무어에요. 앞뒤 마당 쓰레질도 내가
하니 오죽해요?” “애꾸눈이는 가만히 놀리구 밥만 쳐먹이나?” “대체 어디
가 그 따위 천하 망한 놈을 골라서 비부쟁이로 들여주셨세요?” “왜 그래?”
“왜 그래가 무어에요? 내가 그 동안 그놈 때문에 속을 얼마나 썩였는지 아세
요?” 김씨가 말소리가 새되어졌다. “비부쟁이 잘못 들였다구 날 보면 시비하
려구 벼르구 있었군.” “시비도 할 만하거든요.” “그까짓 시비는 나중에 가리
구 우리 그 동안 서루 그린 정회나 이야기하자구.” 꺽정이가 김씨의 얼굴을 들
여다보며 웃으니 김씨도 혼연하게 마주 웃었다. 꺽정이가 한나절 김씨와 같이
있다가 밤에 다시 오마고 말하고 의관을 차리고 원씨의 집으로 왔다. 오래간만
에 원씨가 만든 맛깔진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원씨와 둘이 방에 앉아서 이야기
를 할때, 동자치가 열어놓은 방문 앞에 와서 원씨를 들여다보며 “아씨, 심미실
이가 선다님 오신 줄을 알구 보이러 왔다는데 어떡해요?” 하고 물었다. 꺽정이
는 심미실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서 “누가 왔어?”하고 채쳐 물은즉 원씨가
웃으면서 “담 너머집 하인이 보이러 왔나 봐요.” 하고 말하였다. “담 너머집
하인이라니?” “노가 말씀이오.” “그놈이 왔으면 그대루 들어올 게지 무슨
연통이람?” “노가가 사람이 하두 흉몰스럽다기에 내가 집안에 들이지 말라고
일러두었세요.” 꺽정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런데 심미실이란 무어야? 노밤
이가 변성명을 했나?” “집의 할멈의 자살궂게 그런 성명 같은 별명을 지어놨
세요.” “심미실이란 성명에 무슨 뜻이 있나?” 원씨가 마루에 앉았는 할멈쟁
이를 내다보며 “할멈, 심미실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시네.” 별명 지은 사람더러
그 뜻을 말하라고 하니 “아씨가 잘 아시면서 왜 할멈을 끌어내시어, 할멈은 정
신이 사나워서 잊었습니다.” 할멈쟁이가 딴청을 썼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꺽정 8권 (18) (0) | 2023.07.12 |
---|---|
임꺽정 8권 (17) (0) | 2023.07.11 |
임꺽정 8권 (15) (0) | 2023.07.09 |
임꺽정 8권 (14) (0) | 2023.07.08 |
임꺽정 8권 (13) (0) | 2023.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