꺽정이는 백정의 자식으로 아이 적부터 창피를 보고 설움을 받은 것이 뼈에 맺
힌 까닭에 천참만륙할 도둑놈이란 말은 오히려 웃고 들을 수는 있어도, 백정놈
의 자식이란 말은 듣기만 하면 언제든지 온몸의 피가 일시에 끓어올랐었다. 꺽
정이가 소홍이의 수상히 여길것도 생각지 못하고 눈을 딱 부릅뜨고 입을 꽉다물
고 씨근씨근 가쁜 숨을 쉬다가 한참 만에 후유 하고 숨을 길게 내쉬며 눈을 지
그시 감았다. ‘윤지숙이란 놈을 그대로 가만둘 수 없다. 어떻게 할까. 그놈의
집을 알아가지고 찾아가서 주먹으로 때려죽일까, 도임하러 가는것을 청석골로
잡아다가 난장질로 쳐죽일까.’ “선다님!” 소홍이가 부르는 소리에 꺽정이가
눈을 떠서 소홍이를 물끄러미 보았다. “신기가 좋지 않으세요?” “술 생각이
나니 술 좀 받아오라게.” “안주가 없지 술은 있세요.” “미리 받아다 놨나?
그럼 가져오라게.” 소홍이가 조석 해주는 여편네를 불러서 술상을 차려 들이라
고 일렀다. 안주도 미리 다 장만해 둔 것이라 얼마 아니 있다가 술상이 들어왔
다. 소홍이가 술을 잔에 치려고 하는데 꺽정이가 홀짝홀짝 먹기 갑갑하다고 큰
양푼이에 가뜩 부어 달라고 하여 양푼을 들고 들이켰다. “안주나 좀 집으시고
쉬엄쉬엄 잡수세요.” 꺽정이가 바닥이 드러난 양푼을 놓고 마른 안주 한두 쪽
을 입에 넣으며 “술 또 있나? 있거든 마저 주게.” 술을 토새하여 잠시 동안에
두 양푼 술을 먹고 바로 술상을 물리었다. “술도 맛없이 잡수시오.” “홧술은
취하는 것이 맛이야.” “참말 왜 화가 나셨어요? 내가 무슨 말씀을 잘못했어
요?”“아닌게아니라 자네 하는 말이 비위에 거슬렸어.” “일개 천기로 양반님
네를 헐뜯어 말하는 것이 괘씸해서 화가 나셨나요?” 꺽정이가 대답이 없었다.
소홍이는 빼또라져서 말을 않고 꺽정이는 속이 있어서 말을 아니하여 한동한 두
사람은 서로 소 닭 보듯 하였다. 마루에 있던 여편네가 뜰아랫방으로 내려간 뒤
꺽정이가 소홍이 앞으로 바짝 가까이 다가앉으면서 “소홍이?” 정중하게 먼저
이름을 불러놓고 그 다음에 “자네 임꺽정이가 누군지 아나?” 건성으로 물어보
고 끝으로 “여기 있으니 다시한번 보게.” 나직이 말하고 자기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소홍이는 너무 놀라워서 도리어 놀라운지 만지 한 모양이었다. 마음이 섬뜩하
고 실쭉하든지 슬며시 꺽정이 옆에서 따로 떨어져 나 앉았다.
2
“나는 함흥 고리백정의 손자구 양주 쇠백정의 아들일세. 사십평생에 멸시두
많이 받구 천대두 많이 받았네. 만일 나를 불학무식하다구 멸시한다든지 상인해
물한다구 천대한다면 글공부 안한 것이 내 잘못이구 악한 일 한것이 내 잘못이
니까 이왕 받은 것보다 십 배, 백 배 더 받더래두 누굴 한가하겠나. 그 대신 내
잘못만 고리면 멸시 천대를 안 받게 되겠지만 백정의 자식이라구 멸시 천대하는
건 죽어 모르기 전 안 받을 수 없을 것인데, 이것이 자식 점지하는 삼신할머니
의 잘못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문 하적하는 세상 사람의 잘못이니까 내가 삼신
할머니를 탓하구 세상 사람을 미워할밖에. 세상 사람이 임금이 다 나보다 잘났
다면 나를 멸시천대하더래두 당연한 일루 여기구 받겠네. 그렇지만 내가 사십
평생에 임금으루 쳐다보이는 사람은 몇을 못 봤네. 내 속을 털어놓구 말하면 세
상 사람이 모두 내 눈에 깔보이는데 깔보이는 사람들에게 멸시 천대를 받으니
어찌 분하지 않겠나. 내가 도둑눔이 되구 싶어 된 것은 아니지만, 도둑눔 된 것
을 조금두 뉘우치지 않네. 세상 사람에게 만분의 일이라두 분풀이를 할 수 있구
또 세상 사람이 범접 못할 내 새상이 따루 있네. 도둑눔이라니 말이지만 첨말
도둑눔들은 나라에서 녹을 먹여 기르네. 사모 쓴 도둑눔이 시굴 가면 골골이 다
있구 서울 오면 조정에 득실득실 많이 있네. 윤원형이니 이량이니 모두 흉학한
날도둑눔이지 무언가. 모두 같은 까까중이까지 사모 쓴 도둑눔 틈에 끼어서 착
실히 안몫을 보니 장관이지. 이런 말을 다 하자면 한아 없으니까 그만두겠네. 자
네가 지금 내 본색을 안 바에는 인제 고만 자네하구 작별인데, 이 세상에서 다
시 안날는지 모르는 마지막 작별에 말없이 일어서기가 섭섭애서 내 속에 있는
말을 대강 하네. 그러구 내 종적을 자네가 헌사할 리는 만무하지만 혹시 한두
사람에게라두 말한 것이 드러나면 오입쟁이 임선달 대신 도둑눔 괴수 임꺽정이
가 자네를 보러올는지 모르니 그리 알구 조심하게.”
꺽정이가 말을 점잖게 하느라고 한참씩 생각해 가며 띄엄띄엄 말하여 거의 평
생 처음으로 조리 있게 긴말을 다한 뒤 슬며시 일어나서 의관을 다시 차리었다.
“나는 가네.”
꺽정이가 소홍이를 굽어보며 말할 때 이때까지 그린 듯 앉아 있던 소홍이가 별
안간 꺽정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왜 붙드나, 할 말이 있나?” “녜.” “무
슨 말인가?” “나하구 같이 가세요.” “어디를 같이 가?” “어디든지 선다님
가시는 데 나도 가겠세요.” “내 사정이 자네하구 같이 갈 수 없는걸.” “그럼
나를 죽이고 가세요.” “무슨 까닭에 죽이라구 지다위하나?” “선다님이 죽인
다면 나는 웃고 주겠세요.” “내가 사람 죽이기에 이골이 났어두 웃구 죽는 사
람은 못 죽이겠네.” “나를 버리고는 못 가실 테니 나는 몰라요.” “자네가 나
를 따라가면 막이 도둑눔의 첩노릇을 하게 될 테니 자네 전정을 망치지 않겠나.”
꺽정이가 안참 우두머니 서 있다가 펄썩 소홍이 앞에 주저앉아서 두 손을 잡고
얼굴을 들여다보며 “자네 정을 내가 저버리지 않음세.” 하고 말하였다.
이날 밤에 꺽정이가 소홍이 집에서 자는데 두 사람이 다같이 정에 겨워서 잠이
오지 아니하여 건밤을 새웠다. 이튿날 식전 일어나기 전 베개 위에서 꺽정이가
소홍이더러 “나는 오늘 시굴 가겠네.” 하고 말하니 소홍이가 대번에 “나는
어떻게 하구요?” 하고 물었다. “어수선한 일을 다소간 정돈해 놓구 자네를 데
려감세.” “이야기할 게 많으니 며칠 더 기시다 가셔요.” “급한 볼일이 있어.
” “무슨 볼일이에요?” “그건 묻지 말게. 자, 고만 일어나세.”
꺽정이가 소흥이 집에서 자리조반 먹고 바로 남소문 안으로 와서 한온이보고
윤지숙이에게 분풀이할 것을 대강 이야기하고 박씨, 원씨, 김씨 세 집으로 돌아
다니며 급한 일이 생겨서 시골을 간다고 말하고 서울서 떠나서 길에서 하룻밤
자고 그 이튿날 청석골로 돌아왔다.
꺽정이가 도회청에서 두령, 두목, 졸개 들의 문안을 차례로 다받고 난 뒤 늙은
오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괴상히 여겨서 옆교의에 앉은 서림이를 돌아보며
“오두령은 어디 병이 났소?” 하고 물으니 “오두령 부인이 병환이 나서 대단
하시다구 광복서 기별이 와서 오두령이 허생원을 데리구 가셨습니다. 가신 지
벌써 삼사 일 됐습니다.”
서림이가 대답하였다. “무슨 병이랍디까?” “저녁밥 자신 것이 눌려서 병이
났다니까 아마 관격이겠지요.” “그럼 대단친 않은 게지.” “글쎄, 모르겠습니
다.” “조용히 의논 좀 할 일이 있으니 사랑으루들 갑시다.”
꺽정이가 도회청에서 자기 사랑으로 올라오는데, 신불출이, 관능통이 두 시위
는 좌우에서 부축하고 서림이, 배돌석이, 곽오주, 길막봉이, 김산이 다섯 두령은
뒤를 따랐다.
꺽정이가 신임 봉산군수 윤지숙이 괘씸한 것을 여러 두령에게 말하고 도임 행
차 습격할 계책을 서림이보고 의논하였다. 서림이의 말이 목하 청석골서 큰일을
내는 것이 재미 적은 것은 고사하고 봉산 구관 박응천이 청속골 길을 피함인지
해주 가서 인궤를 감사에게 바치고 연안, 배천길로 서울을 올라갔단 말이 있으
므로, 신관도 십의 팔구 먼저 해주 가서 감사에게 연명하고 해주서 봉산으루 가
기가 쉬운즉 일하기는 좀 불편하나 고양, 파주, 장단 등지에 가서 목을 지키는
것이 실수 없으리라고 하여 꺽정이가 그 말을 옳게 듣고 고양 혜음령에 가서 정
상갑이, 최판돌이 패를 데리고 목을 지키기로 작정하고 혜음령에 갈 사람을 정하
려고 하는데, 여러 두령이 너도 나도 다 가겠다고 자원하였다.
“내가 지정할 걸 왜들 떠드니냐? 가만히 있거라.” 꺽정이가 여러 두령을 꾸
짖고 “돌석이 막봉이 산이 세 사람은 나하구 같이 혜음령에 가구 오주는 서종
사와 같이 여기 남아 있거라.” 하고 말을 일렀다.
곽오주는 입만 실쭉할 뿐이지 아무 말도 않고 서림이는 고개를 비틀고 있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곽오주에게 성화를 받고 남아 있기가 싫든지 “임진 대적하러
가는 것이 아닌 바엔 대장께서 친히 가실 것이 없지 않습니까? 제가 한번 몸을
받아가지고 가면 어떠하오리까?”
꺽정이의 의향을 품하여 보았다. “그래두 좋겠지만 내가 가야 분풀이를 톡톡
히 하지.” “작죄한 놈을 치죄할 때 손수 매질한다구 화풀이가 더 됩니까?”
“서종사가 봉산군수하구 내리 척을 짓구 싶소? 아무리나 내 대신 가보우.”
서림이에게 꺽정이의 허락이 떨어지자, 곽오주가 혼잣말로 “대장 형님이 서
종사 말을 저렇게 잘 듣다간 언제든지 큰코 다칠 때 있을걸.” 하고 중얼거려서
“무어야?” 하고 꺽정이가 소리를 질렀다.
봉산군수 도임 행차를 습격할 자리와 습격하러 갈 사람이 다 작정된 뒤에 서
림이가 졸개를 내보내서 탑고개 동민에게 봉산 신연 하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거
든 즉시 와서 고하라고 기별하였더니, 어제 벌써 지나갔다고 회보가 들어와서
서림이는 배돌석이, 길막봉이, 김산이 세 두령과 같이 불불이 떠날 준비를 차리
었다.
꺽정이가 신불출이와 곽능통이도 같이 가라고 허락하여 네 두령 두시위 여섯
사람 일행이 모두 장사치들 모양을 차리기로 하고 물건짐들을 만드는데, 신불출
이, 곽능통이, 두 사람 질 짐에는 왕래 길양식을 갈라넣고, 서림이, 배돌석이, 김
산이 세 사람 질 짐에는 갈아 입을 의복과 용 쓸 무명을 조금씩 나눠넣고, 길막
봉이 짐은 칼, 활, 화살, 철편 등 병장기로 속을 채웠다.
이 날은 해가 이미 저물어서 떠날 준비만 다 해놓고 이튿날 식전에 일찍이들
청석골서 떠났다. 여섯 사람이 청석골서 떠나던 날 임진나루 못 미처 동자원 와
서 자고 이튿날 식전 나룻가에 왔을 때, 강 건너의 배가 좀처럼 오지 아니하여
사장에들 앉아서 한동안 늘어지게 쉬었다. 기다리기 진력이 날 지경에 배가 겨
우 건너와서 타기까지 하였으나 사공이 행인 더 오기를 바라고 배를 띄우지 아
니하여 서림이가 “여보, 고만 갑시다.” 하고 재촉하니 사공은 못 들은 체하고
있었다. “우리 여섯이 선가를 특별 후히 줄 테니 어서 띄우.” 사공이 서림이를
흘낏 돌아보며 “얼마나 줄라구 특별히 준다우?” 하고 물었다. “내가 선가 선
셈하지.” 서림이가 자기 짐에서 서총대 무명 한 필을 꺼내서 “자, 이거 선가루
받으우.” 하고 사공을 주었다. 서총대 무명이 백목만 못한 낮은 무명이지만, 그
때 시세가 한 필 가지고 쌀을 서너 말 바꿀 수 있었다. 사공이 하루 종일 배질
하여도 쌀 서너 말거리가 생길지 말지 한 것을 한번에 받았으니 입이 딱 벌려져
야 옳건만, 이 사공 역심 보아라 매매 교환에 많이 쓰는 닷새 무명을 “이거 석
새 아니오?” 새를 낮잡아 시뜻하게 말하였다. “선가루 부족하우?” “부족한
게 아니라 북덕무명이라두 새가 너무 굵단 말이오.” “자, 갑시다.” “녜.”
사공이 삿대를 질렀다. 배가 깊은 물에 나와서 삿대를 뉘어놓고 노질을 시작
한 뒤 사공이 서림이를 보고 “멀리 벌이를 나가시우?” 하고 물어서 “그렇소.
” 서림이가 대답하니 “벌이들 잘해서 우리 같은 놈두 좀 먹여 살리시구려.”
말하고 껄껄 웃었다. “혼자 먹구 살 생각이 아니니까 배 한번 타는데 무명 한
필씩 주지 않소.” “서총대 한 필이 무어가 많소? 삼사십 년 전 같으면 쌀이
여덜 아홉 말이니까 많다구두 하겠지만.” “서 말 쌀은 어디요?” “전에는 닷
새 한 필이면 명주 한 필하구 맞바꾸든 것이 지금은 안집명주 한 필을 바꾸재두
너덧 필 드는구려. 시세가 얼마나 틀렸소.” “명주 한 필하구 맞바꿀 때를 봤
소?” “우리 여남은 살 적 일인데 보다뿐이오?” “연세가 올에 몇이시우?”
“쉬지근해진 지가 한참 됐소.” “아들은 몇이나 두었소?” “아들 하나 있던
것은 멀리 갔구 어린 손자새끼들뿐이오.”
이런 수작을 하는 중에 배가 나루터 가까이 와서 사공이 다시 삿대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서림이가 배에서 내릴 때 사공더러 “쉬 또 봅시다.” 하고 인사하
니 사공은 “녜.” 대답한 뒤 “언제든지 한 필씩만 주시우. 그러면 밤배라두 내
드리리다.” 말하고 또다시 껄껄 웃었다.
여섯 사람이 파주에 가까운 서작포를 거의 다 왔을 때 행차 하나가 앞에서 오
는데 기구가 굉장치는 아니하나 전배, 후배 사령들이 늘어선 것이 관행차가 분
명하였다. “저게 봉산 아니까?” “글쎄, 그런 것 같소.” “그럼 낯패났구려.”
“어제 파주서 자구 오는 모양이지.” “우리가 그저께쯤 혜음령 가 앉아야 될
뻔했군.” “여기서 만났으니 저걸 어떻게 하우?” “참말루 봉산이면 우리두
여기서 되돌아서는 수밖에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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