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은 후에 필연코 무덤을 파내어 부관참시를 할 것이니, 나의 시체를 전일
에 죽은 하인의 무덤 근처에 묻되 누구도 모르게 평장을 하고, 만일 금부에서
내 무덤이 어디냐 묻거든 하인의 무덤을 가리키시오."
극통한 중에 유자광의 말을 그대로 따른 지 몇 달 후. 아니나 다를까. 훈구파를
누르고 득세한 사림파가 자광의 시체를 찢고자 그 무덤을 찾으니, 사람들이 하
인의 것을 가리킨지라. 그것은 누가 보아도 권세 재상의 묘소가 분명하였다. 이
에 그들이 무덤을 파헤친 뒤 관 뚜껑을 뜯어 시체를 들여다본즉, 선연하게 붉은
생사로 얇게 짠 적초의에, 백초로 중단을 대어 입고, 운학 금환수를 늘이운데다
가, 무릎에는 폐슬을 달고, 허리에는 무소 뿔로 깎은 서각띠를 두른 채, 흰 버
선에 검은 가죽신을 신고 있는 시체의 수염과 머리털이 자광의 생시와 영락없이
똑같은 모습이었다. 이것을 살펴본 그들은 조금도 더 의심치 않고 달려들어 관
을 부수었다. 그리고는 시체를 끄집어내 단칼에 목을 잘라서 거리에 내다 걸고,
사지는 끊어 동댕이를 치며, 그 뼈는 형체도 없이 가루가 되도록 무참한 혹형을
가하였다.
"유자광이 그렇게 무선 사램이여, 긍게. 자기 사후의 일끄장 그렇게 치밀허게
딱 해 놓고 죽었어. 권세 잡고 있을 때부텀 그 준비를 미리 다해 논 거이라. 나
중 일을 짐작허고."
"그렁게 그 참사를 하인이 대신 당했고만. 유자광이는 무사허고."
"하아."
"아이고, 무섭네. 긍게 유자광이는 죽은 송장 써 먹을라고 그 하인을 평소에 그
렇게 잘 대접했드라 그 말이제?"
"아, 사램이 잔치에 쓸라고 지 돼야지 배 터지게 걷어 멕이는 거이나 한가지지
머."
"사램이 어찌 돼야지여?"
"돼야지보다 낫을 것도 없는 사람도 쌨어. 가만히 생각해 보먼 세상사, 나중에
지가 써 먹을라고 우선 저 사람 멕이는 일이 어디 하나 둘잉가? 더군다나 하찮
은 종의 목숨, 꺼리낄 거 머 있어?"
"아니, 유자광이 자개도 종의 자식임서?"
"그거이 사람 일이란 거이여."
"허긴 그리여. 긍게로 그 하인은 죽어서 송장 찢길라고 살어 있었던 거이그만.
목숨 붙은 목젝이 거그가 있었어. 그런 것도 모르고 살어 생전에 이게 무신 세
상이끄나, 잘 먹고, 잘입고, 편허게 지냄서 호강했던 거이네 그려. 아이고, 그
이얘기 들응게 나 매급시 팔짜에 없는 호강 누가 시키 준다까 겁나네, 겁나."
"겁나제. 유자광이가 말이여, 저허고 똑같이 생긴 하인이, 살었다고, 마당으서
왔다갔다 허는 양을 체다보는 그 눈을 생각해 바. 오싹허제. 그거이 산 사람 보
는 눈은 아니였을 거라고. 또 기양 단순히 종을 보는 눈도 아니였을 거이고. 그
게 바로 저 아니여? 저. 죽은 저. 저 죽은 거이 살어서 시방 왔다갔다 하는 거
이라. 그걸 보는 유자광이 흉중에 든 생각이 머이겄냐 그 말이여."
임서방은 눈을 가느소롬하게 뜨고 어둠 속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마치 그 어둠
이 유자광의 흉중이거나 한 것처럼. 그리고 그 어둠의 갈피를 헤집어 무엇인가
를 찾아내려는 사람처럼.
"그러먼, 유자광이 무덤은 아직 그대로 남었능가, 어디?"
"못 찾제. 아무도. 감쪽같이 비밀로 허고 평장을 해 부렀는디 누가 어찌 찾을
것이여?"
"원한 많은 사람은 죽어도 안 썩는다고 그러등마는."
"그리여. 그런다고 허데. 그 냥반도 불세출의 인걸인디, 바른 디서 못 태어나
서, 날 디 가서 못 나고 종의 몸으가 나 놔서, 한 펭상으 포원포한이 짚어 갖
꼬. 그래서 현신이 못되고 난신이 되얐능가 싶으데. 같은 아부지 자손인디 그
적형은 문짜 시호를 받었잖이여? 문짜 시호."
조선 시대, 종친과 정이품 이상의 문무관이 죽으면, 그 생전의 행적에 의하여
나라에서 주는 호가 시호인데, 시호를 받을 사람이 운명하면 그 자손들은 먼저
자기들이 기록한 고인의 행장을 예조에 내는 것이 순서였다. 그러면 이 행장은,
나라의 제사와 시호에 관한 일을 보는 봉상시로 보내지고, 거기서 다시 삼사의
하나로 경적에 대한 일을 관할하는 옥당 홍문관으로 전하여졌다. 그런 다음, 봉
상시의 정과 홍문관의 웅교 이상이 한자리에 모여, 시호를 받을 만한 사람의 공
적에 대하여 의논하고 알맞은 글자로 호를 정하였다.
도덕박문의 문, 청백수절의 정, 경사공상의 공, 인사유공의 양, 관락영종의 정
을 비롯하여 온량호락의 양, 자혜애친의 효와 사려심원의 익, 그리고 장, 안,
경, 장, 경, 또한 충의고절의 충 등의 좋은 글자 백이십여 자 중에서 골라 정하
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무엇보다 문자 시호가 으뜸이라. 문자 시호 받은 이가
한 집안에 나면 그의 성씨뿐만이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한 지방이 파벽이 되는
것이다. 이는, 썩 드물어 아는 이 별로 없는 성씨 벽성이나, 아직까지 양반이
난 일 없는 고을 무반향이 이 한 사람의 인재로 인하여 여태까지 미천한 상태를
면하게 되는 것이니. 벽성은 이제 세상이 아는 양반이 되고, 무반향은 이제 사
방에 번듯한 반향이 되었다. 실로 이 글자 하나가 한 가문이나 고을에 끼치는
힘이 이만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 그만큼 얻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였다. 그래
서 문자 시호 받은 이를 하나라도 배출한 고을은 문향이라 하여 존경하고, 아무
리 벼슬이 높아도 무관이 그곳에 지방관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문관만이 문향
을 다스릴 수가 있었다.
"그렁게 유자광이 적형은 문짜 시호를 받었고, 유자광이는 난신으로 부관참시를
당했이니, 적서 형제지간에 그렇게 인생이 서로 판이헌 것은 다 출생 탓이라.
저 날 디 가서 난 씨허고, 날 디 가서 못 난 씨허고, 그만침 서로 달러진 거여.
그 냥반 집안을 보먼 아부지나 적형이나 다 나라에서 내려주는 시호를 받은 양
반들잉게 씨는 더 말헐 거이 없는디. 그거이 넘으 밭에 가서 떨어진 게 탈이라.
원통허고 분헌 일 아닝가. 자광이로는. 만약에 지밭에, 지 자리에 가서 제대로
났드라먼, 순리대로 장성해서 타고난 기량을 옳은 디다 크게 썼을 거 아닝게비.
그러먼 그 적형보다 더 출중허고 잘나서 천하를 울렸을랑가도 모르는디. 박토에
가 나 농게 꾸부러지고 삐틀어지고 터지고 찢어지고 헐 빼끼. 어쩌든지 살랑게.
아 저도 살어야겄는디, 뜻을 조께 이뤄바야겄는디, 뜻은 하늘을 찌르게 높은디,
재주도 불세출인디, 그것을 아무도 안 알아 주고는, 모다 손구락질허고, 천대허
고, 멸시허고, 오그려 앉혀서 종노릇이나 허라고 칼을 씌워 놓으니. 사램이 못
났다먼 모르까 잘난 사램이 누가 그런 시상을 살라고 허겄능가. 지 기운이 저절
로 뻗쳐서 뚫고 나가는 거이제. 그럴랑게 삐틀어지제. 그래도, 자광이 아부지
도, 그런 자광이 덕을 봤제. 자광이가 효도를 했어."
경주 부윤으로 있던 유규가 소송자 중에 뇌물을 바친 자가 있는 것을 알고는,
그를 때려 죽여 버린 일로 파직을 당했다가 예종이 즉위하던 해, 아들 자광이
익대공신이 되자 그 힘을 입어 행첨지중추부사에 올랐던 것이다. 이것이 유규의
연갑 예순여덟 때의 일이었으니. 사후에 영의정으로 증직될 만큼 우뚝한 아버지
가, 한때 잠깐 곤두박질쳤으나 비천한 계집종을 보아 낳은 아들의 덕을 본 셈이
었다.
"아까운 일이여. 얼자가 그만헐 때, 만얀 정실 부인 몸으로 났드라먼 그 인물이
어쩠으까."
임서방의 말꼬리를 타고, 은하수 옆에 박혀 있던 별 하나가 날카롭고 휘황한 빗
금을 그으며 떨어졌다. 그것은 마치 하늘을 가르려고 일도를 휘두르는 칼빛 같
았다. 그러나 그 빛은 순식간에 흔적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별똥이로구만."
어서방은 낮게 중얼거렸다.
"저런 별은 왜 딴 놈들맹이로 하늘에 못 붙어 있고 저렇게 떨어징가 모르겄데."
그러자 임서방이 무심히 내뱉었다.
"별이라도 떨어지먼 똥이여."
이 말에 멍석 위의 사람들은 크큭, 웃으며 새삼스러운 듯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
다. 별무리 아득한 저쪽에서 유성이 또 하나 진다.
"그렁게 똥 안될라고, 거가 저렇게 매달려 있을라고, 온갖 짓을 다허능 거 아닝
가, 누구라도 말이여. 사램이."
별똥별이 허망하게 사라져 간 하늘에는 은하수가 가물가물 아득히 흐르고, 마치
반짝이는 모래 구슬을 흩뿌려 놓은 것 같은 별들이 아까보다 더 영롱하게 총총
하였다.
"저런 별들은 떨어지먼 어디로 가까잉?"
평순네가 고개를 젖힌 채로 혼자말처럼 말했다.
"은하수로 빠지겄지맹."
임서방의 아낙이 여전히 털럭털럭 부채질로 모기를 쫓으면 말을 받았다. 그 옆
에서 앵두는 고개를 젖히고 어미를 따라 별을 세어 본다.
"은하수는 참말로 있는 거잉가."
"있응게 겐우 직녀도 있겄지맹. 칠월 칠석날 저녁에는 까막까치 까마구 대가리
가 다 벗어진다고 안히여? 겐우 직녀 만나는디 다리 놔 주니라고. 그렁게 여드
렛날 아침에 보먼 그것들이 모다 대가리가 흐옇다데.밤 새도록 애쓰고는 기운이
없어서 다리 밑에 떨어져 죽기도 허고."
"아이고, 그러고 봉게 칠석날이 내일 모레 아니여?"
"까치 까마구들 큰일났네. 어쩌까. 대가리 씨릴 일 또 생게서."
"아니 그 겐우 직녀는 언제 쩍에 맺은 인옌이간디 아직도 애기를 못 낳대? 아들
하나 좀 낳제. 효자로. 그러먼 오직이나 좋은 독으로 골라서 오작교를 놔 디릴
거인디. 무지개맹이로. 아, 인간 세상으 아들도 효자는 한다리, 홀에미다리, 인
다리를 놓는디, 하늘에 선관 선녀 자손이야 오죽허겄어? 더 말해서 입만 아푸
지."
"대체나 그렇네잉."
"남원 광한루에 오작교가 바로 그 겐우 직녀 만나는 다리라든디."
"그러먼 요천수 강물이 은하수겄네."
"하아."
아낙들끼리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임서방은, 요천수 물이 은하수보다 더 깨끗하
면 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물이 그렇게 맑고 독이 그렇게 깨깟헌 강은 또 없을 거이네. 새애파러니 비치
는 물에 맻 천 년이나 씻기고 씻긴 독이 둥글둥글 닳을 대로 닳어져 갖꼬 뽀오
얗제 기양. 분 발른 것 맹이로. 아, 그렁게 은어가 살잖능가, 은어가. 은어는
아무 물에서나 사는 고기가 아니여. 낙동강 같이 탁헌 물은 좋아허들 안허고 우
리 요천수모냥 깨깟헌 물에서만 살어. 그런 디서 상게 맛도 기가 맥히제. 그렁
게 임금님하테 진상을 했어. 유자광이가. 그 냥반은 축지법을 헝게로 남원 누른
대 자개 집이서 아침 먹고 서울 대궐로 조회를 허로 갔다가 저녁 때먼 집으로
와서 잤어. 긍게 이른 새복에 잡은 은어 펄펄 뛰는 놈을 그대로 수랏상에 올릴
수가 있었제. 기인이라. 은어를 잡는 재주도 참 묘헌디, 은어란 고기는 백 마
리, 천 마리, 떼 몰려 댕기는 것 아니라고? 아조 날래고. 근디 어쩐 일잉가. 자
광이가 그 은어떼 복판으로 썩 들어스기만 허먼 은어들이 기양 딱 굳어서 움짝
을 못해 부리네. 맥을 못 추어. 그러먼 자광이는 고기를 잡는 거이 아니라 줏
어. 나무도막 줏디끼. 하루에 삼백 마리씩. 그렁게 그만침 유자광이 기가 셌든
거이여."
"그거 다 머 했이까잉."
"첨에는 신기해서 좋아허든 식구들도 날마둥 안 쉬고 맻 해를 먹어농게 인자는
질려서 더 못 먹는디, 거진 다 혼자서 먹어 치웠제. 키는 칠 척 장신에 눈은 번
갯불이 타고 힘이 장사라, 먹는 것도 넘의 맻 곱절이였응게."
"그런 사램이 요천수 물을 건넬 때는 물 욱으로 성큼 성큼 걸어 댕겠담서? 맨발
벗고. 아 왜, 자광이 생모 초상 났을 때도, 즈그 성을 업고 물 욱으로 걸어왔다
고 안 그러등게비? 그때 막 큰물이 나서 요천수에 붉덕물이 버얼그렇게 높은디,
그 물에다가 나무 이파리 하나 띄워서 타고 건넸다고도 허고, 나무깨(나막신)를
한짝 띄워 놓고 거그 앉아서 건넸다고도 안히여? 그렇제?"
"판대기를, 송판을 발으다 붙이고 걸어갔다등만."
"이얘기가 여러 가지네이?"
"그거이 아매 자광이 열대여섯 살 되얐을 때 일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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