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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4권 (20)

카지모도 2024. 5. 23.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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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박모

 

날이 저문다. 그렇지 않아도 진종일 낮은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던 하늘은, 구

름이 가린 볕뉘마저 스러지는 저녁이 되면서, 그 젖은 갈피에 어스름을 머금어

스산하게 어두워지는데. 하늘은 마치 아득히 펼쳐진 전지의 회색 창호지 같았

다. 아니면 담묵을 먹인 거대한 화선지라고나 할까. 검은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동짓달의 빈 천공에, 노적봉은 메마른 갈필로 끊어질 듯 허옇게 목메이며 스치

어 간 비백의 능선을 굿고 있었다. 이 능선 너머 아슴한 곳으로 드리워진 한지

의 하늘 끝자락은 수묵의 연지에 닿아 있어, 거기 저절로 스며든 어둠이 서서히

그림자 누이며 번져 온다. 소설, 대설이 지난 겨울 저녁, 흐린 하늘의 박모를

노적봉은 제 가슴 쪽으로 지그시 모아들인다. 그 어스름이 검불의 가루같이 내

리며 모여 앉은 바위 벼랑 골짜기와 숨은 계곡 언저리는 어느새 어둠이 고여 검

은 빛으로 우묵하고, 희끗희끗 눈이 묻은 산마루와 흰 빛 씻긴 등성이는 호젓하

게 쓸쓸하여. 검댕이와 적소가 얼룩이 져 어스름에 저무는 산의 모경은 삭연하

기 그지없다.

몇 점 눈발이라도 금방 날릴 것 같은 하늘의 젖은 회색은 그 자락을 더욱 낮추

어 노적봉 능선에 걸리고, 문득 끼친 바람이 성긴 빗자루로 능선의 귀퉁이를 쓸

고 간다. 그 부서진 금으로 어스름은 스며들어, 칼칼하게 목마른 선을 천공에

곧추세우고 있는 붓자국을 적시며, 어르며, 지우는데. 그렇게 살 속으로 스며든

어스름은 어둠으로 가라앉아 산의 몸을 묵묵히 채우니, 산은 하늘보다 더 먼저

두렷하게 검어진다. 그래서 하늘은 오히려 희부윰하게 트이는 것처럼 보인다.

구름빛 무거운 노적봉의 눙선에 길게 걸린 그 하늘은 지폭의 끝자락을, 저 너머

어디 수묵에 담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노적봉의 벼루에 적시고 있었다.

동짓달의 하늘과 겨울 산의 능선이 서로 그자락을 맞물고 스며들어 번지면서 조

금씩 더 어두워질 때, 산의 뿌리는 땅거미에 희미하게 지워지고, 산마루 등성이

는 전지의 담천에 날개로 떠올랐다.

가앙 가아아앙

그 산의 여윈 가슴 깊은 곳에서 범종 소리가 멀리 울려 왔다. 묵은 기와, 벌어

진 서까래의 고사 호성암에서 울리는 종소리이다. 그것은 골짜기의 마른 나무

형해와 찬 눈 이고 있는 청솔 바람 소리를 물살같이 쓸며 마을로 내려와 갈피

속으로 파고 들었다. 가라앉은 것들을 흔들어 일깨우는 것 같기도 하고, 뒤설레

어 떠 있는 것들을 하염없이 어루만져 쓰다듬는 것도 같은 이 종소리는, 차고

단단하고 날카로운 쇠붙이로 만든 것이련만, 그 쇠가 어찌 녹으면 저와 같이 커

다란 비애의 손으로 사바의 예토를 쓸어 주는 소리가 될 수 있으랴.

종소리는 잿빛으로 울린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단순히 잿빛이거나 회색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쓰다듬어 오히려 저며드는 그 소리에는, 마을의 뒷동산 밤나

무 숲을 지나, 골기와 지붕과 낮은 초가지붕, 그리고 검은 가지와 대나무 스풀

이며 저 아래 구부듬한 적송의 비늘을 에워 감고 있는 저녁 이내 빛깔이 배어

있었다. 구름이 덮어 가린 하늘 뒤에서도 해는 저 혼자서 지고, 그 해가 넘어간

땅 위에는 한동안 흐린 광명의 어스레한 기운이 남아, 운애의 두터운 막 이쪽에

노을로 비친다. 노을은 저녁 이내에 섞이어 엷은 보라를 띄우다가 이윽고 푸릇

한 목빛을 배앝고 있었다. 시리게 흰 옥양목에는 희다 못한 푸른 빛이 어리듯

이, 어스름도 겨우면 드디어 온몸에 형광의 인이 푸르게 돋아나는 것일까. 그

청린은 아주 잠시, 어스름과 어둠의 경계에서 얼비친다. 흐린 날에도.

옛말에, 뼈가 푸른 사람은 죽어서 신이 된다 하는데, 어스름은 어둠에 묻혀 무

엇이 되려고, 이렇게, 순간에 사라질 귀기의 푸른 놀빛을 전신에 뛰우는 것일

까. 치운 날씨 때문에 고샅에는 일찍이 인적이 끊기고, 빈 밭머리와 얼어붙은

논 위로 땅거미는 지는데, 마을의 집집마다에서는 저녁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오

른다. 모연이 흩어지는 허공에 에이게 고적한 청동 빛깔로 습기의 가루처럼 떠

있는 어스름은, 집과, 길과, 나무와, 돌 속으로 스며들어, 그것들의 형상이 가

진 무선을 부비어 지운다. 각 지고 날 섰던 것들의 선명한 부리와, 견고하고 곧

은 것들의 강인한 뼈다귀를 일피로 긋고 있는 금이 스적스적 허물어지며 경계를

푼다. 그리고 그것들은 같은 빛깔 속으로 서로 묻어들어 침윤하다.

가아앙 가아아앙

녹이 돋은 호성암의 저녁 종소리는 문득 잊었던 듯 흥건한 구슬픔으로 멀리서

둥그렇게 울려 왔다. 그것은 누구를 간절히 부르는 울림이었다. 그 종소리에 시

린 지월의 삭풍이 후비는 울음 소리로 허공을 훑고 지나간다. 바람 끼친 어스름

은 창호지 버석이는 소리로 어둡게 얼어든다. 마지막 푸른 비늘이 가시는 어스

름은 어둠과 섞이면서 오류골댁 살구나무 묵은 둥치 검은 가지 끝으로 내려와

앉는다. 마른 잎사귀 하나도 달지 않은 살구나무 고목은 희부윰한 반공중에 굽

이를 튼 아름드리를 거멓게 드러낸 채 빈 가지를 뻗치고 있었다. 나무는, 그 까

칠한 가지가 우거진 그물 사이로 내리는 어스름을 마치 목마른 것처럼 깊이 빨

아들인다. 나무의 몸 속으로 빨리어 들어간 어스름은 숙묵의 어둠으로 가라앉아

그 전신에 차 오른다. 그래서 아까보다 더 무섭게 검어진 몸통이 위로 오르다가

누일 듯 구부러지면서 뒤틀어 앙바튼 둥치를 바라지게 뻗치고 선 나무의 형상

은, 꼭 지심으로 뻗은 고목의 우람한 뿌리인 것만 같다. 마치 지하의 뿌리가 캄

캄한 어둠 속으로부터 홀로 진한 수액을 빨아올려 살구나무 가지의 저 먼 끄트

머리까지 보내 주듯이, 가지는 천지에 내리는 어스름의 어둠을 온몸으로 빨아들

여 지하의 뿌리에게로 내려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 둥치가 뿌리라면, 거꾸로 뿌리는 나뭇가지일 것이다. 하기는 맨 처음 어둠의

흙 속에서 눈을 뜬 뿌리는 그곳이 곧 자기의 세상이었을 터이니, 조금씩 조금씩

더듬어 자라면서 자신이 곧 줄기라고 생각했을 것이요, 그 줄기에 힘살이 박히

면서 둥치가 되고, 둥치에서 뻗은 뿌리가 수백 수천의 팔을 벌리어 무성하게 우

거질 때, 그것을 왜 가지라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자랄수록 더욱더 아

득한 어둠속으로 내려가면서도, 창천의 하늘로 뻗어 오른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이 어둠에도 밤이 오면 땅 속에 묻힌 씨앗들이 여린 껍질을 터뜨리며 무수한 별

로 빛나고. 그뿐인가. 뿌리를 채우는 검은 흙은 부드러운 어둠의 살이어서 아늑

하고 풍요로우며, 그 살을 적시는 지하수는 맑은 강물 소리로 흘러가는데, 뿌리

의 가지에 굴을 파고 깃드는 지렁이나 굼벵이는 한 마리 새나 나비가 아니랴.

죽은 몸 묻히어 구천으로 간다 하는 땅 속이라고 어찌 눈부신 꽃 피지 않을 리

있으리. 이백 년 삼백 년 된 노송을 관목으로 베어 낸 뿌리에는, 실뿌리 잔뿌리

의 끝끝에까지 하얗게 덩어리진 백복령이 눈부신 백설기같이 피어 어린다. 그러

니 지하의 뿌리한테는, 꽃 피고 새 운다는 지상이 오히려 흙 속일 것이요, 거기

우람하게 서 있는 나무의 무성한 가지는 거꾸로 뿌리라 여겨지리라. 그래서 뿌

리는 어둠이 휘황하고, 햇빛은 캄캄할 것이다.

한 톨의 씨앗이 떨어져 싹이 난 나무는 지표가 갈라 놓은 금의 위아래로 햇빛과

어둠 속에 서로 나뉘어 자랄 때, 그 가지와 뿌리가, 모양이나, 길이나, 뻗어 나

가는 방향이 쌍둥이 처럼 같다고 하니. 만일 뿌리가 저 축축한 어둠 속으로, 어

둠 속으로, 더 까마득한 아래로 내려가, 드디어 더는 갈 수 없는 어둠의 극에

달한다면, 가지는 또 꼭 그만큼한 길이로 자라나, 아주 마디게라도 자라나, 저

아찔하여 우러르기 눈물나는 광명의 심에 가서 박혀 줄 것인가.

저무는 살구나무 아래 오두마니 선 강실이는, 어둠을 깊이 빨아들이는 나무의

검은 가지 끝을 오래오래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나무는, 광명한 날의 빛

속에 낱낱이 구분되던 사물들의 빛깔과 모양들까지도 제 습기로 적시어 지운 어

둠을 다 받아들여, 그것들과 서로 한 덩어리를 이루며 통류하게 되리라. 그리고

드디어는 지하의 어둠과도 어우러져 일체로 교합을 하리라. 그 나무가 검어서,

종조모 청암부인의 상복으로 입은 흰 옷이 더욱 파리하게 보이는데, 이제는 마

음 놓고 어두워지는 어스름이 그네의 정수리로 내려 앉았다. 시린 어둠이었다.

이미 어둑어둑 초가지붕과 낮은 담, 그리고 조붓한 마당에 내린 어둠은 사립문

옆 검은 살구나무 아래 선 강실이를 소리없이 에워싸며 스며들어, 얼굴은 거뭇

하게 지워지고 소복은 오히려 소슬하니, 그네가 움직이지도 않고 어둠을 흡수하

며 서 있는 모습은 흰 나무 같았다. 다른 때 였다면 지금쯤은 오류골댁 방문의

창호지에는 주황으로 물든 불빛이 번지고, 희미한 등잔불 흔들리는 부엌에서는

아궁이에 솔가지 분질러 불을 때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리고 마당에는 매캐

한 냇내가 자욱할 터인데. 지금은 청암부인 상중이라 삼가 음식을 줄이고 소리

를 크게 내지 않는데다가, 거의 연일 큰집에 올라가 있는 기응과 오류골댁이,

내일은 삼우제여서 더욱이 애통하여 아직 집으로 내려오지 않은 탓에, 강실이

혼자 마른 나무처럼 서 있는 마당에는 어둠만 내려앉고 있었다.

푸드득

그 어둠을 차고 날개를 치는 저녁 까치들이 강실이의 어둠이 앉은 머리 위를 스

쳐, 위엣집 이기채네 은행나무 쪽으로 날아갔다. 큰집 까치구나. 강실이는 저도

모르게 이미 날아가 버린 새의 자취를 좇아 어두운 하늘로 고개를 돌린다. 이만

큼의 초가지붕을 넘어 더 위로 저만큼 먼 곳에, 어쩌면 여기서는 아무래도 끝내

보이지 않을 만큼 아득한 곳에 큰집의 솟을대문이 있고, 그 대문 옆 은행나무에

까치 둥우리는 있어서, 새는 그곳으로 날아가고 있는데, 걸어서 몇 걸음인 그곳

이 얼마나 멀고 멀어 이렇게 몇해를 두고 바라보아도 아직 그 시선의 끄트머리

는 대문에 이르지 못하는 것일까. 그래서인가. 차마 닿지 못한 그 대문 옆의 나

무에 무심히 깃들어 사는 까치의 날개 소리에도 강실이는 흠칫 놀라고, 그 까치

날아간 자취에도 가슴이 저리어 무망간에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스쳐 간 새의 그림자 한 점 묻어 있지 않고, 다만 동짓달

저녁의 빈 하늘만 허적하게 걸려 있을 뿐이었다. 어디 먼 데로 갈 리 없는 동네

까치들은 기껏해야 낯익은 마을의 지붕과 나뭇가지 사이를 날며 놀다가 밭머리

에 앉아 먹이를 쪼아 먹고, 이제 날이 저물어 저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리

라. 아침이면 까만 윤이 흐르는 날개에 무지개 서면서 둥우리를 차고 나온 까치

가, 저녁에는 날개 갈피에 자우룩한 어수름을 데불고 고단하게 돌아오는 소리는

서로 다르다. 지친 듯 그리운 듯 잠잠히 살구나무를 지나 은행나무로 날아간 새

의 날개 치는 소리가 멎은 하늘은 아까보다 조금 더 내려앉았다.

집을 두고 한데서 잠을 자는 새는 없다. 그리고 제 집을 잘못 찾아드는 새도 또

한 없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이 새들이 어찌 어찌 날이 저문다고 이렇게 저의

둥우리로 돌아 갈 줄을 안단 말인가. 아무리 멀리 날아가 있다가라도. 그것은

어쩌면 나무들이 목 놓아 부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가 넘어가면 사립문간으

로 나와 고샅에서 제 아이들을 길게 부르는 어미처럼, 한 자리에 붙박이어 서

있는 나무들은 그의 머리칼 속이나 가슴패기에 얹힌 둥우리를 이고, 안고, 온몸

으로 제 새들을 부르는 까닭일는지도 모른다. 나무가 어둠을 빨아들이는 것은

곧 간절하게 새들을 부르는 소리여서, 저녁 새는, 나무가 어둠을 빨아당기는 그

흡인의 기류에 실려 둥우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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