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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31)

카지모도 2024. 8. 12.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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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시끄럽네. 지가 헌 말은 생각을 못허고. 소가지라고 꼭."

오금박는 목소리로 쥐어박는 임서방 말에 더는 토를 달지 않았지만. 임서방네

는 강실이 혼수 화장품 말을 꺼냈다가 들은 이야기라. 혼자 머리 속으로 그 이

야기에 나오는 큰애기와 강실이를 섞바꾸어 세워 놓아 보았다.

인연은 모르는 거이라는디.

하면서. 왜 그랬는지 그네는 강실이가 아주 가련하게도 집에서 내쫓기어 수악

한 머슴한테로 시집을 간다면 누구한테로 가며 어떻게 될까. 상상을 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도무지 거짓말로라도 그 모습을

떠올려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네는 되작되작 원뜸의 종가에 있는 상머슴

에서부터 매안 마을 집집마다 한 집씩 더듬어 가며 상머슴. 중머슴. 물담살이.

깔담살이. 그리고 노비들까지 하나하나 짝을 지워 강실이 옆에 세워 보는 것이

었다.

그리고 거멍굴 춘복이까지도.

머 넘의 머리 속그짱 쫓아 들오든 못헐 거잉게.

그네는 들킬 염려가 없는 상상을 남모르게 감추어 놓고.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땔 때나. 하루일을 마치고 잠을 자려 할 때. 혹은 새 암으로 가는 길에 문득문득

한 장씩 들추어 보곤 하였다.

그것은 이상한 쾌감을 느끼게 하는 놀이였다.

흠도 티도 묻지 않은 귀문의 아리따운 작은아씨가 그네의 상상 속에서는 얼마

든지 처량하고 가련한 처지가 되어 온갖 천한 놈. 낮은 놈. 궂은 놈에게 이리 저

리 짓밟히며 접붙여지는 것은 그 무슨 은밀한 복수 같기도 하였다.

그런데 강실이는 언제나 고개를 서글프게 갸웃이 숙이고. 눈을 아래로 비스듬

히 뜬 채. 웃지도 울지도 않는 얼굴에 스산한 바람이 끼친. 소름이 오스스 돋은

모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좁은 어깨에 가녀린 몸 여윈 가슴에 안고 있는 모퉁

이 하나.

그 강실이는 상상 속에서 어디로 가지도 오지도 않은 채 얼핏 무슨 꿈속인가

싶게 비치다 스러졌다.

"사람으로 났으면 인연이 다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하늘의 이치거든. 나이 먹은

사람의 노파심으로 한 말이니 그저 너를 염려해서 그러는 것이라고나 생각해라."

이헌의는 무거워진 강실이의 얼굴을 근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만큼 그네의 낯빛이 창백하고 어두웠던 것이다.

"어디서 좋은 인연이 지금 너한테로 오고 있겄지. 길이 너무 멀어서 남보다 조

금 더 오래 걸리는 게야. 하룻밤 자고 나면 내일은 그만큼 너한테 더 가까워길

것이고."

옆에 앉아 있던 이징의가 한 마디를 거들었다.

"아. 거 인연이라는 것이 말이요. 이것은 좀 다른 이야긴데. 물리적인 숫자나

세월의 양을 탄할 것이 아닙디다. 중국의 청대에 등완백말입니다. 그 사람이 청

나라 제일의 서가 아닙니까?"

징의는 이헌의에게로 상체를 조금 돌리며 잘 아시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동의

를 구하면서 말했다.

등완백은 초명이 염으로. 자는 완백. 호는 완백산인이었다. 그는 필법이 근엄

하고 웅건뇌락하여. 글씨의 기상이 하늘을 찌르게 정대하고 우뚝하면서도 또한

너그럽고 활달하여 거리낄 것이 없는 필봉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해서. 행서. 예서. 전서. 초서에 모두 능하였지만 특히 청나라의 외교관이며 무장

이었던 오대징과 함께 전서를 크게 부흥시켜. 진한의 예술 정신을 높이 고취시

킨 공적이 지대한 사람이었다. 또 북비를 배워 심취하다가 드디어 북비파의 대

가가 된 그는. 대청 삼백 년을 통틀어 가장 높고도 우람한 서가였다. 붓과 더불

어 노니는 자. 그 누구라도 등완백의 경지를 흠모하지 않는 이 없고. 또 누구라

도 그를 감히 넘어선 이 없는 이 사람에게는 걸음이 이르는 곳마다 구름이 일

듯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이 몰려오고. 점 하나 찍어서 남겨 주면. 생애를 다하여

아끼고 대를 물리어 그 먹 자취를 전하였다.

이러한 그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당신의 제자는 누구입니까?"

등완백은 대답하였다.

"포세신"

이라고

포세신의 자는 신백이었다. 만년에는 권옹이라고 하였으며 소권유각외사라고

도 불렀다. 가경 13년의 거인(擧人:지방관에 의하여 조정에 추천된 사람)으로 신

유지현에 벼슬하였던 그는. 절세의 명필로 시와 서에 능하여 그 광채가 찬란한

사람이었다. 포세신의 필봉은 신묘하여 각체에 두루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경지

를 이루었는데. 그 중에서도 그는 행서를 잘 썼다.

그리고 서론에 탁월하게 밝아. 고전에 대한 비평과 운필법을 논하며. 비파의

서예 이론을 고무한 '예주쌍즙'을 저술하여.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한 생애

에 글씨로서 자신의 세계를 세우려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크고 깊은 영향을 주었

다.

그래서 청나라 말기에 광동성 남해의 명문에서 태어나 소년에는 성인을 이상

으로 하여 엄격한 주자학을 공부하고. 청년기에는 양명학에 전심. 정통파 유교에

대립하고 있던 금문학파 및 춘추공양학파의 영향을 크게 받아. 방대한 중국사를

탐독하고 불교서를 섭렵하였던 광하 강유위 같은 이도. 포세신의 '예주쌍즙'을

보고는 그 감명으로 '광예주쌍즙'을 썼던 것이다. 강유위는 포세신이 여든의 나

이로 세상을 떠난 지 삼 년 뒤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이 포세신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당신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이에 그는 대답하였다.

"등완백"

이라고.

천방신일한 두 거봉 대가가 서로 서슴없이 하늘 아래 단 한 사람 나의 제자라

한 이가 포세신이요. 그 분이 나의 스승이라 한 이가 등완백이었다.

참으로 이만하면 여한 없는 사제이리라.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등완백의 육십 년 생애와 포세신의 팔십 평생을 통하여.

서로 만난 것은 오직 한 번. 그것도 단 열흘뿐이었다.

포세신보다 삼십여 년 연장이었던 등완백은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 다니

었는데. 그가 어느 곳에 머문다는 말을 들은 포세신이 그 길로 쫓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그로부터 열흘간을 함께 지냈던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더 안 만나도 그 열흘로 두 사람 생애의 인연은 다 완성된 것이요. 눈빛만으

로도 심혼이 교감해서. 선생은 서법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제자는 모든 것을 깨

쳤으니. 됐지. 손잡어 가르쳐 준다고 되고. 평생 배운다고 그게 될 일인가. 그런

즉 인연에 만나는 횟수나 세월의 양을 탄헐 일이 아니지요. 다만 서로 무엇을

만났느냐가 중요허지."

징의의 말에 강실이는 문득. 그네의 한세상에서 강모와의 인연은 이미 그날로

다하여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닌가. 가슴이 허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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