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어머니가 건네주는 병을 받아 이윽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우데나'
도마도 화장수였다. 병 모양이 마치 도마도 같아서 붙은 이름이리라. 안개로 빚
은 유리병인가. 볼그롬한 살구꽃빛 연분홍 화장수가 애달플 만큼 곱게 비치는
병의 앙징스러운 뚜껑은 노랑색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수줍은 봄을 맞이한 꼬
막각시 같은 병의 조그만 모가지에는 진초록 이파리를 종이로 만들어 실을 달아
걸어 놓았다. 네가 이대도록 고와서 무엇에다 쓸거나.
강실이는 저도 모르게 그 빛깔에 물들면서 한숨을 지었다.
웬만한 집안의 처자는 혼수품으로 반드시 장만한다는 방물장수의 말이 아니라
도 이처럼 어여쁜 화장품이라면 누가 탐내지 않으랴. 그러나 그것은 어여뻐서 오
히려 한없이 서럽고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손안에 들고 있으면서도 아득한
빛깔.
오류골댁은 그 옆에다 이번에는 분백분 곽을 놓았다. 그리고 위에는 맑은물로
떠오르고 아래로는 보얀 분이 가라앉은 물분과 '구리무' 거기다 비누같이 생긴
기름막대 '직꾸'도 나란히 놓았다. 그 고형 기름을 참빗으로 빗은 머리에 바르면
검은 공단같이 매끄러운 윤이 자르르 흐른다고 하였다. 그 머리에 자주 댕기를
들여서 비취 비녀를 꽂고 거기에 금잠을 꽂으면 더할 나위 없는 맵시가 난다던
가.
오류골댁은 생전에 한 번도 써 본 일이 없지마는 성혼한 강실이의 자태를 상
상하며 서슴없이 물품을 들여놓았었다.
"이런 것도 사 놨다."
오류골댁은 꽃 달린 머리핀을 손바닥에 얹어 강실이한테로 보여 주었다. 선연
하게 빨간 동백꽃에 노란 꽃씨까지 박아서 붙인 실핀이었다.
"이런 게 개화 머리꽂이겄지. 이게 꼭 왜식이 아니라 우리도 전에는 다 떨잠에
뒤꽂이에 밀화장식 금패보옥으로 봉황도 새기고 산호꽂도 깎고 해서 머리에 꽂
았지 않으냐."
어디보자.
오류골댁은 강실이의 가리마 왼편에 동백꽃 머리핀을 찔러 주었다.
"이쁘네. 신여성은 그렇게도 찌른다더라만. 너는 인제 나중에 낭자머리 뒤꽂이
로 쓰거라."
그러고 나서 그네는 수놓은 바늘집이며 색색깔 헝겊 입힌 골무들을 반짇고리
에서 꺼냈다. 반짇고리 안에는 꼰사실. 푼사실 들이 색동저고리 소매처럼 알록달
록 나란히 줄을 맞춰 누워 있었다. 요요한 빛깔들이었다.
"오류골댁이는 언제언제부텀 오만 가지 이뿌고 존 것으로만 혼수감 다 장만해
놨다등만. 어째 아직 따님 시집을 못 보내고 있이까잉? 성짜가 모지래까 인물이
모지래까. 그만허먼 원 너무 짱짱허고 높아서 탈이겄는디. 안 그러요이?"
아랫몰 타성 임서방의 아낙이 한 번은 제 남정네한테 지나가는 말처럼 물은
일이 있었다. 늘 매안으로 드나드는 방물장수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
었다. 여러 해를 두고 다니는 그 방물장수는 마을을 한 바퀴 돌며 물건을 팔고
나면 으레 임서방네 집으로 들어와 점잖으신 부인들 앞에서 하루종일 얌전 내느
라고 조심하며 오그리고 있던 다리를 시원하게 쭉 뻗고 한바탕 쉬다가 갔다. 흔
한 일은 아니지만 해가 저물면 방 한 귀퉁이에서 끼여 자고 가기도 하였다. 그
러면서 그날 다닌 집이 어디어디이며 누구네 집에다 무슨 물건을 팔았다 하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래서 임서방의 아낙 앵두어미는 매안의 집집마다 반닫이
안에 어떤 방물들이 들어 있는지 안 열어 보고도 환히 알 만했던 것이다.
"그 속은 내가 모르겄지만. 사람의 운명이 팔짜 도망은 못헌다고. 다 앞앞이
정해진 무신 팔짜가 있을 거이여. 전에 이런 사람도 다 있었다는디. 참 인연이
될라먼 그렇게 되는 수도 있드라고."
본디 성정이 싹싹하고 이야기도 잘하는 위인이라 임서방은 딸내미 앵두까지
앉혀 놓고 곰방대에 담배를 재며 헛기침부터 커험. 하였다. 전에 어뜬 부잣집에
머심이 하나 있었는디. 생김새도 밉잖허고 허는 짓도 담쑥담쑥 보기 싫잖헌 떠
꺼머리 총각이였드리야. 나이 한 이십이나 되얏등가. 그보다는 조께 더 먹었등
가. 하이간에 그런 머심이 하나 있었어. 그 사람 성이 머이냐 허먼 김가여. 그렁
게 김도령이제. 이 김도령이 에레서 그만 조실부모를 해 부리고는 일가 친척도
벤벤찮어서 기양 이집 저집을 떠돌아 댕김서 얻어먹고 지내다가 어찌어찌 하루
는 그 부잣집이로 들으가게 되았당만.
에린 거이 눈치밥은 안 먹게 했등갑서.
너 어디 갈 디 있냐.
헝게로 없다고 그런단 말여?
아 그러먼 우리 집이가 있그라. 내 담뱃대 심바람도 허고 불도 때고.
주인 나리가 그렇게 말을 헝게 이 김도령이 오직이나 좋겄어?
아. 그러지야고 고맙다고 그러고는 부지런히 일도 허고 달랑달랑 심바람도 잘
했단 말이여. 그러다가 한 해 두 해 강게로 나이를 먹을 거아녀? 나이 먹으먼
힘도 생기고 일도 더 잘허겄지. 그래서 인자 그 집이서 너 쓸만허다 허고는 새
경 주는 머심으로 올려 줬어.
그런디 이 김도령이 나이 스물이 넘고 서른이 넘어도 당최 장개갈 생각도 안
허고 어디 다른 디로 가도 안허고. 기양 한 집이서 한 십 년을 변통 없이 머심
살이를 히여. 그렁게 주인 나리야 좋제. 한 식구맹이로 똑 믿고 농사고 머이고
다 맡길 수가 있잉게. 그저 그 집 일해 줄라고 난 사람맹이로 자나깨나 일만 헝
게.
그런디 바로 고 옆에 이우제 고샅에 고래등 같은 집을 지니고 부인 한 분이
사는디. 이 냥반은 성이 머이냐. 조씨여. 그렁게 조씨부인이제. 이 조씨부인이 만
석 거부여. 그러장게 집안에 노속들도 많허고. 담살이에 머심들도 욱근욱근 많이
부리고 했겄제. 그런디 그것을 다 부인 혼자 관장을 허는 거이여. 과수라. 웬만
헌 남자는 못 당허게 담력 있고 아조 지모가 있어서 살림은 만석 거부를 혼자
다 관장을 허지마는 젊어서 남편을 잃고는 눈먼 애기 하나를 못 낳고 그저 치부
나 험서 그냥 저냥 벨라 재미있는 중도 모르고 인생을 살고 있었드라네. 나이는
솔찮이 먹고. 그런디 하루는 그렁게 가실이였등게비여. 그해 농사를 잘 지여서
추수를 다 해 놓고는. 나락을 엮어서 이엉을 맨들고 지붕을 이을라고 놉을 얻으
러 나가는디. 그날따라 어쩐 일잉가. 김도령이 나가는 길목에 저만치 서서 아는
체를 허드란 말여? 시방끄장은 거그 서로 이우제 살어도 그 부인 얼굴을 보들
못했는디. 부인이 어찌 김도령을 알어보고 손짓을 하여.
"뭣 허러 가는가?"
"예. 마람 엮을라고 놉 얻으러 가요."
"그려. 그러거든 일허고 이따 저녁에 나한테로 와서 좀 댕겨가소."
"예"
김도령이 대답을 하고 나서 놉을 얻어 일을 마쳐 놓고는 저녁밥끄장 먹고 이
거 어쩐 일잉고 허고 인자. 암만해도 그 속을 짐작헐 수가 없는 일이라. 이 궁리
저 궁리를 해 보니라고 얼른 그 집이를 못 가고 몬창몬창허다가. 사랑꾼들이 다
놀고 돌아갈 임시에사 그 조씨부인 과수 집으로 갔단 말이여. 그 집이로 강게로
"어찌 이리 늦었냐?"
고 반색을 험서 맞이를 허더니 이리 들오라고. 과수가 거처허는 안방으로 데리
고 가. 데리고 들으가서는 배깥에다 대고
"아무 것이야아."
불러 불릉게로 계집종이 대답을 허네.
"너 아까 물 데우라고 했는디. 물 다 데웠느냐?"
"예. 데웠습니다."
그 말을 듣더니 조씨부인은 김도령을 보고 나가서 모욕을 깨깟허게 허고. 머
리도 싹 감고 오라고 그러는 거이여. 김도령이 어안이 벙벙해서 얼른 어쩌들 못
허고 섰응게. 시각이 지체되면 안된다고. 서두르라고 재촉을 헝만. 등을 떼밀다
시피. 대체나 시키는 대로 허고는 다시 안방으로 들응게. 아 과수가 딱 달라들어
갖꼬는 빗을 들고 김도령 머리를 빗기기 시작히여. 아조 곱게 곱게 그러더니 문
갑에서 금비네를 꺼내 김도령한티 딱 비녀낭자를 시키네. 그러고 비단 치마에
비단 저구리를 입혀. 과수 옷으로.
그래서 누가 얼른 모르고 보먼 영락없이 과수로 알게 뀌메 놨어.
놓고는 허는 말이
"이놈 입고. 내 이불 이놈 덮고. 여가 드러누웠으먼. 다름아니라 시방 김도령이
머심살이 허고 있는 그 집 주인이 오늘 밤에 나를 보쌈해 갈라고 올 거이여. 그
렁게 내 대신으로 이 속에 누워 있으먼. 보쌈 온 사람들이 난 줄 알고 싸 갖꼬
갈 거이여. 그렇게 싸 갖꼬 간 연후에. 아무리 달라들어 이불을 벳길라고 해도
절대로 못 벳기게 꽉 붙잡고만 있으먼. 김도령은 오늘 밤에 장개를 들어 열아홉
살 먹은 큰애기한티로. 내 말을 꼭 명심허먼 내 말대로 될 거이네."
그런단 말이여. 그러고는 과수가 나가 부러.
그래서 헐 수 없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는디. 마음이 싱숭생숭 해 갖꼬 무
신 잠이 올 거이여?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험서 조께 있잉게 아닌게 아니라 배깥
이 우세 두세 허드니 몇 놈이 베락같이 달라듬서 이불끄장 두르르 말어 부리드
니. 그대로 둘러메고 달어난단 말이여.
그러드니 김도령 머심 사는 집이다가 보독씨려(부려) 놔. 그렁게 주인 나리가
점잖허게 방으로 들으와. 잘라고. 김도령이 기가 맥히제. 그건 디다 대고 이불을
벳길라고 허네. 그 냥반이. 아까 과수한테 들은 말도 있고. 허고 낯바닥을 드러
낼 수도 없는 일이라. 젖 먹든 힘을 다해서 이불을 두 손으로 틀어 쥐고는 절대
로 안 놨제. 안 농게. 무신 수로 벳길라고 해 봤자. 벳길수가 있능가. 머심이라
힘이 장산디. 어째 볼 수가 없잉게 주인 나리가 안에다 대고 자개 딸을 불러대.
그 냥반이 열아홉 살 먹은 딸이 있었그던. 애지중지 눈에 넣어도 안 아푸게 키
운 딸인디. 헌다 허는 디서 혼삿말이 많이 들오는 판에 즈그 어머이가 죽어서
못 예우고. 인자 복 벗으면 시집을 보내야지. 마음먹고 있는 딸이제.
"아무 것이야아. 아무 것이야아."
"예"
"아매 잘 아는 이우제서 보쌈을 해 갖꼬 부끄러서 그러능갑다. 오늘 저녁에는
니가 느그 어머이를 모시고 자그라. 나는 나갈란다."
아 그러더니 딱 나가 부린단 말이여. 머심을 자개 딸한티다 남기고. 그렁게로
열아홉 살 먹은 이 큰 애기가 이불 보따리에다 대고
"우리가 서로 가차이서 속을 다 알고 그런 처지 아닝가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니 어머이가 인제부터 우리 어머이가 되야 갖꼬 같이 살먼 안 좋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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