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액막이 연
강실이가 문장어른 댁에서 나와 오류골댁 사립문간으로 막 들어서려할 때. 그
네의 등뒤로 엇비켜 꺼북하고 허수름한 남정네 하나가. 그네를 보고 공대하여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하며 지나갔다. 아랫몰 타성 부서방이었다. 나이 오십에
조금 못 미친 그는 꼬지지한 무명 조끼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비쩍
마른 어깨를 치켜 모가지에 잔뜩 웅크려 붙이고는 위쪽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설을 쇠면서도 입던 옷 빨아 새로 짓는 것조차 변변히 하지 못한 그의 머리
뒤꼭지가 마치 재를 섞어 쑤석쑤석 비벼 놓은 것처럼 반백으로 스산한데. 초장에
진즉 머리를 깎아 버린 탓으로 더욱 그렇게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
다.
그 머리 너머로는 티 한 점 없이 새파랗게 트인 정월의 빙청 하늘에. 크고 작
은 갖가지 형용의 연들이 팽팽하게 풀먹여 날선 창호지 조각들처럼 떠 있었다.
그것은 흡사 무궁한 창천에 부리를 세우고 솟구치는 색색의 솔개들 같기도 하였
다. 그 중에 어떤 것은 언덕 위에 나직이 날고도 있었지만. 창백한 가오리연은
희고 긴 꼬리를 나울나울 흔들며 동무 것을 넘어 오르고. 그보다 더 높은 하늘
에는 온몸의 네 귀퉁이 각을 발톱같이 세운 기상이 바람을 가르는 장군연. 바로
그 옆에서 그 장군을 공격하여 덤비는 장수의 방패 같은 꼭지연. 그리고 그보다
더욱 높은 하늘의 꼭대기 저 먼곳에 아스라이 점 하나 찍힌 듯 누군가의 연들
이. 차가운 햇빛 속에서 실낱을 달고 날았다. 아이들의 함성이 연을 따라 물살처
럼 투명하게 울리며 논배미 너머 언덕 너머 아득히 높아진다. 지금이야 세월이
어수선하여 그전 같지 않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정초가 되면 온 동
네 아이. 어른이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마을 언덕으로 나와. 귀가 떨어지게
찬 바람 속에 가슴을 좌악 펴고 서서. 연자새(얼레)를 감았다 풀었다. 하며 푸른
하늘에 꽃 같은 새를 날리듯 연들을 날리는 그 풍경은 바라보기에도 참으로 화
려하고 장쾌한 것이었다. 연이란 그저 바람만 잘 타면 뜨기 마련인 종이 조각이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같은 연을 날려도. 자새를
감고 푸는 솜씨며 실을 당기고 늦추는 재주에 따라. 창공에 뜬 한 마리 연은 그
야말로 아무도 당할 자 없는 솔개가 되기도 하고. 그만 힘없이 떨어져 버리는
나뭇잎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에 무엇보다도 연은 우선 모양이 잘생
기고 풍채가 당당해야 하며. 오려 붙인 꼭지나 그려 넣은 그림이 예쁘고 좋아야
했다. 아녀자의 바느질 솜씨나 마찬가지로 남자가 자신의 연 만드는 솜씨를 한
껏 뽐내어 많은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만일 손이 둔
하고 무디어. 틀이나 겨우 얽어서 후줄근하게 만든 연이라거나 하찮고 볼품없는
그림이 얼룩덜룩 그려진 연을 들고 나와. 여럿 가운데 서서 날리게 되면 본인도
머쓱하여 부끄러워하였고. 남들한테도 은근히 흉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에
나가. 한 개에 몇 전씩 하는 연을 사다가 날리는 것은 더욱 체면이 깎이는 일이
었다. 연은 자기가 만들어서 놀아야 멋이었다. 그래서 으레 정초가 되면 집집마
다 어린 아들이나 손자를 앉혀 놓고. 한지를 장방형으로 반듯하게 자르며 가느
다란 대오리를 곱게 깎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의 자상한 손길이 신명나고 흥겹
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방안에는 벌써부터 들판과 언덕 위의 바람이 설레이며
부풀어 차오르는 듯하였다. 이기채도 어린 날의 강모를 위하여 연을 만들어 주
었으며 기표도 그의 아들 강태가 어렸을 때는 그렇게 연을 손수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집안에 연을 날릴 소년이 없는 기응은. 남달리 매시라운 손끝으로 장구
도 잘 쳤지만. 연 만드는 솜씨도 그에 못지않아 큰집 작은집의 두 조카들을 주
려고 공들여 고운 연을 만들곤 하였다. 깐깐하고 대쪽 같은 부친을 몹시 어려워
하던 강모는 차갑고 날카로운 중부 기표보다 수더분하고 모나지 않은데다 욕심
이나 꾀가 없어 대하기 편안한 오류골 숙부 기응을 더 좋아하여. 곧잘 이 작은
집으로 내려와 그의 옆에 앉아서 제 연 만드는 것을 구경했었다. 그럴 때면 강
실이도 함께 그런 것을 신기하게 들여다보았었다.
"이 연이란 것은 말이다. 잘 만들어서 띄우면 재미도 물론 있지마는 그보다 올
한 해 아무 탈없이 무사하게 연이 저 하늘로 거침없이 높이 날 듯이. 하는 일마
다 모두 성취하고 잘 풀리게 해 주시라고 간곡히 비는 마음을 실어서 바람에 띄
워 하늘로 올려 보낸다는 뜻도 있는 것이다. 이게."
그러니 할 수 있는 껏 정성을 기울여 어여쁘고 튼튼하게 만들어야했다. 자신
의 소망을 보다 고운 색색깔 오색으로 아로새기어. 보다 놓이 보다 멀리 드높은
천상의 그 어디까지라도 날아오를 수 있도록 하려고.
기응은 물기가 완전히 빠져 마른 대나무 토막을 잘 드는 주머니칼로 잘게 갈
라. 한 개 한 개 기다란 꼬챙이처럼 깎았다. 연살이었다. 그것은 서투른 어린아
이가 덤벼들어 하기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이야말로 연의 뼈대를
이루는 대가지로서 연이 제대로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추는 기본이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이걸 '달'이라고 하는 것이다.'"
기응은 꼬챙이를 들어 강모에게 보여 주었다.
연 하나 만드는 데 달은 다섯 개가 필요했다.
"이 머릿달이 그 중 굵어야 허니라."
연종이의 맨 윗단에 가로로 붙이는 이 살은 연이 바람을 타고 하늘로 치솟아
오를 때. 갑자기 부딪치게 되는 바람의 세찬 압력을 견디면서 앞으로 강하게 밀
고 나가야 하는 탓이었다. 머릿달이 약하면 대가 그만 부러져 버리고. 만일 전체
의 굵기가 고르지 못하면 연이 한쪽으로 기울어 날기 어려웠다. 그래서 혹 마디
가 있는 대오리를 머릿달로 쓰게 될 때는 그 마디를 한가운데로 오게 하거나 아
니면 선 양쪽에 꼭 같이 가게 하여 무게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연의 네
귀퉁이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서 가위표로 붙이는 귓달은 다르다. 귓달은 머리
쪽은 아까의 머릿달처럼 굵고 튼튼하게 깎아야 하지만 점점 치마 쪽으로 내려갈
수록 흘리듯이 가늘게 다듬어야 하는 것이다. 치마가 무거우면 안되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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