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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15)

카지모도 2024. 9. 26.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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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얼룩

 

달빛은 바람꽃같이 자욱하였다. 큰 바람이 일어날 때, 먼 산의 봉우리 너머 아

득한 하늘로 구름처럼 뽀얗게 끼는 기운을, 사람들은 바람꽃이라 불렀다. 이윽고

휘몰아칠 큰 바람이 그렇게 미리 꽃으로 피는 것이다. 천지를 뒤집으며 지붕을

두드리고 토담을 무너뜨리는 바람이 밤새도록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집채를 쥐어

뜯으며, 문고리를 비끄러맨 방안조차도 덜컹덜컹 흔들리게 하였다. 위태로움에

긴장한 사람들이 잠을 못 이루고, 뜬눈으로 허옇게 앉아 오직 귀를 칼날처럼 세

우게 하는 그런 바람도, 처음에는 황사 구름 같은 하늘의 꽃으로 왔다. 그것은

두려운 조짐이었다. 허리에 찬 밤이 이우는 노적봉 위의 중천에는 얼음거울 같

은 달이 빙경이란 말 그대로 차고 맑게 떠 있는데, 아까보다 더 짙은 빙무가 달

을 에워싸고 있었다. 추운 땅에서, 공중에 뜬 미세한 얼음의 결정으로 생기는 안

개를 일컬어 빙무라 하지만, 이 대보름 밤에 서린 얼음안개는 저 달빛의 가루인

가도 싶었다. 시린 달이 부서지며 얼음 가루 안개로 산천에 내려앉는 빙무는 어

느결에 바람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바로 강실이가 있는 대밭의 검은 너울 위에

도 달빛은 빙무를 자욱이 드리우며 잎사귀 낱낱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달빛은

강실이의 푸른 얼굴 위에 얼룩으로 그림자 진다.

"작은아씨."

춘복이는 오직 그 말만을 저며들게 뇌일 뿐 더는 어쩌지 못하면서, 그네의 백지

장같이 얇고 시신처럼 식은 몸이 더웁게 더웁게 돌아오도록, 제 살을 부비어 일

깨우고 있었다. 강실이는 동상으로 감각을 잃어버린 살의 어디에 남의 살이 닿

은 것같은 무감으로, 춘복이가 제게 하는 일을 버려 두었다. 이리 하지 말라. 하

기에도 겨울 만큼 그네는 이미 맥을 놓아, 가느다란 정신의 실오라기한 가닥마

저 추스리기 어려웠다. 하물며 그 벼릿줄을 잡아당겨 온 정신을 수습하기에는

너무나 기진하여 버린 것이다. 무거운 이불처럼 덮이어 숨을 누르는 춘복이를,

가위 눌린 꿈속에서 그러하듯 밀어내지 못한 채, 다만 속수무책으로 눌리어 손

가락 하나 들어올릴 수 없는 강실이는, 반혼 반신의 막막한 몸 옷자락을 얼룩진

달빛에 내주고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오...아이고오..오오. 그네의 귓전에 대바람

쏠리는 소리가 물 소리로 쏟아지며, 곡을 한다. 그것은 강수의 사혼이 있던 날

밤, 허수아비 꼭두각시 사모 입은 신랑과 연지 찍고 곤지 찍은 신부의 꽃잎같이

붉은 입술, 그 지푸라기 인형들을 넋이라고 세워 놓고 혼인을 시키던, 동녘골댁

마당에서 터지던 곡성인가. 아니면 그 서럽고 휘황한 마당의 한쪽 귀퉁이, 무너

진 토담 너머 텃밭에 검은 어둠을 쓸어 안으며 저도 함께 무너지던, 그 돌아보

기 무섭고도 일생 오직 그밖에는 돌아볼 일 없는 순간의, 명아주 여뀌 등밑에서

부러지던 그 비명 소리인가. 아니면 청암 할머니 운명하셨을 때 큰집의 궤연, 영

연앞에 낭자하던 애곡 소리인가. 아아, 아니면 내가 나를 장사하여 묻으며 우는

소리인가. 곡비의 울음 소리가 온 밤 내내 구슬픈 물굽이를 이루며 집안을 젖게

하더니, 날이 어슴프레 새면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지. 그때 아랫몰 초가

에서 며칠 전부터 종가로 올라와 현하여 밤을 새우고 있던 인월댁이 초췌한 낯

빛으로 빈소에 정을 올리었다. 이제 막 돌아가신 망자에게 생시인 듯 음식을 올

리는 것이다. 진설을 다한 뒤, 이기채는 술잔을 받들어 시신의 동족에 놓고는 그

대고 엎드려, 북받치는 심정을 가누지 못하고 슬피 울었다. 아무 염려 하지 마십

시오, 어머니, 아아무 염려...하지 마세요...부디... 다 잊어 버리고 편안히.. 그냥 가

십시오. 이까짓 자식 같은것도... 다 잊어 버리시고... 그는 자신의 옆에서 애곡해

야 할 강모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 때문에 더욱 절통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

아도 작은 몸이 그나마 한 주먹안에 잡힐 만큼 밭아진 이기채는 넋이 나간 사람

같이 보였다. 인월댁은 삼끈과 베근을 들고 시상의 머리맡에 섰다. 그 옆에서 흠

실댁이 율촌댁과 무엇인지를 의논하였다. 인월댁의 소복이 새벽빛을 받아 푸르

게 날이 섰다. 흰 당목 치마 저고리에 인이 묻어나는 모양이었다. 그 푸른 빛은

설움을 서리처럼 뿜어 내고 있었다. 그네가 손에 움켜 쥐고 있는 삼근과 베끈이

흐르르 떨리었다. 이제 곧 청암부인의 죽은 몸 시신을 묶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효원이 우욱, 치미는 울음을 토하며 허리를 꺾었다. 아아, 이제

어디 가서 누구를 의지하랴, 할머님은, 내 너를 믿고 가마...하셨지만, 나는 누구

를 믿을 것인가. 그네는 수천댁이 다가와 그만 울라고 지곡을 시키는데도 울음

을 멈추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네 나름대로 휘몰아쳐 오는 소용돌이를 직감하여

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아이고. 아이고오...아이고오....오오. 효원은 영연 앞에

서 통곡을 하였다. 어떻게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곡이 봇물처럼 터져 그네

를 휩쓸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엄청난 사실을 차마 믿을 수조차 없어서 진정

을 못하는 그네를, 청암부인의 죽음이 순식간에 덮쳐, 효원은 마음놓고 울었다.

울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다. 실성 발광, 몸부림을 친다 해도 흉보지 않는다.

효원은 할머님의 죽음을 빌려, 제 울음의 목을 놓았다. 할머님, 이런 저를 믿고

가셨습니까. 이런 저를 믿고... 네가 앞으로 한세상의 고비고비에서 나를 얼마나

많은 매듭으로 동여 묶으려고 이 애를 태우느냐, 싶었던 대실에서의 밤이 생각

났다. 그때 돌덩어리처럼 단단히 홀맺혀 묶여 있던 강모 발목의 광목띠를. 그리

고 아직 생존해 있전 청암부인이 마지막으로 남겨 주던 말도 생생히 귓가에서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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