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혼불 6권 (40)

카지모도 2024. 10. 25. 05:46
728x90

 

"네가 혼인해서 이제 시댁으로 갈 때 이 신랑 주발에다가는 흰 찹쌀을 담고, 신

부 바리에다가는 붉은 팥을 하나 가득 담는 거란다. 그래 가지고 각각 이렇게

대접에다 받쳐서 홍보에 싸지. 수저는 네가 곱게 수놓은 그 모란꽃 화사하게 흐

드러진 수저집에다가 한 벌식 넣고. 그렇게 가지고 가면, 느그 시댁에서는 신부

를 새로 맞이해서 구고례를 치르고는, 큰상을 채려 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날 저녁에는 신부가 식기에 담어 온 흰 찹쌀 붉은 팥으로 찰밥을 지어 밥상에

놔 주니라."

그것은 신랑 신부가 서로 찰밥처럼 찰지고 다정하게 살라는 축수와 붉은색이 모

든 액을 물리쳐 주기 바라는 벽사 제액의 기원이 깃든 밥이었다. 성년의 첫 밥.

내 그 밥그릇을 채울 일이 없으리라. 이제는 내가 누구에게로 혼인하여 시집을

가며 누구를 위하여 흰 찹살에 붉은 팥을 담아가리. 나는 아마 지어미 될 일 없

으리라. 장독대에 선 강실이는 효원과 율촌댁, 그리고 어머니 오류골댁을 먼 세

상의 그림자처럼 바라본다. 여자로 태어나서 한 남자를 지아비로 맞이하여, 밥을

짓고 장을 담그는 여인들. 이른 새벽,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은 미명에 푸르스름

한 공기의 결을 걷으며, 돋아나는, 서리 같은 이슬이 함초롬히 맺힌 장독들의 정

결함. 그리고 그 뚜껑 위에 바치는 정화수 한 그릇. 그런 새벽을 나는 누리는 일

없으리라. 저와 같이 장중 우람하면서 아기자기한 장독들의 세월과 무리를 나는

거둘 일 없으리라. 강실이는 가슴 밑바닥이 허전하고 서늘하게 빠지는 것을 느

낀다. 앙가슴에서 등판까지 맞바로 꿰뚫어 대못을 친다 해도 다섯 치가 채 못될

가슴이 과연 얼마나 깊은 것이기에, 이토록 무섭고 까마득한 허방을 품고 있단

말인가. 아아,

"강실아."

오류골댁이 깜짝 놀란 소리로 다급하게 딸을 부은다. 강실이는 그 허방으로 떨

어져 내리는 검불처럼 장독대 아래로 휘청 흔들리며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낯빛이 파랗게 질리어. 펄럭. 내 어찌 이때까지 죽는다는 생각을 못하였던고. 왜

죽으리란 생각을 못하였던고. 염치없고 무안한 목숨을 이토록 굳이 지탱해 온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네는 바스라진 가랑잎 한 장같이 힘없이 떨어진 찬 땅

위에 누워 혼미해지는 의식 한 가닥에 매달이었다. 오류골댁과 율촌댁이 황망하

여 강실이를 흔들어 깨우면서

"안서방네."

새되게 갈라지는 목청으로 화급히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귓결에 먼데. 효원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다. 부엌 뒷바라지가 투당탕 열리고, 안서방네

와 콩심이, 돔바리, 키네가 뒤안으로 튀어나오는데도 여전히 그네는 움직이지 않

는다. 붙박인 사람 같다. 그러나 눈초리는 매섭게 강실이를 쏘아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맥을 놓으며 까무러져 혼절하는 강실이를 들어올려 울러메고 우우, 소리

가 나게 안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효원은 뒤따르지 않았다. 어수선한

발자국 소리들이 안채의 큰방 댓돌 위에 흩어지고, 장지문 여닫히는 소리와 신

발 끄는 소리들이 다시 마당에 쏟아지며 들려올 때가지도, 그네는 그냥 그 자리

에 서 있었다. 안에서 나온 콩심이가 사기 대접을 들고 나와 우물가로 가다가

"왜 저러싱가요?"

제 새아씨한테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른다."

효원은 잘라 말했다. 콩심이는 전에 제가 해 놓은 이애기가 있는지라 공연히 쭈

밋거리며 좌불안석 효원의 눈치를 살피었다.

"아이고, 기양 기색을 허세 갖꼬요. 숨도 맥히솄는게비여요. 얼굴이 새애파러니

질렸는디 숨도 못 쉬여요. 막 달라들어서 시방 주무르고 야단이 났는디, 저보고

찬물 좀 떠오라고 그러시길래."

"그럼 얼른 물이나 떠 가지고 갈 일이지. 웬 사설이냐."

콩심이는 장독대에 우뚝 솟은 기둥처럼 높다랗게 서서 저를 내려다 보는 새아씨

앞을 개미걸음으로 지나, 우물 소게 풍덩, 두레박을 떨군다. 그 소리에 첨벙, 제

가슴이 놀란다. 아이고매. 혹시 새아씨허고 싸우솄이까? 그 일로? 그러다가 콩심

이는 고개를 갸웃 젓는다. 아무 소리도 안 났는대? 내가 아까 정짓간 있을 때

내다봤잖이여? 새아씨는 기양 이러어고 서서. 애기씨 오냐, 소리도 안허시든디?

무신 일이까잉. 내가 매급시 무단헌 소리를 해 갖고는 가심이 통꺼려서 당최 못

살겄네. 에이, 참. 그런디 그때는 안헐 수도 없었잖이여. 머. 콩심이가 물 사발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간 다음에도 효원은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다가, 남 보기에

민망한 일이라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마당으로 내려섰다.

"아무리 종시매라고 하지만 그렇게 정이 없이 매차냐."

는 말 듣기가 십상이지만, 이 마당에 그네는 차마 낯색을 변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 강실이가 눕히어진 큰방으로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주 모

르는 척 할 수만도 없는 일이지 않은가. 저 사람이 병이 들었구나. 효원은 무거

운 고개를 숙이었다. 안서방네가 큰방 문을 열고 나온다. 양손에 대야를 받쳐들

고 토방으로 내려서다가, 올라서는 효원을 보고는 잠시 몸을 비킨다. 그러더니

누군가를 보며 안서방네가 아는 시늉을 한다.안서방네 눈가는 곳을 따라 효원도

무심코 고개를 돌린다. 옹구네가 막 중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다 저물어서 어찌 와?"

안서방네는 뒤안 우물가로 쫓아오는 옹구네한테 묻는다.

"아니, 나 우례한테 바느질 멋 좀 물어 볼라고 왔다가 애기씨 혼절했다는 말 듣

고는 놀래서잉."

"소문도 참. 한자리에 같이 있었든 것맹이로 빨르네그려."

"왜 그러곘다요?"

옹구네가 안서방에 겉에 바짝 쪼그리고 앉는다. 눈빛이 번들거리며 광채가 난다.

그러면서도 입술은 비웃는 것인지 한쪽으로 틀어진다. 안서방네는 대답 대신 대

야에 담긴 수건을 헹구어 짜고만 있다.

"급체를 했든지, 허해서 그러시겄지. 본래 강골은 아니싱게."

안서방네는 걱정스러우나 심상한 어조로 대꾸한다. 벌써 노을이 잦아든 저녁 공

기는 어스름이 짙게 배어, 마주앉은 두 아낙의 모습을 희끄무레 엷은 어둠 속으

로 잡겨들게 하고 있다.

"혹시"

옹구네는 어스름보다 더 음습하고 낮은 소리로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더 잇지

않고 끊는다. 대야를 들고 일어서려던 안서방네는 다시 바닥에 수건 담긴 물대

야를 내려놓고는 되물었다.

"혹시라니?"

"애기 밴 거 아니까?"

잉? 하마터면 안서방네는 엉덩방아를 찧고 샘 바닥에 주저앉을 뻔하였다.

"아니 이 예펜네가 실성헌 거 아니여, 시방?"

"아, 그럴랑가아. 햇지, 누가 그렇다고 했소?"

"미쳐도 곱게 못 미쳤능게비."

"내가 왜 미쳐?"

"아이고, 멀미야. 이 예펜네 참말로 환장을 했능게비네잉. 마른 하늘에 날베락이

라드니, 지 정신이여? 음아, 눈 하나 깜짝 안허고잉?"

"의윈 부르로는 보냈다요?"

"의원? 아나, 의원. 의원은 참말로 니가 바야겄다, 야가 지 명에 못 죽겄네. 음마,

이게 무신 뚱딴지 같은 소리여. 긍게."

옹구네는 알고 있는 어떤 속이 있는 것처럼 침착하고, 안서방네는 가슴이 벌렁

거리며 퉁탕퉁탕 뛰어 입을 다물지 못한다. 얼른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손

까지 후들후들 떨린다.

"헐 만헝게 허는 소리 아니요?"

"머? 헐 만헝게 허는 소리?"

"의원 오면 진맥허겄지맹."

"진맥?"

"아 조께 몬야 아냐 나중 아냐, 그것뿐이제. 알기는 알게 될 일잉게."

"이리 와 바. 이리, 이리."

안서방네는 옹구네 말이 결코 미덥지는 않았지만, 기왕에 터진 말인지라 경위나

알아보려고 급한 마음으로 옹구네를 일으켰다. 비록 헛도깨비 헛방망이질 같은

말일지라도, 한데 자리 새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주고받을 내용은 천만 아닌

까닭이었다.

"콩심아. 이것 좀 딜이가그라이."

큰방 마루에 떠그럭 대야를 올려놓고, 안서방네는 옹구네를 이끌어 황급히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방안은 바깥보다 어두워 서로의 얼

굴 윤곽조차 지워져 버리는데, 옹구네의 숨소리는 안서방네 귓바퀴를 적신다.

"내가 다른 디 가서는 이런 애얘기 입도 뻥긋 안했소잉. 나도 나 죽을 일은 안허

고 상게, 천허디 천헌 상년의 신세, 서방도 없이 삼서도 아직끄장 안 죽고 살었

겄제. 그런디 내가 첨으로 이런 말 허요. 나도 참 말 못허게 설운 년이요."

옹구네는 서두를 떼더니, 연전에 이씨 문중의 강수 혼백이 혼인 하던 날 밤, 텃

밭에서 보았던 강모와 강실이의 청천벽력 같은 일을 지금 바로 눈앞에 벌어지는

일 모양으로 소상하게 이애기하고는

"대실아씨가 그 일을 아실랑가 어쩔랑가 모르겄네요?"

어두운 속에서 안서방네 기미와 눈치를 살핀다.

"나는 모르는 일이여."

"새아씨 말이지 누가."

너 알고 모르는 것을 물었느냐는 투로 옹구네가 말을 자른다. 그것은 결코 지어

내는 말 같지가 않았다. 이제 안서방네는 옹구네를 채근 하였다.

"그래서?"

"나보고 미쳤다드니."

"안 미쳤으먼 똑바로 말을 해 바. 똑바르게."

"똑바르나 삐틀어지나 똑같은 일이여. 너무나 뻔헝게."

"그래서어."

"나 쥑일라요?"

"왜 쥑여?"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6권 (42)  (2) 2024.10.28
혼불 6권 (41)  (0) 2024.10.26
혼불 6권 (39)  (1) 2024.10.23
혼불 6권 (38)  (0) 2024.10.22
혼불 6권 (37)  (3) 2024.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