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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42)

카지모도 2024. 10. 28.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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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니는 목을 질금 움츠리며 제 어미 눈치를 헬금 살폈다. 어매가 무어라고 하든,

옹구네가 나타나면 꽃니는 재미가 있었다. 이제 열 살 막 넘은 계집아이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어른들의 비밀스러운 수군거림이 옹구네한테서는 늘 쇳대 소

리같이 절렁절렁 울렸고, 어린 눈에 보아도 가무잡잡 동그람한 얼굴에 샐쪽한

눈꼬리며 도톰한 입술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예뻐 보였던 것이다. 거기다가

옹구네는 꽃니를 애들이라고 무질러 몰아 버리지 않고 꼭 말참례를 시켜 주었

다. 그런 것들이 꽃니는 은근히 좋았다. 언젠가 뒤안 마당에서 콩심이는 철재를

업고 서 있다가, 히끗 모퉁이를 돌아가는 옹구네를 보고 꽃니한테

"아이고, 촉새, 나는 옹구네만 보먼 준 것 없이 밉드라."

고 입을 비쭉 했었지만.

"우례도 나맹이로 전상으 죄가 많어서 넘 못 살 시상 가심 찧고 사는디, 인자는

갠찮은 날도 올 거이여. 세상이 배끼고 있거등. 막 ㅅ이고 배끼고 있잉게 원한이

풀리는 날 곧 오제."

"꼭 와얄 거인다."

"아이. 내 말 조께 들어 보소."

옹구네는 음성을 낮추었다. 그리고 우례의 귀바퀴 가까이 입을 대고 속삭속삭,

저만치 앉아 있는 꽃니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한참이나 무슨 말

인가를 하였다. 꽃니는 눈을 반짝이며 귀를 쫑긋 세웠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

다. 다만 하도 잘 아는 이름이라 아무리 낮은 소리로 이야기해도 저절로 들리는

것은, 오류골댁 작은 아씨라는 말과 춘복이라는 말뿐이었다.

"거그서 애기 하나 나먼, 가는 인자 봉출이허고는 거꾸로제 긍게. 처지가 아이고,

나, 벨일을 다 보네이."

하고 하는데, 우두두두, 바깥에서 어지러운 발소리가 쏟아졌던 것이다.

"왜 이리여?"

깜짝 놀란 우례가 반사적으로 문짝을 탕, 열어제치자

"작은아씨가 씨러지곘다네."

빨래통을 툇마루에 황급히 내려놓고 장독대 쪽으로 내달리는 것은 소례였다. 빨

래 위에 걸쳐 얹은 방망이가 마루로 통, 떨어지더니 떼구루루 토방으로 굴렀다.

옹구네 가슴도 방망이를 따라 굴렀다. 집안이 벌컥 뒤집히는 소동 속에서 옹구

네는, 어떻게 요때를 놓치지 않고 절묘하게 파고들 것인가, 삵괭이 눈으로 노리

면서 발톱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암가에서 안서방네를 낚아챈 것이다.

"근게 인과응보란 거이 꼭 있기는 있능갑서."

말긑에 옹구네가 토를 달았다.

"인과응보라니?"

안서방네가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한 채 도끼눈을 떴다. 마치 이 모든

사단이 옹구네한테서 비롯되기나 한 듯이.

"나 지금 막 우례한테 볼 일 있어 왔다고 안했소잉? 그 봉출이란 놈 말이라우,

가가 수천서방님 자식잉 거 모르느 사람 아매 이 근동에는 없을 거이그만요. 지

어매는 천해서 씨종의 딸년으로 붙백이 노비 노릇을 허지마는 봉출이 아배야 정

쇠가 아닝 거 다 알잖능게비, 그걸 머 누가 말해 줘서 안다요? 눈구녁 바로 백

힌 종자먼 그 눈에 그게 안 뵈이여? 수천서방님허고 봉출이가 머 아조 서로 대

고 찍어 논 것맹이로 탁ㅇ는디? 봉사라먼 또 몰르지만. 그런디도 저럭 자식 말

은 자짜도 안챚음서 큰집이 종놈으로 내비둥게 나 속으로 그래집디다이. 양반으

피는 원래 상놈보다 독헌 거잉가아. 우리 같은 상년의 심정으로는 도대체 짚어

지들 읺등만. 개 뒤야지, 외양간에 마소도 다 지 새끼라먼 눈에다 불을 씨고, 아

새끼 난 암소 조께 봇시오, 그저 그노무 송아치를 기양 이뻐서 이뻐서어 지 셋

바닥으로 귀때기 꼭대기부텀 꼬랑지 끄터리끄장 다아 핥어 주잖능게비. 짐승도

그런디.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이쁘다는디. 어뜨케 사램이, 그것도 양반이, 우리

같은 천골들 천헌 세상을 사시는 것도 아님서, 당신 자식을 안 돌아보시까잉. 암

만 신분이 있다고는 해도. 신분이 머리간디 핏줄보돔 질긴 거잉가아."

"아니 이 예펜네, 오늘은 간뎅이가 퉁퉁 부섰능갑네이?"

"인과응보랄 거이, 틀린 말 아니제. 작은아부지는 양반인디 노비를 봐서 봉출이

를 났고, 만약에 애기씨 뱃속에 춘복이 애기가 섰다먼, 가는 아이고, 가를 가라

고 해야여어 되렌님이라 해야여, 긍게 가아는 신세가 어뜨케 될 거잉고잉? 어매

를 따러가아? 아배를 따러가?"

에라이, 이런 빌어처먹을 노무 예펜네. 철썩. 그 말을 더 못 듣고는 순식간에 번

개불이 번쩍하게 옹구네 뺨따귀를 후려친 안서방네는, 볼따구니를 감싸쥐며 앞

으로 고꾸라지는 옹구네한테 으르렁거린다.

"주뎅이 찢어 놓기 전에 얼릉 나가. 나가고, 다시는 그런 더런 소리 어따 대고

허지 말어. 보자 보자 헝게로 이게. 어디다가 고개를 치키들고 되빤댁임서 되잖

은 소리 쌔왈대능 거여 시방?"

안서방네는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토방에 올라서면서 발을 탕탕, 구르고 손으로

옷을 털어내는 소리가 방망이로 요대기 치는 소리만 하였다. 일부러 옹구네 들

으라고 그러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묻은 더러운 말을 그렇게 다

털어내 버리고 싶은 심정 때문에 그러기도 하였다.

"요망헌 노무 예펜네."

안서방네는 그 말을 잘라 뱉고는 휘잉 바람을 일으키며 안채로 들어갔다. 평소

의 안서방네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흥, 그런다고 깅 거이 아닝 거이

되고 아닝 거이 깅 거이 될 거이냐? 어림없다. 뻗대다가 코 깨지제. 얼떨결에 싸

다귀를 얻어맞은 옹구네는 감싸쥔 뺨이 얼얼하기도 하였지만, 누구라도 보란 듯

이 처연하게 고개를 수그린 채 샘 바닥에 으그대고 앉아 있었다. 억울하고 가련

한 태가 온몸에 역연하도록. 그러다가 침착하게 몸을 일으켜, 벌어진 앞섶을 추

스린 뒤, 몽당산이 치맛자락을 주름까지 눌러 펴 내리고는 솟을대문 바깥으로

나섰다. 어둑발이 깊이 내린 고샅의 검은 길을 허펑지펑 딛으며 원뜸에서 중뜸

으로 내려오고, 적송 구부러진 나무 밑을 돌아 귓결에 대나무 바람 소리 씻기는

모퉁이 지나, 아랫몰로 내려오는 그네의 모가지까지 눈물이 차 오른다. 아랫몰

인월댁네 초가지붕 처마 밑에 호젓한 등잔 불빛이 배어 나오고, 베 짜는 소리가

덜컥 덜커덕 들려왔다. 토닥토닥 옹구네의 힘없는 발걸음 소리가 베 짜는 소리

에 섞여들었다. 어디만큼까지도 따라오던 그 소리가 희미하게 지워지면서 이제

는 들리지 않는 개울가에 이르러, 옹구네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목을 치받고

터지려는 울음을 더는 참기 어려웠던 것이다. 아아, 더러운 년의 인생이로다. 옹

구네는 비로소 울 곳에 이르러, 차갑게 녹는 음 이월의 밤 개울물을 어둡게 구

부려 들여다보며, 흐르는 눈물을 흐르게 둔다. 넘들은 나보고 홰냥년이라고 손구

락질헐랑가 모르지마는, 생떼 같은 자식끄장 둔 년이 넘의 숫총각 따먹으러 밤

마실 댕긴다고 헐랑가는 모르지마는, 사람마동 팔짜 도망은 못헌다는디, 나라고

나를 어쩌겄냐..... 나도 나를 어쩌들 못히여. 헐 수가 없어......나도 열녀라먼 좋겄

다......지둥맹이로 우뚝 서서 밧줄로 끌어댕겨도 외눈 하나 꿈적도 한허는, 그런

열녀라먼 얼매나 좋겄냐.....열녀도 타고나겄제......나는 상년이라 그렁가......상년이

라고 머 어디 다 나 같을라고. 내가 그렇게 타고났을 테지. 옹구 아배 죽고 나

서, 나도 죽었니라, 허고는 죽은 디끼 옹구만 찌고 키움서 논일 댕기고 밭일 댕

기고 손톱이 모지라지게 베 짜고, 끄니 때 배 안 곯고, 그러다가 논도 사고 밭도

사고. 그러자먼 옹구 장개도 보내고 메누리도 딜이고, 그럼서 손자도 보고. 우리

어매 고상했다고, 한 펭상에 애썼다고 따순 밥에 등 따시게 불 때 주는, 그런 늙

은이 되야서 대접받고 펜안히 살 수도 있을 거인다. 나는 왜 그렇게 못 살고 이

런 더럽고 서러운 세상을 살어양가. 이게 무신 꼴이냐. 서방은 아니라도 문서만

없제 지 사내 시앗 보는 일에 중매끄장 스고 댕기니. 사앗? 그러먼 강실이가 시

앗이제 머이여? 말로 치자먼 내가 몬야 살기 시작했잉게 내가 큰마느래고, 지가

나중 들옹게 지가 작은마느래지. 가가 소실이여 긍게. 나이로 바도 그렇고 순서

로 바도 그렇고. 내가 머 헌사램이라고 춘복이도 깜보지마는, 헌 것은 강실이도

마찬가지제. 내가 기죽어 쉭일 것은 한나도 없다. 그런디 나는 지가 품고 자는

남정네한테 지집 딜이게 해 줄라고, 대가리 짜서 모사허고, 일 뀌미고, 맞어 죽

을랑가도 몰름서 호랭이 굴로 들으가서 말 퍼치고. 그러다가 보레기 얻어맞고.

님 뺏기고 따귀 맞고. 님한테도 수모요, 시앗 쪽에다가도 수모다. 님은 너 저만

치 가라고 내치는데, 시앗의 종년은 너 여그 발도 디디지 말라고 후려치니. 도대

체 느그들은 무슨 권세냐. 느그들은 대관절 무슨 권세를 쥐고 있길래 그토록 잣

대밧대 거만하며, 나는 무엇을 못 가졌길래 이 수모와 박대를 받어야만 하는가.

대관절 무얼로 이것들을 다 갚을 수가 있으까. 얼음 섞인 개울물이 어둠 속에서

그래도 돌돌돌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옹구네는 주질러앉은 그대로 얼마를 그냥

물 소리 따라 울었다. 저벅 저벅 저벅. 그때, 개울 위에 걸린 다리를 밟으며 그

림자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매안 마을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옹구네 눈에 비

쳤다. 누구여? 눈물 자국을 손등으로 씻어내며 그네는 눈시울을 모아 그림자를

꼬느어 보았다. 하나는 동저고리에 여리여리한 것이 조금 애젊은 듯하고 한 사

람은 두루마기 자락이 펄럭이는데 나이 좀 수굿해 보였다. 옹구네는 사람 기척

에 퍼질러 울던 것이 민망하고, 이 밤중에 저게 누구인가 싶기도 해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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