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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43)

카지모도 2024. 10. 29.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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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대?"

가까이 다가온 그림자 하나가 원뜸의 깔담살이인 것을 알아보고는 짐짓 그렇게

목청을 냈다. 깔담살이와 함께 오는 사람이 누구인가 궁금했던 것이다. 깔담살이

도 옹구네를 알아본 것 같앗다.

"여가 왜 있당가요?"

"응. 나 집이 가니라고오. 저물었네? 어디 갔다 온디야?"

나이 든 사람은 옹구네 곁을 휙 스쳐 잰 걸음으로 저만치 질러 가고, 깔담살이

는 옹구네한테 붙잡혀 몇 마디 대꾸를 하느라고 뒤쳐졌다.

"저 냥반이 누구냐?"

"광생당 진의원님 아니싱교."

그러먼 그렇제. 옹구네는 손뼉이라도 치고 싶었다.

"진의원님이 왜? 이 밤중에."

"아이고, 나 얼릉 가 바야요. 시방 아무 정신이 없고마는."

"원뜸에 뫼시고 가냐?"

"작은댁 애기씨 때미."

"오오."

어서 가 바라. 옹구네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손짓으로 깔담살이를 놓아 주었

다. 진의원은 남원에서도 괘 큰 한약국을 하는, 몇 년 전에, 진의원보다 나이 반

절 덜 먹은 스물한 살 고리배미 비오리가 각시봉숭아 꽃가지 벙글 때 소실살이

를 하러 들어갔었던, 그 사람이다. 그가 깔담살이를 앞세우고 매안 마을 입구로

막 들어서려 할 때, 안서방네는 효원과 다급하게 마주앉아 있었다. 망설이다 몰

아붙인 숨이 목에 차 더듬거리는 안서방네 입시울이 일그러져, 곧 울음이 비어

져 나올 듯하다. 비죽비죽, 뒤틀린 얼굴이 퍼르르 경련을 일으킨다. 효원은 짐짓

냉담한 낯빛으로 안서방네를 쏘아본다. 콩심이한테 들은 말과 장독대에서 스러

진 강실이 일이 해괴하게 뒤섞여 얽힌 꾸리에, 자칫 제가 먼저 무슨 말을 떼면

여지없이 감겨들 수 있기 대문이었다. 안서방네가 효원의 무릎께로 한치 다가앉

는다.

"저....."

마른 침을 삼킨 안서방네 음성이 갈라진다. 그래도 효원은 할 말이 있느냐고 묻

지 않는다. 때때로 말이 없는 것보다 더 큰 위엄은 없다. 비록 상전이라 하나,

나이로만 치자면 그 몇 배를 먹었다 할 안서방네는 효원의 침묵에 눌려 진땀이

난다. 새아씨가 평소 안서방네한테 경우에 닿지 않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아

랫것인데도 인정 사납게 하지 않아, 오히려 대접을 받는 편이건만, 차마 입이 떨

어지지 않는다. 반상의 지엄한 격차에도 불구하고 효원이 뛰어넘지 못할 세월의

벽을 몇 십년씩이나 쌓아온 안서방네 인생이, 이제부터 벌어질 일을 짐작만 해

도 아찔한 탓이다. 안서방네가 하는 양을 바라보는 효원의 눈살이 꼿꼿해진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것일까 싶은 긴장과, 무슨 말을 들어도 결코 놀라지

않으리라는 다짐이 스스로 곤두선 것이다.

"새아씨."

드디어, 안서방네가 고꾸라지듯 효원을 부른다. 더 밀릴 수 없는 절벽에서 발을

헛딛은 음성이다.

"말을 해."

"예에."

안서방네는 효원의 대꾸가 황감하여 이마를 조아린다. 더듬더듬하면서도 급박하

여 누가 곧 몰아쳐 오는 것처럼 서둘러 쏟는 단서방네 말이 공중에 뜬다.

"하도 말 같잖어서 듣다 말고 귀때기를 후려 쳐 주기는 했는디요, 참, 베락 맞을

말씀으로 만에 하나 천에 하나 그 예펜네 말이 근거가 있는 거이라면, 시방 의

원 뫼시고 진맥헐 때가 아닝가 싶기도 해서요. 전후 수습을 좀 허고 나서 의원

을 뫼세도 뫼세야제, 기양 들이당짱에 혹 무신 망발이나 나먼 어쩌까 허고요. 지

가 이런 말슴 디림서도 당최 송구시러와서. 무신 이런 일이 있으까요. 지 생전에

이런 일을 또...... 그런디요, 저....... 벌세 의원이 당도헐 시간 다 되야 가능게빈디

요...... 허다못해 애기씨를 댁으로라도 뫼세다 노먼 어쩌까요...... 혹시 무신 변이

생게도, 기양 암도 모르게 똑 식구끼리만 앉어서 듣는 거이 어쩔랑가. 아이고,

새아씨. 벌세 당도허겄네요이."

안서방네는 온 정신이 아니게 두서가 없었으나, 애가 잦게 허둥대는 충정은 절

박하고 안타까워서, 기가 막힌 일이었지마. 효원이 오히려 진정을 시켰다.

"지금 해 다 저물고 밤이 벌써 이슥한데, 여태 여기 있던 사람을 거두절미 앞뒷

말 설명도 없이 집으로 내려가라 하면, 인사도 아닐뿐더러 원망을 살 일 아닌가.

가만 좀 잘 생각을 해 보세."

효원은 감정을 일체 드러내지 않았다. 제 마음 급한 것에만 정신이 쏠린 안서방

네는, 효원이 말 듣고 놀랄 것은 미처 챙기지 못한다. 춘복이......춘복이라니. 아

니, 이게 무슨 일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한 번 당한 일이 아니었단 말이냐. 그

럴 리가. 효원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팽이를 치는 것 같았다. 옹구네도 알고, 이

제 안서방네도 아는 일이라면, 아닌게 아니라 온동네가 다 내놓고 떠드는 판에

나만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작년 세안 동짓달에 콩심이란년이 숨넘어가게 말해

준 것이 가슴에 얹혀 생병을 앓고 있는 효원이, 이 뜻밖의, 경악을 할 언질에 억

장이 막혀 정신 수습이 안된다.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

오려고 한다.

"새아씨, 인사보다 망신이 더 무섭지요. 옹구네 그거이 예삿말 허는 것맹이지는

않든디......"

안서방네는 입술이 마르고 숨이 바튼다. 그러나 효원은 처음 안서방네한테 말을

듣기 시작할 때부터 이마를 깊이 찡긴 채, 난데업시 휘몰아오는 바람을 방패로

막으려는 사람같이 가슴을 내밀어 버티고만 있다.

"여그는 칭칭이 어른들이시고, 아랫것들 번다허고, 드나드는 사람 한둘이 아닌디

요......아이고, 지가 기양 발 등에 불 떨어진 것 같어서."

안서방네는 곧 호닥호닥 뛸 것처럼 보였다. 그네는 아까 옹구네 뺨따귀를 올려

붙이고 곧장 안채로 들어왔으나, 그저 뒤안에서 모퉁이에서 안마당으로 서성거

리고만 다닐뿐, 도무지 엄두가 안 나서 입을 벌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

이, 걸음 빠른 깔담살이가 진의원 모시러 떠났다는 말을 듣고도 차마 건넌방으

로 들어가지를 못하였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이 말을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 것인고. 옮기기도 사참하였다. 가닥을 잡을 수가 없었을 뿐 아

니라, 말 꺼냈다 거꾸로 안서방네가 벼락을 맞을 일 또한 겁나지 않을 수 없었

던 것이다. 전에 안서방네 아비는 말한 일이 있었다.

"인자 니가 종의 가시(각시)가 되야서 상전을 뫼시고 살 적으 멩심 하나 해얄

것은, 다른 건 다 몰라도 니가 상전한테 나쁜 소식 전허는 일을 허들 말어얀단

거이다. 피해 부러야 여. 안 좋은 소식 듣고 심정 상허먼 베락은 너한테로 떨어

지고, 매급시 원망 사는 거잉게. 그저 존일, 존 소식을 고허는 거이 좋은 거여."

그런데 지금 그네는 '나쁜 소식' 중에서도 가장 나쁜 소식을 사뢰어야 하는 것이

다. 하지 말으까. 안서방네는 공연히, 안에서 부르지도 않으시는데 물대야를 들

고 큰방으로 들어가 머뭇거리며 정황을 살피었다. 큰방에 눕히어진 강실이는 조

금 깨어나는 기척이 있기는 있었지만 식은 땀이 흥건하여, 율촌댁과 오류골댁이

머리맡에 지켜 앉아 근심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목에 차 이제는 더

미룰 수가 없을 것 같은 순간, 안서방네는 치마를 무릅쓴 심정으로 효원의 건넌

방 문을 열었던 것이다. 안서방네는 입술이 바작바작 타서 안으로 허옇게 말려

들어갔다. 시방 벌세 중뜸 건너 이리 고샅으로 오고 있을랑가도 모르는디. 효원

은 무겁게 눈을 감았다. 안서방네는 기왕에 어쩔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면, 이제라도 할 수 있는 한 망신만큼은 최소한으로 줄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일을 아는 사람은 집안에서 지금 그네와 효원뿐이니, 속된 말로 칼자루를 쥐

고 있는 것은 새아씨 효원이 아닌가. 안서방네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효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골똘히 이마를 수그린 채 침묵을 풀지 않는

다. 이것은 아무래도 예삿일이 아니다. 아닌 밤중에 의원이 곧 올텐데 찬 바람

쏘이며 식은땀 흘리는 사람을 자기네 집으로 가라 한다는 것이, 어른들한테 이

해가 될 성싶지 않았다. 거기다가 기응가지 아까 전갈을 듣고는 놀라서 큰사랑

으로 올라와 이기채와 함께 의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칫하면 오래오래

풀기 어려운 오해를 살는지도 모른다. 눈을 감은 효원은 우선 그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만일 안서방네 말이 사실이 된다면, 더욱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회복할

수도 없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중요한가. 앞의

것은 나 자신이 당할 일이요, 뒤의 것은 저 사람 당허는 일이 될 터인테. 아니,

저 사람만 당허고 말 것인가. 가문이 온통 씻지 못할 오욕을 무릅쓸 것인데. 그

것은 곧 철재한테 멍에를 씌울 것인데. 효원은 다시 처음부터 얽히기 쉬운 명주

올 가리듯이 조목을 짚으며 상황을 짐작해 보고, 한 가닥 한 가닥 행각을 추스

린다. 그리고는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안서방네가 입을 벌리며 효원이 일어서는

것을 올려다본다. 효원은 단호하게 대청마루를 건너 큰방으로 가더니, 율촌댁과

오류골댁 옆에 공손히 앉았다. 그리고 강실이를 내려다본다. 혼곤하게 눈을 감은

강실이의 납청색 회푸른 낯빛은, 말 못할 그 어떤 두려움에 속 깊이 질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여운 사람. 효원은 고개를 돌린다.

"긴하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언데?"

율촌댁이 미간을 모으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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