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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45)

카지모도 2024. 11. 1.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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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진맥

 

"어찌 오시오?"

비오리는 낭창한 치마꼬리를 한쪽으로 휘이 걷어 감으며 일어서서 진의원을 맞

이하였다. 그의 탯거리에는, 한때 그의 소실이었던 흔적과 원망이 아직 다 지워

지지 않은 토라짐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이때쯤은 올 줄 알기나 했던 것처럼

흔연한 기색도 배어났다. 그것은 여러 해 주모 노릇으로 닦이어, 날선 몸의 모서

리가 둥그름해진 흔연함이기도 하리라. 사람의 몸에도 세월이 묻으면, 어느결에

장롱이나 반닫이에 스미는 손때 같은 것이 저절로 눅눅하게 스미어 어리는 것인

지도 모른다. 혹은 마음에도. 비오리는 지금 스물한 살이 아니었다. 진의원은 그

런 비오리를 비스듬히 내리뜬 눈길로 바라보며 방문 앞에 흰 구두를 나란히 벗

어 놓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중절모를 그네한테 건네준다. 그의 머리는

상투를 진작에 잘라 버린 단발이다. 진의원을 따라 들어온 바깥 바람이 등잔불

불꼬리를 훑으며 그을음을 일으키는데, 두루마기 벗는 자락이 다시 펄럭, 불 혓

바닥을 흔든다. 비오리어미는 아랫목에 깔린 이부자리를 황급히 주섬주섬 걷어

한쪽으로 몰아붙이며

"앉으시겨."

엉거주춤 허리를 구부린 채 자리를 권하는데, 조글조글한 낯꽃에 번지는 반가움

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진의원한테 받아 든 중절모를 바람벽의 나무못에 걸고,

두루마기는 횃대에 접어 거는 비오리의 좁으장한 등판에 꼿꼿한 힘살이 일었다.

그런 모녀의 낯빛과 뒷 등에 홀낏 한 번씩 일별을 준 진의원은 무거운 무표정으

로 아랫목에 앉는다.

"저녁은 잡샀능교."

비오리어미가 낯바닥을 진의원 쪽으로 들이밀며 묻는다.

"어디 갔다 인제 옹가? 아이고, 내 궁둥이."

하며 밖에서 한나절이나 놀다 들어오는 어린 손자를 무릎 위에 달랑 올려 앉히

고는 궁둥이를 토닥거리며 어르는 늙은 할미처럼, 비오리어미는 진의원을 호물

호물 흐물어지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때가 언제라고."

진의원은 말끝을 무지른다.

"하이고오, 때 아는 냥반이 이렇게 때 아닌 오밤중에 뜽금없이 여그는 멋 헐라고

외겼다요? 나그네 객지 잠 잘라고 들렀능가아?"

비오리가 홰애 틀어진 눈을 흘긴다. 비오리어미는 그런 딸을 오끔한 눈짓으로

나무라며, 다시 고개를 진의원 쪽으로 돌려 눈두껑을 꿈적꿈적, 참으라고 시늉한

다.

"밤도 짚고 날도 찬디 시방 어디 갔다 오싱기요?"

비오리어미 말에

"머 일부로 고리배미 솔밭 삼거리, 누구 볼라고 오매불망 오솃으께미? 무단히 짐

칫국 몬야 딜이마시다 급체허제."

비오리가 진의원 들으란 듯 어미를 핀잔한다.

"야가 시방 오늘 저녁에 산내끼 고능게비요. 그저 나이 자신 어른이 참으시겨.

반가워서 좋다고 저러능 거잉게. 아이고, 그나저나 어찌 그리 한 번 걸음이 멀어

서 맻 년이나 걸리시요잉? 요렇게. 내가 아조 보고 자와서 눈에 심지가 다 돋았

그마안. 사우 사랑은 장모란디, 이노무 장모는 가마니로 사랑이 열어도 갖다가

쟁일 디가 있어야제에. 아 막 기양 썩어 나가도 줏어갈 사우가 없잉게로오. 항상

날 저물먼 허망허드니, 인자 되얐네. 배깥에는 찬 바람 울어도 이 방에는 기양

춘풍에 훈풍이 그드윽 허그만요. 꽃 피겄소."

비오리어미가 진의원 둘레로 맴이라도 돌 것처럼 들떠서 웃음이 벙싯거리는데,

진의원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고, 비오리는 비오리대로 새초롬히 앉아만 있다.

"어매애, 나 좀 바. 내, 얼릉 나가서 술 한 상 봐 오리다. 둘이 앉어서 이얘기허

겨. 손도 녹이고 요리, 요리 와."

술청으로 어미가 나가자 진의원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나 술 생각 없다. 기양 잘란다고 그래라."

"주막에 손님이 왔는디 술을 안 팔겄소?"

"손님?"

"곱쟁이 장사는 못해도 본전치기나마 술은 팔어야제잉. 요새같이 험헌 세상에 임

자 만났을 때 덤테기 안 씨우먼, 우리맹이로 불쌍헌 인생들이 머얼로 먹고 산다

요? 밑천도 없는디."

가시가 꼬부라지는 비오리 옆눈에 파르스름 원념이 비늘을 일으킨다. 그 비늘이

불빛에 파르르 떨린다. 얄포롬한 그네의 입술에도 푸른 비늘빛이 돋는다.

"네가 원망이 많구나."

진의원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새가 다 물어갔지 그게 여태끄장 남어요? 언지 쩍 일이라고."

"그래도 내가, 아는 집이라고 발길이 이리 닿는 것을 막든 안했다."

"장허시오."

"허어."

"여그사 머 재워 주고 멕에 주는 딩게 누가 무신 소리 못허지요잉. 그 대신 공으

로는 안됭게 산판만 안 틀리먼 나무랠 일 머 있겄소? 안다고 찾어온 손님. 객방

으로 나가시랄 수는 없고. 여그서 지무시기는 허시요만, 나는 어머이랑 저 방으

서 잘랑게."

비오리는 무릎을 짚으며 일어서려 하였다. 기색이 매초롬하다.

"앉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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