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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47)

카지모도 2024. 11. 4.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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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해도 이건 태맥이라......."

그러고는 차마 무어라고 더 덧붙이지 못하면서 겨우

"비장이 몹시 말러서, 제가 보중익기탕을 한 번 써 볼랍니다. 그게 비장을 보허

고 약이 닿을 것 같그만요."

비장이 상허고 마른 것만으로도 강실이가 몸을 지탱하기 이미 어려운 지경에 이

르렀는데, 아이까지 들었으니. 그렇지 않은 사람도 앞앞이 입덧이 다 다른 마당

에, 물 한 모금도 목에 못 넘기며 온 밤을 뜬눈으로 새우기 헤아릴 수 없을 지

경인즉. 어째 어제 아니고 오늘에야 기색하며 쓰러질 것이야. 강실이는 살았다

할까. 죽었다 할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진의원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우루루

루, 검은 하늘이 부서져 무너지며 집채만한 바위 덩어리로, 오류골댁과 기응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그 정수리 빠개지는 소리가 진의원에게도 역력히 들렸다. 아

까부터 온 방안을 수천만의 실날 같은 칼날로 그러며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긴

장과 침묵이 툭, 끊어졌다 칼날들이 쏟아졌다. 미동도 하지 않고 차라리 죽은 듯

누워 있는 강실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본 진의원은, 두 내외한테 하직조차 갖추지

못한 채 우물우물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그의 일은 끝나기도 했으려니와 사

람의 심정 가지고는 그 자리에 더 머물 수가 없는 탓이었다. 일어서는 그에게

오류골댁도 기응도

"살펴 가시라."

는 말마저도 밀어내지 못한다. 먼 길에 왔다가 밤이 깊은 이 시각에 어찌 되짚

어 가겠는가, 여기 누추하지만 유하고 가라는 말은 더더욱. 오직 망연자실, 혼이

나간 잿빛 낯색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뿐. 겨우 밖으로 나와 구두를 챙

겨 신는 진의원의 흰 두루마기 뒷자락이 누가 잡아당기기나 하는 것처럼 얼른

돌아서지지 않았다. 저 지경이 된 연유를 알 수는 없는 일이었으나 그들의 앞에

벌어질 난감 참혹한 일들이 눈에 밟히게 선하여, 그는 어둠 속에서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일. 발걸음을 떼는 그의 귓전에

"진의원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류골댁 사립문간에 지키고 서 있던 안서방네였다. 공연

히 흠칫 놀란 진의원이 어깨를 한 번 부르르 덜며 짐짓 심상한 채

"어어, 춥다."

목소리를 꾸몄다.

"뉘시오?"

"저어, 이리 좀 들왔다 가시랑만요."

안서방네가 솟을대문 쪽으로 두 손을 내밀어 모시는 시늉을 하였다.

"누가?"

"저어...... 새아씨가 의원님 뵈입고 머 조께 여쭐 일 있으시단디요."

"아, 그렁가?"

뜻밖에도 효원이 대문 바깥 한쪽 옆에 나와 서 있는 것을 얼핏 본 진의원은 당

황한 기색을 띠며, 내외하는 자세로 몇 걸음 이만큼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안서

방네가 그러는 진의원한테 낮은 소리로 무어라 이르자 그는 두어 걸음을 더 앞

으로 내디뎠다. 안서방네는 대문 옆의 효원과 이쪽의 진의원 사이에 섰다.

"가실 길이 가찹지 않으실 터인데 여기서 묵어가실 걸 그랬습니다."

효원이 어둠 속에서 말했다. 그 낯빛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올시다."

""제가 긴히 여쭐 말씀이 있어 아까부터 나오시기를 기다렸그만요."

"무슨......"

"누구 시켜서 물을 말도 아니고, 걱정이 돼서."

"머이까요......?"

"진맥허신 이얘기를 들어보려고 그럽니다."

효원이 말끝을 내렸다. 그 음성에서는 대답을 우회하거나 눙칠 수 없는, 대답의

정곡을 꿰뚫어 미리 보고 있는 것 같은 위엄과 절실함이 느껴져, 진의원은 등골

이 찌르르 울렸다. 대답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순간적인 판단을 잘하지

않으면 아차 천 길 낭떠러지로 비끗 발이 미끄러지는 것처럼, 그는 자기도 모르

게 발부리를 안쪽으로 모았다. 피할 수 없는 대답이지만, 말할 수도 없는 대답이

아닌가. 그런데 효원은 어둠 속에 어깨를 버티고 우뚝 서서, 대답하라, 하였다.

그 옆에 선 안서방네는 두 손을 웅크려 맞잡은 채 어깨를 옹송스리고, 진의원은

말문을 못 열었다. 세 사람 사이를 훑고 지나가는 밤바람이 으드드 떨리게 찼다.

진의원은 그 한기에 턱을 떨었다.

"짐작이 있어서 그럽니다. 그 병이 무엇이든 제가 알아야 할 일일 테니 일러 주

십시오?"

"........짐작......이시라니요? 어떤.......?"

"제가 발설할 것이 못됩니다. 허나, 짚이는 바있으니, 그저 진맥 결과만 그대로

말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진의원 머리 속이 핑그르르 맴을 돌았다. 대가의 종부라 하나 아직 나이 젊고

거기다 여자인데도, 나이 훨신 더 먹고 외처 바람 많이 쏘인 남자인 자기가, 어

떻게 거역해 볼 수 없는 엄중함이 자신을 납작히게 눌러, 순간 어지러운 탓이었다.

"비장이 몹시 상해서 보중익기탕 화제를 냈습지요만."

"그러고요?"

"아, 예."

"다른 맥은 없었습니까?"

효원이 자기를 쏘아본다고 진의원은 느꼈다. 자기의 둘레를 에워싸서 옭으며 흉

중을 꼬챙이로 꿰뚫는 것 같은 시선이, 사방 캄캄한 어둠속에서도 촌치의 어긋

남 없이 정통 꽂히는 서슬에 그는

"제가 잘못 짚었는가는 모르겄습니다만."이라고 말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쨌길래요?"

"태맥이라......"

야기가 써늘하게 등줄기를 훑어내리는가 싶더니 살갗에 소름 좁쌀이 쫘악 일어

섰다. 자기가 뱉은 말에 스스로 놀란 것이다. 효원의 어깨도 내려앉았다. 안서방

네는 오히려 오그린 채 움츠리고 있던 목을 번쩍 치켜올리며 효원을 바라보았

다. 무슨 백척간두 단죄의 자리에서 풀려 나기라도 한 사람마냥 힘이 빠져 허청

허청 고샅길을 내려온 진의원은, 못할 일 한 사람이 되어 도무지 그 마음을 쉽

게 추스릴 수가 없었다. 본디도 강단이 있거나 지모가 약빠른 사람이 아니고, 세

류 남아, 흥이 많고 정이 많은데다 마음도 여린 데 있어 모질지 못한 그였으니,

그런 일을 한꺼번에 두 번 겪어, 다리에 힘이 빠졌던 것이다. 아이고, 내가 암만

해도 이 걸음으로 남원은 못 가겄고. 그렇다고 이 판국에 이기채의 사랑으로 들

어 묵을 염은 꿈에도 없는 그가, 뜨내기 나그네처럼 정거장 술막에서 돈 치르고

자고 싶지도 않아, 참 오래간만에 비오리네 주막으로 찾아온 것이다. 제가 나한

테 아마 원망이 깊으리라든가, 한 번 발을 다시 트면 그대로 길이 날 것이라든

가, 그러고는 싶지 않다든가, 그것도 무방하다든가, 그 어떤 가닥도 추리지 않은

채, 그저 남의 일인데 남의 일 같지 않게 자신이 그 복판에 서서 탈진이 되도록

정신을 써 버리고 난 지금, 텅빈 머리 속과 패어 나간 가슴패기를 어디 부드러

운 살에 부리고, 그 살로 온기를 얻어 머리 속 가슴패기를 채워 놓고 싶은 심정

으로, 그는 더 멀리 있는 누구한테로는 못 가고 매안에서 제일 가까이 닿는 비

오리한테 왔으나. 비오리는 비오리대로 제 할말이 응어리 많이 져 울혈되어 있

었고, 진의원은 진의원대로 위로보다 막막함을 술상에서 느끼고 있었다.

"그나저나 어디서 오시는 길이시오?"

나이 차이 스물한 살이나 졌지만 살을 알던 사이라 말은 맞먹는다. 비오리가 긴

사설은 뒤로 미루고, 진의원의 무겁게 질린 낯색을 찬찬히 살피며 묻는다.

"매안에."

"거그는 왜?"

"오류골댁 따님이 중환이드라."

"무신 병이 났간디요? 시집도 안 간 큰애기가 야밤에 남원서부텀 사람 불러오게

아픈 것 보먼 예삿병은 아닝게빈다이?"

"너는 몰라도 된다."

"자고로 병은 자랑허랬다는디 머 무신 병이라서 몰라도 되까잉?"

"별 것 아니라 그렇지."

"내가 무신 세 살 먹은 코흘리게요? 전후 사정 숨넘어가게 다급헝게 이렇게 불

러제키제, 쇠털맹이로 많은 날 다 두고. 훤헌 대낮 다 두고, 멋 헐라고 의원을

부른대? 에지간헝 것은 다들 집이서 약화제 낼 수 있는 냥반들이. 별 것 아닝

거이 아닝게 그렇겄지맹."

비오리는 지난 정월 대보름날 옹구네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 건너 짚고 진의

원을 조이는데, 진의원은 아까 오류골댁에서 맞닥뜨린 촌구맥만으로도 머리터럭

뿌랭이마다 진땀이 맺힐 노릇이었고, 가까스로 그 자리에서 벗어나 덜미 잡혔던

짐승마냥 한숨을 막 돌리려는데. 사립문간에서 안서방네한테 도로 붙잡혀, 솟을

대문 문간의 효원의 앞에 호령보다 더 삼엄한 추궁을 당하고는, 의원의 도리로

그래서는 안되는 비밀을 엉겁결에 발설한 뒤, 한편으로는 가책도 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이제 종갓집 종부가 알어놨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벌어질 일이 금찍

도 하고, 이 어이없는 날벼락에 온 정신이 다 나가 버린 저 부모 내외가 가엾기

도 하고, 강실이 속내는 모르겠으나 수난치 않을 인생이 안쓰러워 마음 허물어

지는 끝이라, 이번에는 비오리가 백 가지 천 가지 만 가지 재주로 물어도 결코

대답에 빠지지 않으리라 결심을 다잡았다. 대답이 곧 제 발 빠지는 늪이었던 것

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 웬 뒤통수인가.

"혹시 애기 섰습디여?"

"으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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