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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46)

카지모도 2024. 11. 2.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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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원이 혀를 찻다. 그러나 그네는 어느새 일어서 버리고 말았다.

"저런 버르쟁이."

다시 진의원이 무어라 하려는데, 방문이 열렸다. 비오리어미가 술상을 개다리 소

반에 보아 막 들고 들어오는 것이다.

"야가, 야가, 야, 너 멋 허고 섰냐? 절 헐라고 그리여?"

방안의 수작을 다 엿들어 알고 있는 그네가 오똑 서 있는 비오리를 나무라며,

딸년의 어깨를 눌러 주질러 앉혔다. 할 수 없이 술상 머리에 앉은 비오리한테

오리 모가지 술병을 안기고는 어미가 눈치 빠르게 제 이부자리를 붇움어 안고

저 방으로 건너가 버리자, 진의원은 술잔을 들었다. 그는 비오리어미의 반색이나

비오리의 앵돌아짐조차도 잊어 버린 듯 아까처럼 무표정으로 무겁게 잔을 들고

만 있었다. 비오리가 얼른 술을 따르지 않은 까닭에 얼마 동안이나 그렇게 잔은

허공에 떠 있었지만, 그것마저 그는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진공에

에워싸여 숨까지 눌리는 압박감이 그의 목을 조이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는 숨

을 죽인 채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비오리의 갈피 갈피 멍울을 이룬

원구와 한탄이 진의원한테로 쏟아지는 대신, 좁은 모가지 하얗게 기다란 술병에

서 꿀룩, 꿀룩, 술이 거꾸로 토해진다. 비오리는 그것이 제 오장 속에 썩도록 고

인 말이라 생각하였고, 진의원은 저도 모르게 귓바퀴에 허연 궤털이 일어섰다.

그 소리가 꼭 아까 짚은 강실이의 맥 뛰는 소리로 들린 탓이었다. 굴룩, 꿀룩,

꿀룩, 꿀룩. 톡, 탁, 톡, 탁 톡, 탁, 톡 탁. 진의원의 등골에 진땀이 돋아났다. 아

이런 일이 있는가. 세상에. 이게 대관절 어쩐 일이란 말인가.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숨이 넘어가게 급헌 걸음으로 쉬도 안허고 달려와서 잘못 짚었능갑

다. 그러지 않고서야 깔담살이란 놈이 어떻게나 잰 걸음으로 재촉을 허는지, 깡

깜헌 밤길에 앞도 안 뵈이는디 긴장을 잔득 허고 와서, 아매 그래서, 내가 아차

잘못 짚었을 수도 있지. 아까 진의원은, 식은땀투성이로 혼곤히 반 정신을 놓아

버린 채 파리한 검불처럼 누워 있는 강실이의 맥을 짚었을 때, 천만 뜻밖에도

복중에 다른 맥이 또 뛰는 태맥이 잡혀, 순간 아찔하면서 뒤꼭지에 벼락이 쪼개

지는 것 같은, 딱, 소리를 들었으니. 하마터면 그는 놀라서 고꾸라질 뻔했었다.

그야말로 그 태맥은 청천벽력,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던 것이다. 하, 이런. 아

니, 이럴 수가. 아니여, 아니여. 가만 있어 봐. 어디, 다시. 그는 양미간을 깊이 패

이게 찡기고는 두 눈을 꾸욱 눌러 감고, 심호흡을 몇 번씩이나 하며 맥을 다시

짚고, 다시 짚고 해 보았다. 그 옆에서 오류골댁과 기응은 마른 침을 바트게 삼

키면서 진의원 손끝만 숨죽이어 바라보고 있었다. 그 긴장이 얼마나 팽팽하였던

지. 그것은 사기가루 갬치 먹인 연실처럼, 방안의 공기를 수천만으로 날카롭게

쪼개어 실날 같은 칼날로 가르는데. 숨만 자칫 잘못 쉬어도, 고개만 까딱 잘못

돌려도, 눈동자만 비뜩 잘못 굴려도, 그 팽팽하게 당겨진 실낱의 예리한 칼날들

이 여지없이 숨을 베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니, 이 어찌 예사로운 일이랴. 신

중에 신중을 거듭하여 몇 백 번 몇 천 번을 고쳐 신중해도 모자라는 엄청난 일

이, 퍼렇게 핏줄 드러난 강실이의 희푸르게 여린 팔목 위, 가지런히 모아 짚은

진의원의 네 손가락 끝 손톱 밑에서, 벌떡, 벌떡, 뛰고 있는데. 이것이 정말이라

면 천지가 개벽을 할 일이요. 만일 착오라면 그 진맥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

아닌가. 태맥이라니. 그것도 다른 누구 아닌 오류골댁 강실이한테. 하, 참으로 요

상허고 괴이헌 일이로다. 계집아이 성장하여 큰애기 되고, 큰애기 나이 차서 남

의 집 부인 되어, 날 가고 달 가면 태중에 어린아이 당연하게 생기는 것. 그것은

저위로 왕후장상의 집안에 금지옥엽 귀한 따님 구슬 같은 뱃속이나, 아래로 오

막살이 장삼이사 무명색의 거친 베옷 한 자락 아래 고달픈 뱃속이나, 고루 공평

하게 나름대로 생명의 정기 일는 일이어서, 그 드러남이 천하에 마땅하지마는.

이것은 도대체 경우가 아닌 경우였다. 중언부언에 그 무슨 첨언이 가당치도 않

은 형상을 정면으로 맞붙들고 앉은 진의원은, 어느새 후들후들 속이 떨리어 말

문을 열지 못하였다. 마른 침이 아교가 되어 들어붙는 말문 대신 이마에 진땀이

배어나는 그를, 오류골댁 내외는 아예 숨을 눌러 꺼 버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내

아무래도 이 말은 차마 못허겄는디. 강실이가 혼인하여 회임한 처지라면 이보다

더 순리로운 진단이 어디 있으리오마는, 아직 시집가지 않은 규중의 숨겨진 쳐

녀로, 그것도 예사 집안 예사 사람 아닌 그네가 이처럼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

을 부모 앞에 발설해야 하는 진의원의 감은 눈이 좀체로 쉽게 떠지지 않았다.

진의원이 어째 강실이를 모를 리 있으랴. 본디 그가 남원에 대물린 생업으로 한

약구구 광생당을 열어 놓고 있으면서도, 인근에서 찾아오는 손님들 못지않게, 아

니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그들에게 보다 더 속마음이 쓰이는 곳이 이곳 매안이

었다. 사람이면 누구라도 그 몸에 병 없는 사람이 없어서, 하다못해 발바닥에 박

힌 티눈에서부터 귀때기와 손가락 발가락 그트머리 얼어터진 동상이나 고뿔에

배앓이를 비롯하여, 몸 안의 보이지 않는 오장육부 곳곳에 자리잡고 틀어앉은

그 많은 병의 갖가지 중상을 도무지 한두 마디 말로는 할 수가 없는 법인데. 몸

아파서 찾아오는 사람은 재물이나 권세를 따로 묻지 않고 살피어 돌봐야 하지마

는, 이 매안 이씨들의 크고 작은 병의 징후에 진의원이 참섭할 때는 매양 조심

이 되었다. 매안에서는 어지간한 속탈이나 짐작할 만한 질환들은 사랑의 약장에

비치된 약재로 화제를 내어 다스리고 했지만, 의원 손을 빌려야만 하는 질병에

는 잠원까지 사람을 보내어 진의원을 부르곤 하였다.

"그 사람이 제 윗대와 달라서 한량끼가 농후하지만, 진맥은 또 과연 진의원이라."

매안 사람들은 말했다. 그의 진맥은 인근에 선성이 높았다. 그래서 환자가 급작

스러운 증세를 보이거나 움직일 수 없는 중환에 시달리며 신음하고 있을 때, 그

는 화급하게 데릴러 온 사람들을 따라 곧잘 왕진을 나서곤 하였다. 밤길에도. 그

러는지라 일찍부터 매안 마을에도 걸음이 잦았으며 자연 이씨 문중 이 집과 저

집의 사람들 모습이나 체질, 성격, 그리고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의 사상과 병력들

을 어지간히 알고 있었다. 기세는 하늘을 찌르며 성품은 대쪽같고, 현조가 분명

하여 그 후손으로서 학덕이 높은데다, 봉제사 접빈객에 촌치도 소홀함이 없는

엄격 후덕으로 좌우 사방 둘레에 '향내나는 양반'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그 고을

들을 이끌어 나가는 매안 이씨 문중에 병상 살피는 일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되

는 일이었다. 그런 연유에서만이랄 수는 없었지만 그는 매안을 오르내릴 때 평

소에도 사람들의 기색이나 행동거지를 무심한 듯 유심히 눈여기어 보아두곤 하

였다. 무릇 병이란 어느 날 어느 시를 예고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예측 못

한 순간에 복병처럼 병처를 찌르고 할퀴며 후려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 닥

치기 전에 미리 그 사람을 세심하게 파악해 두는 것은 훗날 그 사람이 발병했을

때 여러 가지 자료로 긴요하게 작용되었다. 그러니 비록 집안 깊숙이 들어앉아

바깥 출입 안하는 강실이라 할지라도, 오며 가며 오류골댁 사립문간을 지날 때,

그네의 아리잠직 단아하면서도 온화 공순한 자태를 언뜻언뜻 아니 볼 수 없었

고, 아리따운 맵시에 고운 머릿결 검은 윤기 자르르 뒷등으로 흐르는 연두색 저

고리와 연분홍 치마의 애달프게 스미는 빛깔을 아니 볼 수 또한 없었다, 그렇게

눈에 뜨인 모습만으로도 가히 매안 이씨 반가의 단려한 규수 분명한데, 난향같

이 번진 소문은 더욱 그윽하여 그 행실과 자채를 흠앙하는 칭송이 자자했건만.

이것이 대관절 어인 일인가. 그 바라보기 연연하고 꿈속같이 곱던 모습은 흔적

조차 간 곳이 없고, 이토록 창백하게 여위어 손만 대면 그대로 부스러져 버릴

것 같은 재의 형상이 다 된 강실이를, 진의원은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네의 비장은 깊이 상하여 이미 말라 버린 상태였다. 노랗다못해 푸른 빛이 짙은

강실이의 안색에 놀란 진의원이 짚은 손 끝에 그 병맥이 역력하게 잡혀, 그는

그만 혀를 끌끌 찼다. 비장은 보통 비위라 하여 지라와 밥통을 하나로 쳐서 한

묶음으로 분류하였는데, 그 기능이 그만큼 서로 밀접한 때문인즉. 이처럼 비장이

상하였으니, 결코 밥을 제대로 먹었을 리가 없었다. 몸의 한가운데 달린 밥통 뒤

쪽에 둥그스름하면서 납작한 편원형으로 붙은 비장은 겨우 계란알 하나 정도의

크기이지만, 이 작은 주머니가 하는 일은 참으로 막중한 것이었다. 비장 주머니

안쪽 오목한 곳을 비문이라 부르는데 바로 이곳으로 몸 속의 동맥과 정맥이 직

접 들고나며 출입을 했다. 피의 순환을 하는 것이다. 심장에서 나온 피가 전신을

돌며 온몸에 자양을 공급하고, 쓸모없어 걸러진 찌꺼기를 걷어오는 길에, 가장

요긴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비장이었다. 맨 처음 사람이 생길 때, 아직 어

미의 뱃속에 담겨 있는 태생기에 벌써 그 주먹만한 몸에 비장도 같이 생겨 조혈

작용을 하고, 생후에는 슬모없는 피톨을 파괴하여 맑고 비옥한 피를 저장하는

비장. 여기서는 몸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몹쓸 병원체를 물리쳐 부술 저항체

를 동시에 생산하면서, 골수의 조혈 기능을 조절하였으니. 심장이 허약하거나 잘

못된 사람을 치료할 때, 진의원은 막바로 심장에 약을 쓰는 대신 먼저 비장을

다스리고 손보았다. 그것이 순서였다. 그런데 사람이, 생각을 많이 하면 제일 먼

저 상하는 곳이 비장이었다. 그 상한 형태도 여러 가지여서 비장에 습기가 참

비습이 있는가 하면, 약하고 그냥 힘이 없어 무기력한 경우도 있고, 강실이처럼

말라 버린 경우도 있다. 이렇게 비장이 쪼그라들어 마르면 피가 마른다. 피가 마

르면 잠이 안 온다. 자려고 자려고 아무리 뒤척이고 애써도 끝내 잠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은 더욱더 외곬수 한 곬로만 패이게 골똘해지니. 피가 마

르게 잠 못 이룬 아침에 무슨 밥맛이 있으리요. 전혀 먹을 수 없어서 숟가락을

들어올리면 놋내가 나고, 놋내에 비위가 돌려 울컥 숟가락을 밀어내 버리게 된

다. 그러다 다시 밤이 와도 여전히 잠을 못 잔다. 그리고는 온몸의 피가 바작바

작 마르도록 골똘히 오로지 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병. 그것이 곧 상사였다. 상사

가 되면 비장이 마른다. 말하기 쉬워서, 사람 그립다고 죽기까지 하랴, 하지마는

'상사'라는 말이 '생각을 한다'는 것이니, 그 '생각'이 깊으면 비장이 상하고, 비장

이 마르게 상하면 조혈을 제대고 못하는지라 피가 마른다. 피가 마르니 결국은

죽게 되는 것이다. 아아, 무서운 일이다. 생각이, 그리운 사무침이, 사람을 능히

죽게 할 수 있다니. 진의원은 강실이의 맥에서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사를 읽

었다. 그런데다가 태맥까지. 이 무슨 당치않은 맥돌인가, 내가 벌서 늙었는가. 이

럴 리가 없는 일이 분명하여 진의원은, 잘못 헛짚은 것인가 하고 정신을 수습한

뒤 호흠을 정돈하고 침착하게 손가락을 모았다. 그럴 만한 자리에 그럴 만한 사

람한테서라면 모르지만, 하늘이 무섭지. 아니 어찌 내 손 끝에 이런 맥이 잡힌단

말이냐. 이게 누구라고. 이게 어뜬 집안의 어뜬 누구라고. 허 이런. 톡, 탁, 톡,

탁, 톡, 탁. 백 번을 고쳐 짚어 보아도 그것은 태맥이었다. 태아의 맥박이 진의원

손가락 놓인 강실이의 팔목 촌구맥의 촌 관 척, 척맥에서 피할 길 없이 감지되

었다. 척맥은 애기맥이다. 여인이 애기를 가지면,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당장 그

맥이 달라진다. 태아는 아무리 티끌같이 작은 알맹이 하나에 불과할지라도 그의

생명이 있는 까닭이었다. 그 생명은 어미의 핏줄을 따라 같이 뛴다. 톡, 탁, 톡,

탁, 톡, 탁. 애기 안 가진 사람의 맥은 그와 달라서 톡, 톡, 톡, 톡, 톡, 고르고 일

정한 세기로 뛰는 것에 비하여, 아이 가진 맥은 태아의 맥박이 같이 뛰므로 이

중맥이 되어, 한 번은 톡, 강하게 뛰고 한 번은 탁, 약하게 뛰는 것이다. 비록 아

직은 핏덩이도 못되게 미미한 조내이나, 어미를 따라 제 맥을 찾아 뛰는 태아.

어미. 어미라니. 이 어인 일이냐. 강실이를 어떻게 지금 '어미'라고 부를 수가 있

단 말인가. 진의원은 털석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 옴짝없이 갇히

고 만 자신의 처지가 참담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자신의 입시울만 애터지

게 바라보고 있는 오류골댁 내외의 죄 없고 순박한 눈빛을 바로 볼 용기가 나지

않은 진의원이 얼마가 지나도록 괴롭게 이마를 찡기고만 있자, 드디어 더 못 참

은 오류골댁이

"무슨 탈이 났으까요?"

묻고 말았다. 기응의 눈빛도 대답을 채근하였다. 이제 진의원은 더 어쩔 수 없어

오래 오랫동안 괴롭게 진맥을 하고나서, 진땀을 무섭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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