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에미 애비
진의원이 마치 붙잡힐까 두려운 사람처럼 황황히 두루마기 자락을 걷으며 도
망치듯 일어서 나가 버리다, 방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쩍, 소리가 나게 졸아들었
다. 졸아드는 침묵이 소주를 내린다. 거꾸로 뒤집어서 전을 봉하여 덮은 가마솥
뚜껑 꼭지에서 증류로 한 방울식 떨어지는 소주같이, 침묵은 오류골댁과 기응의
정수리로 떨어진다. 그것은 검은 아교였다. 아교는 떨어진 자리에 돌처럼 굳는
다. 굳어 버린 아교가 바위 덩어리보다 무겁다. 무거워 고개를 떨어뜨린 강실이
의 어미와 아비는 목에다 천근 돌로 만든 큰칼 둘러 쓴 죄인들마냥, 짓눌린 어
깨를 웅크린 채, 눈썹 하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손 발끝 머리카락 끝까지도 거멓게 굳어 버린 것 같기도 하였다. 숨조차 쉬지
않았다. 쉴 수가 없었다. 들이쉬는 숨마저도 돌덩어리가 되어 여윈 목에 걸리면
서 캄캄한 폐장 밑바닥으로 덜컥, 덜컥, 떨어지는 까닭이었다. 드디어, 폐장에서
목울대까지 차 오른 돌덩어리와, 졸아드는 큰칼로, 목을 조이며 여지없이 숨을
끊어 버릴 것만 같은 침묵이 컥, 맞부딪치는 순간. 기응은 소리 죽인 단말마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휙 고꾸라질 듯 강실아한테로 쏟아지는가 싶더니,
두 손을 움켜 와락, 그네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아니, 왜 이러시오?"
기겁을 한 오류골댁이 기응의 팔을 나꾸어 잡으며 엉겁결에 따라 일어섰으나 기
응은
"놔."
거칠게 털어냈다. 잡색의 죽은 낯빛으로 사위어 눈 감은 채 미동도 하지 못하던
강실이는, 기응이 틀어쥔 멱살에 숨이 질려, 크, 큭, 삭은 비명 같은 기침을 토하
였다. 그네의 멱살이 허공에 뜬다.
"아 말로 허시요오, 말로."
사태가 어떤 것인지를 어찌 모르리오마는, 제 그림자만도 못한 강실이를 채올려
일으키는 손아귀에 살기가 시퍼렇게 돋아 후둘후둘 떨리는 기응의 모습에 놀란
오류골댁이, 황급한 손짓으로 다시 그를 막으려 했다. 기응은 그네의 팔을 호되
게 쳐냈다. 뼈가 부러졌는가 싶게 아픈 팔을 한 손으로 감싸며 물러앉는 오류골
댁 눈에 기응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던 노기로 앙분하여 터럭 뻗친
짐승처럼, 쥐어잡은 강실이를 갈갈이 찢으려는 것같이 비쳤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힘으로 강실이의 멱을 조이는 기응의 갈퀴손 손 등에 검퍼런 힘줄이 독에
차 불거지고, 검부라기 강실이는 그런 기응의 손목을 무망간에 부여잡았다. 그것
은 본능적인 몸짓이어서 틀어쥔 아비의 손아귀를 떼어 내려는 동작이었겠지만,
너무나도 기진한 손이라 백지장이 얹힌 것이나 다름없었고, 어찌 보면 아비 손
목을 감싸는 시늉으로도 보였다. 심지어는 제 손까지 합하여 아비와 함께 제 목
을 조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고개가 되로 꺾이어 머리채를 떨군 강실이
의 희푸르던 낯빛이 졸린 목에 충혈되면서 가물어지고, 그네의 목줄디에는 바튼
심줄 등걸이 뻗쳐 선다. 크, 큭.
"애 쥑일라고 그러시오? 손 놓고 말로 허라는데 왜."
"말?"
말이라니. 하이구우, 말이라니.
"말로 해서 될 일이여, 이게."
죽어라, 죽어. 죽어어, 이년. 억장이 받쳐 자신의 앙가슴을 쥐어뜯는 대신, 강실
이 멱을 휘잡아 조이며 흔드는 기응의 튀어나온 두 눈이 핏발로 시뻘겋다. 피뭉
치 같다. 그것을 사람의 눈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한순간에 느닷없이 독한 살맞
은 산짐승이나 메도야지가 덩클덩클 붉은 선지를 가슴패기에에서 쏟으며, 온몸
의 갈기를 세우고는 피 젖은 두 앞발을, 잡을 것도 없는 허공으로 쳐들어 울부
짖는 처절함. 온 산이 다 무너져 내리게 울고 울어도 이제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고, 제 복장 터진 창자를 움킨 채, 살 쏜 사람에게 덤비는 증오
와 살기가 무섭게 핏발 진 기응의 눈은, 순후 질박하던 모습을 간 곳 없게 하였
으니. 기응은 제 정신이 아니엇다. 그는 포효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방안의 닥달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 지나가던 누구라도
혹 듣게 된다면, 엎친 데 덮친다는 말로는 비유할 수조차 없는 곤욕이 밀어닥쳐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금니를 으드득, 부서져 갈아지게 악물고는
강실이 멱을 쥐어 흔드는 기응의 손아귀에, 강실이의 몸은 마른 잎 한 장같이
바스라진다. 그네는 이미 죽기로 작정을 한 사람 같았다. 그림자 우묵히 패인 그
네의 눈두덩은 혼이 나가, 한 번 감긴 이대로 다시는 떠질 듯 싶지 않았다. 재같
이 사윈 몸 여윈 목에 나무뿌리 앙상하게 솟구친 것처럼 뻗친 목줄띠만 그네의
뒤로 꺾인 고개를 버치어 주고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살아 있는 사람의 기운이
나 본능적인 저항마저도 없는 모습에, 오류골댁은 그만 덜컥 겁이 났다.
"애 쥑이겄소예. 아 왜 목은 조르고."
더 못 참은 오류골댁이 벌떡 일어나 기응의 손아귀를 강실이 멱살에서 떼어 내
려 했지만, 기응은 한 발로 그네를 걷어차 버린다. 그는 끓어 터지는 분노를 질
정하지 못하여, 금방이라도 강실이를 때려 부수어 박살을 낼 것만 같은 기세로
다르쳤다.
"눈 떠라."
기응이 내리패듯 말했다.
"눈 뜨고 말을 해."
어디서 눈을 감고 있는 거냐. 눈만 감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고, 눈만 감으면 아
무것도 안 보아도 되는 줄 아느냐.
"눈 떠."
그러나 강실이는 눈을 뜨는 대신 꺾인 고개를 모로 돌린다. 눈 감은 눈으로라도
아비의 눈을 피하는 것이리라. 그네의 이마에 시름없이 흩어진 머리올 카락이
헌한에 젖어, 흡사 검은 금 간 것만 같이 보인다.
"어떤 놈이냐."
도끼날을 박는 기응의 추궁에, 기울러진 강실 눈귀에서 습기 같은 눈물이 배어
난다. 그 눈물은 차마 흘러내리지도 못하고 머뭇머뭇 헌저레에 번지더니 그만
후르를 구른다. 힘없는 눈물이다.
"울 일을 왜 해."
울 일을 왜 해. 기응은, 어흐으응, 늑대처럼 오장을 토하여 우는 대신 잡은 멱살
을 치그어 올려 세우더니, 숨이 막혀 끊어지는 강실이를 여지없이 방바닥에 메
다박았다. 그리고는 어푸러진 그네의 창백한 흰 저고리 등판을 주먹으로 내리쳤
다. 퍽. 소리로 무너지는 등판이 가슴 밑창가지 뚫려 빠져 버렸는가. 강실이는
두 팔을 내뻗은 채 움칠도 하지 않았다. 아이고, 아가. 오류골댁이 새노랗게 질
려 얼른 제몸으로 강실이를 덮는데
"비키라."
는 말을 할 겨를도 없이 다시 내리친 주먹을 등판에 맞은 오류골댁은, 으윽, 비
명을 토한다. 엄천난 바위돌이 떨어지는 주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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