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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50)

카지모도 2024. 11. 7.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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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못 나와?"

기응의 눈에 시퍼런 불똥이 튀었다. 핏발에 범벅이 된 불똥은 멍든 자주색으로

엉겨 튀어나오고, 단박에 강실이를 때려 죽일 것만 같은 주먹을 부르쥔 채 치켜

든 팔을 공중에서 떨고 있는 기응의 모습은, 보통때 단 한 번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는 것이었다. 신음소리마저 내지 못하는 강실이의 좁은 등을, 엉거주춤

네 발로 엎드리어 어미몸으로 덮고는, 고개를 틀고 기응을 올려다보며 눈으로

애원하는 오류골댁 모습은 한 마리, 새끼를 감산 어미 개 형국이었다. 그것은 가

련하고 처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기응은 그런 오류골댁을 끄집어 밀어 내동댕

이치고, 다시 한 번 그 주먹을 내리친다. 퍽.

" 말을 해라."

비명도 없이, 혼절한 듯 맞고 있는 강실이를 일으켜 앉힌 기응은 그네의 여윈

어깨를 잡아 흔든다.

"네가 이년, 나를 쥑일 셈이구나. 오냐 일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너는 살 수 있

으며 나는 살 수 있겄냐. 오늘 밤에 너 죽고 나 죽자. 어차피 내가 안 죽이면 문

중이 들고 나서서 온 동네 조리 돌리고 덕석에 말겄지. 안 봐도 뻔헌 일, 나 이

랬소오. 기달렸다가 망신허고 당허느니 쥐도 새도 모르게 이 방안에서 소문 없

이 죽는 게 백 번 낫지, 아이고호, 아이고호, 기가 차서. 아니 이게 웬놈의 벼락."

이란 말이냐, 소리를 소리를 다 맺지 못하고, 기응은 등잔대를 번쩍 들어올렸다.

매패려는 것이다. 그 바람에 등잔대 꼭대기에 얹혀 있던 기름 접시가 방바닥으

로 떨어져 깨지면서, 쏟아진 기름 위에 심지의 불꽃이 후욱 번져, 삽시간에 널룽

널룽 불길이 울랐다. 방안이 화광으로 뒤덮인다. 기함을 한 오류골댁이 강실이가

덮고 있던 이불자락을 채들어 번개같이 불길 위에 던지며 혼비백산 그 위를 밟

고 뛰는데, 기응은 깜깜해진 방안 복판에서 으으으윽. 짐승 소리를 내며 울음을

깨물더니, 빈 등잔대로 바람벽을 후려치고는, 문짝을 박차고 마당으로 뛰쳐 나와

버렸다. 그 바람에, 오류골댁 사립문간 토담결에 바싹 붙어 몸을 숨긴 채 집안

쪽을 유심히 사리고 있던 안서방네가 흠칫 올라 한 발 뒤로 물러 섯다.

"작은댁에 좀 내려가 보고 오게. 누구 눈에 안 띄게 조심해서."

효원이 시키는 말이 아니어도 건넌방에서 물러나오면 그리하려던 안서방네엿던

지라, 새아씨 분부까지 받은 터에 더 망설일 것도 없이 잰 걸음으로 어두운 대

문을 아무도 모르게 빠져 나와, 아까부터 오류공댁 방안의 기척에 그네는 귀를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고샅은 지나는 사람의 발짝소리 끊긴 지 오래인 한밤중

이어서, 시울을 맞댄 지붕과 지붕 아래  지문 덧문들이 어느덧 하나씩 둘씩 불

빛을 거두고, 솔리게 무거운 어둠만 밤의 허리를 넘어 정수리까지 차 오르는데.

오류골댁 장지문만 불길한 주홍으로 물들어 눈드고 있었다. 옹송그리고 서서 숨

죽이고 그 불빛을 바라보던 안서방네 눈에 벌떡 일어서는 기응의 그림자가 시커

멓게 보이더니, 이윽고 강실이를 멱살 잡아 채올리는 모습이며, 그네를 메다박는

그림자, 그리고 주먹을 들어 올려 내리치며 후려패는 정황들이, 말 소리 한 마디

새어 나오지 않을 만큼 소리 없는 가운데 너무나 선명하게 비치었으니. 우뚝 서

서 주먹을 든 기응의 검은 그림자는 주홍의 불빛 베혹 너머 두 눈 부릅뜬 사천

호아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만약에 그네가 종의 신분이 아니었다면 저 안으로

달려 들어가 기응을 부여잡고 말릴 수 있었을까. 이 일은, 그럴 수는 없는 일이

었다. 그러기에 한 방에 있는 어머니 오류골댁조차도 속수무책 어쩌지 못하여,

만류하려고 매달렸다가 채이어 동그라지는 그림자를 안서방네는 애간장이 녹는

눈으로 동동거리며, 다만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꼬. 어쩌고잉.

아이고, 작은아씨. 이 일을 어쩌까요잉. 다른 것은 다 몰라도 하늘 아래 이 일은

그 누구도 어찌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이 일을 문중에서 알게 된다면,지

금 이렇게 부모한테 맞는 것을 결코 모질다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몰매를 맞

고, 조리를 돌리고, 마을에서 쫓겨나야만 할 것이다. 강실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기응도 오류골댁도 동네에 남아 얼굴 들고 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 아닌가. 매

안의 향약에

""부모에게 불손한 자.""형제끼리 싸우는 자." "가정의 도리가 어지러운 자."

를 모두 조목조목 밝히어 극벌에 처한다 하였지만, 그 극상벌 중에서도 무섭게

준엄했던 것은 행실에 관한 것이었으니.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예의를 모르고 풍속을 문란하게 하는 자."

는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 중에 첫재는 유부녀를 겁간, 간통하는 자였으며,

둘재는 수절하는 과부를 유혹, 위협하여 절개를 지키지 못하게 하는 자요. 셋째

는 상민으로서 양반을 업신여기고 욕되게 하는 자였다. 그리고 다음은 젊은 사

람으로서 마을의 어른을 욕되게 하는 자였고, 도 일가친척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는 자를 엄벌하였다. 그리고

"간음한 자." "행실이 부정하여 마을의 기풍을 더럽히는 자."

를 모두 혹독할 정도로 삼엄하게 다스렸다. 이 사람들은 모두 향약에 정한 극벌

을 받았으며, 마을에서 엄격하게 소외시켜,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쓰는 우물물

을 길어가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불씨도 빌려 쓰지 못하게 하였고, 말도 서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고치지 않는 자는 영구히 마을에서 좇아내 근처에는 얼

씬거리지도 못하게 하였다. 조리를 돌리고, 심지어는 덧석말이 몰매를 치다가 과

하여 그만 죽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세절목들을 다 합하여 뭉친다 하

더라도 지금 강실이가 당한 참절 비절 하나만 할 것이냐. 아녀자의 몸가짐이란

출가한 여인도 남 보는 데서 남편과 상없이 마주보고 웃으면 흉이 되는 법인데,

설령 범절이 서릿발 같은 집안 아니라 한들, 세상의 상리가 어디 시집도 안 간

큰애기가 아이 배어, 그랬노라, 할 수가 있단 말이가. 과연. 입에 담기도 해괴하

고 듣기에도 부끄러운 일 아니리오. 하찮은 목숨 함부로 뒹구는 길가의 버들이

나 담 밑의 꽃인 노류장화로서, 아무나 지나는 손마다 만지고 꺾는 계집이라면

혹 모르겠거니와, 그에 견주기조차 외람되고 차마 못할 바가이 작은아씨, 애기

씨. 서슬 푸른 매안 이씨 문중의 종가에 빙옥 같아야 할 지친이, 이 무슨 망측한

망행을 저지른 것이랴. 드러나면 날벼락이 천지를 맞부딪쳐 부싯돌을 칠 것이요.

그 가운데 강실이가 살아 남기 어려운 것은 불속을 들여다보듯 자명한 일이었

다. 구구한 말이 차라리 구차한 이 마당에, 당사 본인 하나 망신하고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온 문중이, 인근은 물론이고 세상사람들로부터

"저 집안이 저러하다."

비덕, 비도로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니. 저 한 몸 잘못 가누어 이와 같은 참악

지경에 이르럿으면, 마땅히 그 본인은 칼을 물고 자결을 하거나, 목을 매어 죽거

나, 욕되고 죄 많은 목숨을 부끄러이 끊는 것이 오직 당연할 뿐이고, 부모 또한

그와 같은 자녀를 살려 두어서는 안될 일이리라. 아무리 종의 아낙으로서 신분

이 낮다 하지만, 본데 있는 가문의 추상 같은 상전을 모시고 한평생의 뼈를 바

치며 일거수 일투족 조심스럽게 헤아려 살아온 안서방네가 그만한 경우를 짐작

못하겠는가. 그러나, 그래서 그네의 가슴은 더욱 오그라지게 조여들고, 애가 타

서 입술이 바작바작 마르는 것이었다. 그네는 사립문간에 남모르게 숨어서 오류

골댁을 지켜보면서도, 행여 누구 지나가다가 불빛 비치는 주홍의 창호지 덧문에

벌어지는 검은 그림자의 형국을 보아 버리면 어찌하나,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말소리 한 토막도 여기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들리는 것보다 더 역력하게 방

안 정경이 눈에 보이는 탓이었다. 그러다가, 기응이 강실이를 내려치는, 퍽 소리

만큼은 안서방네한테도 들려 그만 저도 모르게 가슴을 쿡, 오그리고, 오그리고

하였는데, 별안간 그림자가 기우둥 흔들리더니만 덧문의 불빛이 출렁하면서 순

식간에 선홍으로 화악 일어나다가 황급히 새까맣게 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는 장작개비라도 거칠게 내던져 패대기치는 듯한 소리가 바락을 꽈당, 울리면

서, 기응이 문짝을 박차고 뛰쳐 나온 것이다. 기응은 덫에 가슴을 치어 짓이겨진

짐승처럼, 우우우웅. 터지려는 울음을 꼭 안에다 틀어 넣으며, 사립문간 살구나

무 검은 둥치를 붙움켜 글어안고는. 어우우웅. 머리를 부딪드리었다. 어둠 속에

먹진 피가 어둠보다 더 짙은 먹빛으로 튈 것만 같은 몸부림으로 울음을 삼킨 채

으깨어지도록 나무 둥치에 머리를 부딪고 부딪뜨리는 기응의 모습은, 감히 엿보

는 것이 참람할 만큼 참혹하였다. 차마 그 자리에 더 서 있지 못하고 안서방네

는 자리를 떴다. 하늘도 무심허고, 천지신명도 무심허시제. 인자 어찌 살고. 인자

다들 어찌 사실랑고. 어찌헐 거잉고. 떨어뜨리면 발등 깨지는 쇳덩어리 무겁게

아슬아슬 붙들어 움켜안고 자갈밭 가는 사람처럼, 안서방네는 두 팔을 깍지 끼

어 가슴을 붙움킨 채 비척비척 종택의 행랑으로 올라가는데. 전주에 일이 있어

출타하였다가 밤 늦어서야 매안으로 돌아온 기표가, 이기채의 사랑에 들러 몇

가지 숙의할 것들을 서로 말하고는 이제 수천댁으로 내려가려 막 솟을대문을 나

서고 있었다. 아무리 어두워도 그를 못 알아 볼 안서방네가 아닌지라 황망히 허

리를 굽혀, 이제 가시느냐는 표시를 하자 기표는 의하다는 듯

"어디 갔다 오는고?"물었다.

"예에."

당황한 아서방네는 허리를 더욱 깊이 굽히며 별일 아니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나 기표의 눈빛은 안서방네를 차갑게 훑어내렸다.

"예에라니. 예를 갔다 온단 말인가?"

"아니, 저 그냥. 마실 조께."

"누구한테?"

"예에, 예, 저........아랫몰 앵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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