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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1권 (5)

4 인사불성하고 앓고 이교리가 청심환 한 개에 기운이 통하고 가미삼금탕 몇 첩 에 대세가 돌리어서 그날로 드나드는 사람을 알아볼 뿐이 아니라 사람을 보면 머리를 들썩거리며 ‘미안하다’, ‘감사하다’ 말하게 되었다. 며칠동안 이교리가 병을 조리하는 중에 주인집의 일을 자연히 많이 알게 되었 으니 주인의 성명이 양주삼인 것과 봉단이가 주인의 무남독녀로 지금 나이가 18 세인 것도 알았고, 주인의 아우 주팔이가 의약뿐이 아니라 문식이 있는 까닭에 근처 양민들이 백정환자라고 별명지어 부른다는 것과 주인의 처질 돌이가 성이 임가요, 돌이의 아버지가 고원 가서 장가든 까닭에 결찌끼리 고원댁이라고 택호 로 부른다는 것도 알았다. 이교리가 자기는 서울사는 김대건이란 사람으로 어느 대가에서 하인 노릇하다 가 애매히 죄명..

임꺽정 1권 (4)

제 4장 이교리의 안신 1 그 처녀는 분홍 모시 적삼에 청베 치마를 입었는데 적삼은 낡아서 군데군데 미어졌고 치마는 승새가 굵어서 어레미집 같으니 구차한 집 처자인 것이 분명 하고, 또 빨래하는 손을 보더라도 살이 희기는 희나 결이 곱지 못하고 마디가 굵으니 험한 일을 하는 표적이 드러난다. ‘저런 처자에게 장가를 들고 시골 구 석에 묻히어 지냈더면 이런 죽을 고생도 아니할 것이지.’ 이교리는 팔자 한탄 하다가 자기의 한숨 소리에 처녀가 혹 돌아볼까 생각하여 방망이 소리가 그칠 때에는 한숨을 땅이 꺼지도록 크게 쉬었다. 그 처녀는 방망이질을 그치면 비비 고 쥐어짜고 또다시 방망이질을 시작하고 한숨 쉬는 사람이 가까이 있는 것은 아는것 같지도 아니하였다. 이교리가 처녀에게 말을 불이고 싶으나 혹 무악을 볼..

임꺽정 1권 (3)

5 그날 밤 초저녁에 주인이 관솔과 불씨를 가지고 이교리의 방문 앞으로 와서 봉당 위에 화톳불을 놓으며 “여보시오, 어두운 방에서 혼자 무얼 하시오?” 봉 당으로 내다보며 “이리 들어오게. 내가 머리가 아파서 일어나기가 싫네.” 목소 리가지 전같이 웅장하게 들리지 아니한다. 주인은 “대단히 불편하신가 보오.” 하면서 불 붙은 관솔 한 가지를 손에 들고 방안으로 들어와서 등잔에 불을 당기 고 관솔을 든 채로 이교리에게 가까이 와서 그 얼굴에 불을 비추고 들여다보니 상기된 것이 환하게 보인다. “병환이 나셨소그려.” “아니 감기 기운이 좀 있 는 것 같이. 이 사람 관솔을 끄고 거기 좀 앉게. 할 말이 있네.” “나도 할 말 이 있소. 그러나 말할 기운이 있겠소?” “그럼, 감기쯤 들었다고 말할 기운까지 없..

임꺽정 1권 (2)

제 3장 이교리 도망 1 그날 삭불이가 한씨와 마주 앉아서 이교리 살릴 계획을 서로 이야기하는데 한 씨 말이 “야, 이교리가 화를 당할 길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약, 하나는 장하에 물고 또 혹은 처참을 당할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배소에서 죽거나 서울 로 압상되어 와서 죽거나 두가지는 틀림없을 것이니까 이것을 구할 작정이면 역 시 두 가지 방법을 차려야 한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오늘부터라도 정원 소 식을 잘 탐지합시다. 상감인지 땡감인지 어느 때 그 소위 전교란 것을 내릴지 모르니까. 그래 탐지해 가지고 사약이거든 삼현령 역마보다 빨리 가는 말을 타 고 도사 앞질러 가서 살짝 빼돌리고 압상이거든 오는 길목에 동무 한 십여 명 붙었다가 집어칩시다그려.” 삭불이는 말을 할 때 몸과 손을 가만히 두..

임꺽정 1권 (1)

임꺽정 1권 홍명희 머리 말씀 자, 임꺽정이의 이야기를 붓으로 쓰기 시작하겠습니다. 쓴다 쓴다 하고 질감스 럽게 쓰지 않고 끌어오던 이야기를 지금부터야 쓰기 시작합니다. 각설, 명종대왕 시절에 경기도 양주땅 백정의 아들 임꺽정이란 장사가 있어... 이야기 시초를 이렇게 멋없이 꺼내는 것은 이왕에 유명한 소설권이나 보아두 었던 보람이 아닙니다. 수호지 지은 사람처럼 일백 단팔마왕이 묻힌 복마전을 어림없이 파젖히는 엄청난 재주는 없을망정 삼국지같이 천하대세 합구필분이요, 분구필합이라고 별로 신통할 것 없는 말씀이야 이야기 머리에 무슨 말을 얹을 까, 달리 말하면, 곧 이야기 시초를 어떻게 꺼낼까 두고두고 많이 생각하였습니 다. 십여 세 아이 적부터 이야기듣기, 소설보기를 좋아하던 것과 삼십지년 할 일 이 많..

'임꺽정' 낱말사전

임꺽정 (낱말해설) ㄱ 가래다 : 옮으니 그르니 하며 따지고 들다.“그 사람 심성이 너무 우악스러워서 우리두 잘 개재지 못하우.” (의형제편 3) 가리 : 소 갈비를 식용으로 일컫는 말. “아침에 가래를 많이 먹었더니 속이 진 건해서 점심을 먹구 싶은 생각이 없소.” (의형제편 2) 가리들다 : 가리틀다. 잘 되어 가는 일을 안 되도록 틀다. 남의 횡재에 무리하게 한 몫을 청하다. “부장 나리가 대장덕에 가서 지휘를 물어가지구 오실 테니... 만일 우변 사람이 알게 되지 못하게 가리를 들기가 쉬우니 알리지 않도록 하라 구 하십니다...” (화적편 2) 가망청배 : 굿할 때 신을 청하여 내리는 절차. 가무리다 : 가뭇없이 먹어버리거나 후무리다. 남이 모르게 숨기다. 서림이가 물 건을 받고도 물목을 자기 손..

타나토노트 (90,完) -베르나르 베르베르-

301. 대단원 우리는 여전히 빛의 산 앞에 있다. 어떤 천사도 로즈와 아망딘과 빌랭과 나를 변호해 주려 하지 않는다. 천사들은 모두 차분한 빛을 발하고 있다. 자기들의 결정이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나타내려는 것 같다. '하지만 나중에, 수천 년쯤 되는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다른 깨달은이들이 이곳에 나타날 겁니다. 그때 가면 관광객 따위는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진짜 깨달은이들이 되겠지요. 우리는 그들에게 당신들의 모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당신들의 행적을 더듬게 될 것입니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말을 잇는다. 실낱같은 위안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오디세우스'나 '성서' 같은 것을 써줄 것이다. 라울의 생각이 옳았다...

1월 아침과 최한배님 (0,0,3,3)

-잡설- ***동우*** 2012.01.14. 내가 겪는 감기몸살은 유별나고 지독하다. 그 발톱에 움켜 쥐이면 그냥 꿈쩍을 못한다. 새벽에 터져나오는 기침은 내장까지 쏟아낼 듯 요란하다. 듣는 사람으로서는 사뭇 고통일 것이다. 늘 그렇지만 백약이 무효, 기침귀신은 스스로 지겨울때쯤 되어야 슬몃 물러나게 마련이다. 나이 들수록 그 자심함은 강도를 더한다. 필경 나의 사망진단서에는 호흡기질환 어쩌구 적힐 것이다. 빈방 이불속 파묻혀 끙끙 앓았다. 앓는 동안 나의 통속, 자기연민은 안개처럼 피어 올라 영혼을 적셨다. 방금 모니터로 책 한권을 읽었다. 부끄러움과 공감과 감동에 젖어 읽었지만 내 감정모체의 진실은 부러움일 것이다. 생각과 꿈과 의지. 단호함과 너그러움과 지혜로움. 한목숨이 한세상 살아내는 방식에 ..

내 것/잡설들 2022.08.06

살고자 하는 생명 1.2.3 (0,0,3,3)

-잡설- 1 ***동우*** 2008. 9. 24 출간된지 오래인 우찌무라 간죠의 ‘기독교문답’을 읽으려고 책장에서 꺼내어 펼쳐 들었다. 그런데 활자가 눈에 들어오기도 전 책갈피 사이에 묻어 있던 먼지 알갱이 하나 꼬물꼬물한 움직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마이크론 단위를 겨우 벗어난 작디작은 벌레(책벌레?) 한 마리. 아무 생각없이 검지를 눌러 꼬물거리는 먼지 알갱이를 압살해 버린다. 그 먼지같은 주검의 부피같은 것도 있을리 없어 그 존재의 흔적은 한 점 희미한 얼룩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 벌레는 생존을 위하여 손톱보다 작은 종이 한 조각이면 족할듯 하고, 그것을 지워 버리는데는 0.01g의 가압(加壓)이면 충분하다. 0.01g 손가락 놀림의 행위 따위는 일상중 지극히 심상(尋常)한 행동인지라 마음에 둘..

내 것/잡설들 2022.07.19

작지만 확실한 행복 -무라카미 하루키-

작지만 확실한 행복 -무라카미 하루키- 신수정(문학 평론가) 일상을 견디는 방법, 삶의 미학화 '삶에 대한 여유'와 '소년다운 장난기'가 묻어나는 하루키식 인생미학이 작품은 '작가 하루키' 이전의 '인간 하루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주는 매력적인 에세이로,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반짝이는 '삶의 미학'을 발견, 새로운 형태의 '행복'을 창조할 줄 아는 하루키만의 고유한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작가' 이전의 '인간' 하루키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 무라카미 하루키. 이미 이 고유명사는 한 사람의 일본 작가를 가리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가 하나의 보통명사로 굳어 버린 감이 없지 않다. [상실의 시대]를 비롯,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태엽 감는 새]에 이르기까지 하루키가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