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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 夜 (4)

1971년 즈음 써클. (크리스마스 주제로 글쓰기) -이상헌- 성탄절 전야. 그 도시에는 바다가 있었다. 역전(驛前)의 도심(都心). 밤은 시나브로 무르익어 간다. 번잡한 거리를 조금만 비껴 올라가면 엉크러진 뒷골목이다. 남자는 역사를 빠져 나오자 중늙은이 여인에 잡혀 팔을 낚아 끄는 대로 허적허적 골목을 들어섰다. 홈스팡 외투의 깃을 올려 목을 파묻고 목발을 짚고 절룩이며 걷는 중년의 남자는 성가시지만 방기하는듯한 몸짓으로 펨프 여인이 이끄는대로 따랐을 뿐이다. 골목안 옥호도 어지러운 집들의 유리창 너머 불그레한 전등불 밑, 희미하게 떠오르는 뱀딸기같은 여인들의 벗어 올린 넓적다리에 남자는 도시 관심이 없었고, 그래서 약이 오른 펨프여인은 골목 한켠에 있는 허름한 비어홀에다 남자를 밀어넣고 중얼거리며 ..

내 것/잡설들 2022.03.21

뷰리플 썬데이 (4)

1971년 24세 즈음. 주간한국 꽁트 응모, 낙선. -이상헌- 그 날 일요일 아침 그 다방 안은 왜 그렇게 북적거렸는지. 나름 대로들 레-저의 무장을 갖춘 선남 선녀들의 즐거움에 겨운 떠들썩함이 그득하였고 스피커는 헤이- 헤이- 뷰리풀 선데이를 악써 외쳐대고 있었다. 그 곳에서. 장대가 비죽이 솟아 오른 낚시꾸러미를 옆에 놓고 영어사전을 뒤적이고 있는, 첫 눈에도 어딘가 촌티가 흐르는 안경 낀 녀석이 선객으로 앉아있는 좌석에, 여드름자국이 벌건 얼굴에다 빨간 등산모를 비스듬히 재껴 쓴 녀석이, 미안하다고 말은 하지만 기실 당연하게 권하는 레지아가씨의 합석 권유에 의해서 마주 앉게 된 것은 전혀 우연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낚시 가시는군요.” “네. 그 쪽은 등산이로군요.” “네. P산을 오를 겁니..

내 것/잡설들 2022.03.21

어떤 종말(4)

1964년 고교3년 동아고 교지 “靑泉” 9호에 게재 -이상헌- “여보게, 한 잔 안할텐가?” 다섯시 퇴근 종이 땡 치자마자 옆자리의 尹씨가 크게 소리친다. “안 할라네.” 이게 언제나 하는 金선생의 대답이다. “이 사람아, 늙으막에 돈은 모아서 어데다 쓸텐가? 구두쇠짓 그만하고 한번 가세나.” 매일 듣는 말이다. “예끼! 이 사람, 말직 공무원으로 자네처럼 헤프게 썼다간 입에 거미줄치기 제 격이지.” 金선생은 불끈 한마디 쏘아 본다.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지.” 할수없다는 듯이 尹씨가 돌아선다. “녀석아, 나는 너하고는 종류가 틀린 사람이란 말이다.” 金선생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기실 金선생은 선생대로의 안으로 안으로만 뭉쳐 둔 보람이 있었다. 젊었을 때부터 선생의 취미란 오직 화초가꾸기였던 것이..

내 것/잡설들 2022.03.21

흙에 스미는 AB형의 피는 30%짜리 사랑이다. (4)

1962년, 고교2년때 잡서(雜書) 이상헌 형은 나를 보고 미친 놈이라고 한다. 엄마는 나를 보고 불쌍한 놈이라고 한다. 나는 내가 미첬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형의 말대로 미친 놈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엄마는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불쌍하다는 날 놔두고 엄마가 죽어 간다. 엄마가 죽어 간다. 그래서 이 미친 머리로 무언가를 생각해 보려 애를 쓰는데 영 무얼 생각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허허한 공간에 텅 걸려있는 그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순도 100%짜리 사랑....... 순도 100%짜리 사랑으로 완벽하게 결합될수 있는 인간관계...... 남자와 여자가 벌거벗은채 붙어있을 때? 어쩌면 그게 진짜 순도 100%짜리 완전한 결합일지도 모른다. 아..

내 것/잡설들 2022.03.21

태양의 제물들 (4)

1962년 고교 1년 동아고 교지 “靑泉” 7호에 게재 -이상헌- “이 새끼야! 왜 때리는거야! 애비애미도 없는 알부랑패 놈아!” 다시 터져 나오는 주인집 딸 순희의 악다구니가 철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다. “이 년이? 애비 애미도 없는 알부랑패라구? 어디 한번 죽어 봐라. 이 년!” 철은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 이제는 끝인 것이다. 식당 뽀이 노릇도 오늘로서 작별인 것이다. 죽도록 얻어 맞은 순희는 눈이 퉁퉁 부어 올라서 연신 고함만 처대고 있었다. “부모 없는 고아새끼! 나가서 거럭질이나 할 것이지. 남의 집 고용사는 주제에 나를 때려? 이 놈아! 이 놈!” 이 때 뒷문이 썩 열리면서 대머리 주인의 우락부락한 얼굴이 나타났다. 철은 자기가 어떻게 맞았는 줄도 몰랐다. 머리,어깨, 팔다리에 무딘 감각만을..

내 것/잡설들 2022.03.21

밤열차 (4)

1961년 중3때 중동 중학교 교지 “中東” 게재(揭載) 이상헌 粉伊는 초조하게 P시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골역 대합실의 밤2시는 고즈넉하게 쓸쓸하기만 하였다. 좁은 대합실 안에는 粉伊 외에 아무도 눈에 뜨이지 않는다. 粉伊는 말할수 없이 불안하다. 두렵다. 기차를 타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기차를 탄다....도회지로 간다... 이것은 여태 산골짝을 한발자욱 벗어나 본적이 없는 粉伊로서는 실로 커다란 모험이 아닐수 없었다. 粉伊는 두려움을 잊기 위하여 자꾸만 6개월전 산골을 떠난 남편을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남편의 모습이 떠 오른다. “앗따! 예편네 좀 보소. 돈 벌라고 도회지 가는 서방한테 와 이래 질질 짜쌓노? 짜지 마라. 고마. 자. 돌아 아부지 돈 많이 벌어 오꾸마.” 남편은 세..

내 것/잡설들 2022.03.21

애창곡 잡설 1.2.3.4.5 (1,4,3,3)

-잡설- -1- ***동우*** 2012. 12. 18. 1. 12월, 온 나라가 대선 열풍에 함몰되어 들썩였다. 그 결과 박근혜가 승리하여 대한민국 제 1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어떤 이들은 강개(慷慨)하고 어떤 이들은 작약(雀躍)한다. 무릇 인간사, 정치나 민주주의만이 만능(萬能)은 아니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위대한 아이디어중 ‘민주주의’는 14위라고 하고 '음악’은 인간이 고안해 낸 것 중 네번째로 훌륭한 것이라고 하더라. 선거도 끝나고 이제 세밑이다. 이제 거대담론으로 혹사했던 목청 가다듬고 개별로들 돌아가자. 정치는 새정부에 맡기고. 그것이 국민건강에 좋고 필경 그럴 것이다. 세밑이다. 노래방에 가서 십팔번 노래 한곡조씩 뽑아 보자꾸나. 제 곡조에 제가 한번 취해 보자..

내 것/잡설들 2022.01.30

기형도의 시를 읽다 1.2 (1,4,3,3,1)

-독서 리뷰- -前- ***동우*** 2013.01.26. 01:18 커피향을 맡을 줄 아는 코와 커피맛을 음미할줄 아는 혀. 그리고 커피제조가 능숙한 손, 커피, 스스로 차려 스스로의 입에다 대령하는 성찬(盛饌)의 한 잔. 그에게 인생 어디, 작은 몫이라도 허툴손가. 스스로 만들어 꾸려나가는 자기 앞의 생. 그 감성이 기형도의 詩 '바람은 그대 쪽으로'를 내게 보낸다. ++++ ♣ 바람은 그대 쪽으로 ♣ -기형도-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靈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소리가 그..

내 것/잡설들 2022.01.13

<R/B> 아우라지 가는 길 -김원일-

아우라지 가는 길 김원일 1. 그늘 속의 사람들 밤이 깊다. 바깥 날씨가 차갑다, 센바람에 창틀 유리가 떤다. 인희엄마의 숨소리가 커진다. 내 옷을 벗기는 그네의 손길이 바쁘다. 나는 알몸이 된다. 인희엄마가 내 위로 몸을 싣는다. 나는 고개를 젖힌다. 잠든 인희 쪽을 본다. 깜깜하다. 인희의 숨소리가 고르다. '뭘 봐? 한잠 들었다니깐.' 내 귓바퀴에 인희엄마가 입김을 뿜는다. 인희엄마의 머리카락이 내 입술에 붙는다. 나는 인희엄마의 화장 내음을 맡는다. 어젯 밤과 내음이 다르다. 어젯밤엔 레몬 냄새가 났다. 오늘 밤은 쑥내음이다. 식물의 잎사귀 뒤쪽마다 약 1백만 개의 공기 구멍이 있어. 그 공기 구멍으로 식물은 향기를 내뿜는다. 그 방향이 바로 산소야. 산소가 대기를 채워. 은은한 향기에서 강한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