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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1권 (15)

6 봉단의 일행이 서울서 도착한 뒤 달포 동안 이승지 집 안팎 하인들 사이에는 봉단의 근본을 들추는 뒷공론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주인영감 을 꺼리어서 겉으로 대접하나 겉대접 대신에 뒷공론이 말 아니게 심하였다. “정수리에 감쪽을 붙인 꼴이라니 천생 시골 백정의 딸이야” “입은 옷 꼬락 서니라니 보병것이나마 제도가 되었어야지” “그 삼촌 명색을 보지, 시골 백정 놈 주제에 조카딸 자세하고 점잔빼는 꼴이라니 눈이 시어 못 보겠어” “백정의 딸년더러 마님이라고 부르자니 작년에 먹은 올벼 송편이 되살아 올라올 지경이 야. 도망이라도 해야지, 이 집에서 못살아” 달포 지난 뒤에 뒷공론이 조금 변하 였다. “감쪽을 떼고 머리를 쪽지니까 이쁘장스럽던데. 그렇지만 아무래도 시골 백 정의 딸이라 태가 나..

임꺽정 1권 (14)

2 이교리가 승소비전의 급한 길이라 감영에서 감사를 만나 하룻밤을 지낸 외에 는 별로 지체없이 역마다 역마를 갈아타고 함흥을 떠난 지 십여 일 만에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교리가 홍화문 안에 들어와서 우선 거접할 곳을 전날 관 주인의 집으로 정하고, 친족과 친구에게 기별하여 입을 관복과 부릴 하인과 탈 말을 빌려온 뒤 예궐하여 숙배하고 유순, 김수동 이하 시임재상과 박원종, 성희 안 이하 정국공신들에게 문후하고 그 외에 친척 고구를 심방하였다. 이리하여 이교리가 분주히 몇 날을 지내는 동안에 재생한 사람으로 대접도 잘 받았거니와 백정의 사위 노릇하던 이야기를 싫도록 되풀이 아니하지 못하였다. 이 며칠 동 안에 이교리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반정 당시의 자세한 이야기를 얻어듣게 되었다. 첫째 반정할..

임꺽정 1권 (13)

10 돌이는 게으름뱅이 김서방이 이급제 나리로 변한 데 대하여 공연히 심정이 사 나웠다. 엊그제까지 여보 저보 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나리 마님이니 나리 아씨 니 말하기가 맘에 창피하였다. 저의 고모가 비루먹은 개같이 구박하던 김서방을 칙사같이 대접하는 것도 맘에 우스웠다. 이급제가 오던 때는 수선한 틈에 슬그 머니 나갔었고 저녁밥은 들어와 먹었으나 먹고 난 뒤 또 슬그머니 나갔다가 밤 늦게 들어왔다. 그리하여 이때껏 이급제와 대면하지 아니하였다. 주팔이가 아침밥을 먹은 뒤에 돌이를 보고 “나리 매부가 대접 잘 하디?” 하 고 웃으며 물으니 돌이는 “대접이고 주발이고 누가 보기나 했습디까?” 하고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옆에 있던 주삼이가 “그러면 네가 생전에 아니 볼 터이 냐? 친남매같이 지내는 봉단이가 ..

임꺽정 1권 (12)

7 “와료!” 소리가 나고 교군이 마당 중간에 놓이며 교군 안에서 이급제가 나 왔다. 이급제가 마당에 서서 우선 주삼의 내외를 향하여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다음에 관 하인들을 돌아보며 ‘수고하였다. 빨리들 들어가거라’ 말을 이르는 데, 그 동안에 주삼의 안해는 안방에 들어가서 일변 방을 치우며 새 자리를 내 서 깔고, 주삼이는 어찌할 줄을 몰라서 손을 맞비비며 공연히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고, 돌이는 수선 틈에 어디로 가버리고, 봉단이는 머릿방에 들어앉아 나 오지 아니하였다. 이급제가 관 하인을 돌려보내고 잠깐 동안 마당에 서성거린즉, 안방에 있는 주삼의 안해가 그 남편을 내다보며 “여보, 무엇하오? 이리 들어오 시라지 못하오?” 인도 아니한다고 나무라니 주삼이가 이급제 앞에 가까이 와서 “안방으로 들어..

임꺽정 1권 (11)

4 등촉이 휘황한 함흥 동헌에 관원 두 사람이 나란히 같이 앉았다. 한 사람은 원인 줄 알려니와 한 사람은 누구인가 묻지 않아도 문 밖에서 어리대던 김서방 이다. 원이 ‘전 교리 이장곤이 밖에서 기다린다’ 고 쓰인 종이쪽을 보고 일변 의관을 정돈하며 일변 이교리 나으리를 인도하라고 수통인을 내보냈었다. 수통 인이 나갔다 들어와서 “이교리 나으리가 아니 계십디다.” 말하니까 원이 괴상 히 생각하여 사령을 불러서 종이쪽의 출처를 묻고 이교리 나으리가 어디 계신가 알아들이라고 분부하였었다. 사령이 나와서 쪼그리고 앉았던 김서방을 보고 “ 이교리 나으리가 어디 계시어?” 뻣뻣하게 묻다가 내가 이교리노라고 나서는 김 서방을 보고 사령은 어찌 놀랐던지 한참 동안 말구멍이 막히도록 기가 질렸다. 나중에 잠깐만 기다리..

임꺽정 1권 (10)

6 이튿날 아침때 주팔이가 형의 집에 와서 보니 윗방 아랫방 할것 없이 방문은 모두 닫히었고 잡안이 괴괴하여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윗방 문을 열어본즉 형은 없고 형수가 포대기 같은 처네 쪽을 덮고 누웠다가 문 여는 소리에 놀라 일어나 며 “아재요? 잘 왔소. 어젯방을 반짝 새우고 하도 곤하기에 눈을 좀 붙이고 아 재에게 가려고 했더니 마침 잘 왔소. 이리 들어와 이야기 좀 들으시오.” 하고 처네를 치운다. 주팔이가 밖에 서서 “형님은 어디 가셨소?” 물으니 그 형수는 “아니 글쎄 들어와 이야기를 들으시라니까 그러오.” 방으로 들어오라고 재촉 하여 주팔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 형수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제 봉단이가 냇가에 있는 것을 불러 보내셨다지? 집에 와서 저녁밥 먹기 까지는 천연스럽게 별말 없..

임꺽정 1권 (9)

3 김서방이 봉단의 옆으로 와서 너무 가까이 붙어 앉으려고 하니 봉단이는 말이 없이 몸을 움직이어 조금 사이를 비키었다. 김서방이 면구스러울 만큼 봉단의 얼굴을 들여보다가 “하룻밤 새 환형이 되었구려. 이리 좀 누우.” 하며 자기의 무릎 아래를 가리키니 봉단은 잠깐 머리를 흔들어 싫다는 뜻을 보이고 입을 열 어 나직한 목소리로 “장독이나 없으세요?” 물으며 양미간을 곱게 주름잡는다. 김서방은 장독이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여보, 내가 말씨를 조 심 아니해서 그런 봉변을 한 것이 아니오. 동고리만 받고 다른 말이 없이 가라 기에 그대로 오려다가 남이 주는 쌀도 가지고 오지 못했다고 장모에게 구박받을 것이 생각나서 쌀 말을 하였었소. 말을 하나마도 쌀을 주지 않느냐고 넌지시 하 인에게 물어보았..

임꺽정 1권 (8)

6 김서방이 주삼의 안해에게 잔생이 곤욕을 당하고는 뒤를 따라올 용기가 없어 졌다.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섰다가 길 옆 풀밭에 주저 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긴 한숨을 쉬기도 하고 멀리 가는 주삼의 내외를 바라보며 쓴입맛을 다시기도 하였 다. 그러나 김서방은 열번 고쳐 내쫓긴다 하여도 갈 데는 주삼의 집뿐이라 무슨 별 생각이 있었으랴. 봉단이를 가서 보고 전후 사정을 이야기해야겠다, 또 주팔 이를 만나보고 신세 조처를 의논해야겠다, 이리 생각하고 몸을 일어서 주삼의 내외를 멀찍이 따라왔다. 주삼의 집에서 활 두서너 바탕이 착실히 되는 곳까지 주팔이가 나오다가 형과 형수를 만나게 되었다. 주팔이는 마침 형의 집에를 왔다가 혼자 울기만 하고 있 는 봉단에게 대강 사정을 듣고 향굣말을 향하여 오던 것이다. “형님 ..

임꺽정 1권 (7)

2 김서방 내외가 자려고 누워서 겉잠도 채 들지 아니하였을 때 횃불빛이 창에 비치며 삽작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김서방이 “화적인가?” 의심하며 일어나려 고 하니 그 안해가 “가만히 누워 계세요. ” 남편을 말리고 “우리 집에 무슨 화적이 들겠소. ” 하고 자기부터 천연하게 누워 있다. 조금 있더니 삽작문을 열 어젖히는 소리가 나고 뒤미처 안방문 앞에서 두런두런 사람의 말소리가 났다. 봉단이는 그제야 비로소 일어나서 벗어놓았던 치마를 찾아 입은 뒤에 창문을 바 스스 반쯤 열고 내다보더니 “고원댁 오빠요?” 소리를 높여 물으며 바깥으로 나가고 김서방은 ‘돌이가 어째 밤중에 왔노?’ 의심하며 그대로 누워 있었다. 돌이의 목소리가 들리고 또 장모와 장인의 말소리가 들리고 얼마 있다가 여러 사람의 신발소리가 나..

임꺽정 1권 (6)

7 주팔이가 형수와 같이 방으로 들어와서 봉단을 보고 “아까와 좀 어떠냐?” 물으니까 봉단이는 말이 없고 주삼이가 “앓는 소리를 아니하니 그만한 것 같 다.” 하고 대신 대답하였다. 주팔이는 형수를 돌아보며 “죽 쑤어 버린 효험이 당장에 났습니다그려. 그렇지만 김서방의 맹세만은 못하리다. 김서방의 말을 좀 자세히 들려주시지요. ” 봉단의 어머니가 김서방이 맹세치며 하던 말을 다소간 보태어 옮기었다. 봉단 이는 스르르 눈을 감고 혼곤히 잠이 든 것같이 누웠더니 혼인날인 칠석날 아침 해가 높이 돋았을 때, 씻은 듯 부신 듯 일어났다. “대사를 받은 날에 지내게 되니 불행중 다행이다.” “네년의 덕에 잠 못자 고 눈이 아파 죽겠다. ” 기뻐하는 부모를 대할 때는 봉단의 얼굴에 미안히 여 기는 기색이 많았으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