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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부활 (23) -톨스토이-

23 표트르 게라시모비치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재판장은 배심원 협의실에서 돌아오자 선고문을 읽어나갔다. 188X년 4월 28일, 황제 폐하의 칙령을 받들어 N지방 재판소 형사부는 배심원 여러분의 결의에 따라 형법 제 771조 제 3항 제 776조, 제 777조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선고한다. 농민 시몬 카르틴킨(33세)과 평민 예카테리나 마슬로바(27세)에 대하여 이 양인은 형법 제 28조를 적용하여 공민권과 일체의 재산권을 박탈하고 카르틴킨은 8년, 마슬로바는 4년의 징역에 처한다. 평민 예브피미야 보치코바(43세)는 형법 제49조에 의거하여 공사의 특권 일체를 박탈하고, 3년간 금고형에 처한다. 본건에 관한 재판 비용은 등분하여 피고들에게 부담시키기로 한다. 단, 그들에게 그 능력이 없을 경우에는 ..

<R/B> 부활 (22) -톨스토이-

22 드디어 진술을 끝낸 재판장은 점잖게 자문 질의서를 집어 앞으로 가까이 나온 배심원장에게 건네 주었다. 배심원들은 마침내 퇴정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무엇이 부끄러운지 몸둘 바를 몰라하며 줄줄이 뒤이어 배심원실로 갔다. 그들 뒤로 문이 닫히자, 헌병 하나가 그 문에 다가서서 칼집에서 군도를 빼어 어깨에 세우고 문 옆에 보초를 섰다. 판사들도 모두 퇴정했고, 피고들도 끌려나갔다. 배심원들은 배심원실로 돌아오자마자 아까처럼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법정의 자기 자리에 앉았을 동안 모두들 뭔지 모르게 느끼고 있던 부자연스럽고 어색했던 태도는 배심원 협의실에 들어가 담배에 불을 붙이기 시작하자 씻은 듯이 사라졌고,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여자에겐 ..

<R/B> 부활 (21) -톨스토이-

21 피고들의 최후 진술이 끝난 후, 자문 질의 사항의 제출 형식에 관해서 당사자간의 협의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며, 그것이 결정되자 재판장이 요약된 사건을 개진했다. 사건을 개진하기에 앞서 그는 분명하고 거침없는 말투로 배심원들에게, 강도는 강도이며, 절도는 절도이고, 폐쇄된 장소에서의 약탈은 폐쇄된 장소에서의 약탈이며, 개방된 장소에서의 약탈은 개방된 장소에서의 약탈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 설명을 하면서 특히 그는 자주 네플류도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 사람이야말로 자기가 말하는 중대한 사실을 이해하고 동료들에게 이해시켜 주리라는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배심원 일동이 충분히 이 사실을 납득했다고 짐작했는지 이번에는 또 다른 사실을 부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R/B> 부활 (20) -톨스토이-

20 증거물 검사가 끝나자, 재판관은 심리의 종료를 선언한 뒤, 한시바삐 마무리짓고 싶은 심정에서 휴정 시간도 없어 검사의 논고를 지시했다. 검사보도 인간인 이상 담배도 피우고 싶을 것이며, 또 여러 사람의 사정도 알아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검사보는 자기 자신에게도, 또 남에게도 동정을 베풀지는 않았다. 검사보는 천성이 우둔한데다가 불행하게도 중학교를 졸업할 때 금메달을 탄 외에도 대학에서는 로마법에 규정된 용역권에 관한 논문으로 상을 받기도 해서 형편 없이 자만하고 오만했다. 거기에다 여자 문제에도 성공해서 더욱 그렇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그는 형편 없는 바보가 되어 버렸다. 자기에게 논고가 허용되었을 때, 그는 벌떡 일어서서 금몰로 수놓은 제복에 짐짓 의젓한 태도를 보이면서, 두 손..

<R/B> 부활 (19) -톨스토이-

19 공교롭게도 재판은 오래 끌었다. 증인들과 감정인에 대한 개별 심문이 끝나고 노상 거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검사보와 변호인들의 쓸데없는 질문도 끝나자, 재판장은 배심원들에게 증거물을 검사하도록 제의했다. 증거물이란 아마도 굵은 둘째손가락에 끼고 있었으리라고 여겨지는 커다란 꽃무늬 다이아몬드 반지와 독약을 분석한 시험관이었다. 증거물은 하나같이 봉인되어 조그마한 딱지가 붙어 있었다. 배심원들이 그 증거물을 검사하려고 할 때 검사보가 다시 일어나서, 증거물을 검사하기 전에 의사의 검시 보고를 낭독하도록 요구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사건을 처리해서 그 스위스 여자인 가정 교사한테로 가고 싶었던 재판장은 그런 서류의 낭독은 지루하기만 할 뿐 아니라 식사 시간을 지연시키는 결과밖에는 아무 효과도 없다는 것..

<R/B> 부활 (18) -톨스토이-

18 이튿날 멋지게 차려입은 쾌활한 센보크가 네플류도프를 찾아 고모네 집에 왔다. 그는 우아하고 친절하며 괘활하면서도 싹싹한데다가, 특히 드미트리에 대한 깊은 우정을 보임으로써 고모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의 원만한 성품은 고모들의 마음에 들었지만, 너무나 과장이 심했으므로 도리어 고모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그는 가끔 이 집에 찾아오는 눈먼 걸인에게 1루블을 주기도 하고 하인들에게 팁으로 15루블을 던져 주기도 했다. 또 소피야 이바노브나의 애완용 강아지 슈제트카가 그 앞에서 다리를 다쳐 피를 흘리자, 그 개에게 붕대를 감아 주겠다고 나서더니 그 자리에서 냉큼 가장자리에 수가 놓인 고급 무명 손수건(소피야 이바노브나는 그런 손수건은 한 다스에 15루블이 넘는다고 말하였다.)을 쭉 찢어 슈제트카에게 매어..

<R/B> 부활 (17) -톨스토이-

17 이윽고 초저녁이 지나고 밤이 되었다. 의사도 침실로 들어갔다. 고모들도 잘 준비를 했다. 네플류도프는 마트료나 파블로브나가 고모의 침실에 가 있으므로 하녀방에는 지금 카추샤 혼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현관 계단으로 나왔다. 바깥은 캄캄하고 습기가 찼으며 안온했다. 마지막 녹아가는 봄의 잔설 때문에 더욱 피어오르는 봄의 흰 안개가 공중에 가득 차 있었다. 집에서 백 보쯤 떨어진 낭떠러지 밑을 흐르고 있는 시내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얼음이 깨지는 소리였다. 네플류도프는 입구 계단을 내려가서 물웅덩이를 건너 조각조각 얼어붙은 눈을 밟고 하녀방 창가로 다가갔다. 심장은 두 귀를 내리치듯 맹렬히 고동치고, 호흡은 끊겼는가 하면 갑자기 무거운 한숨으로 터져나왔다. 하녀방에는 조그마한 ..

<R/B> 부활 (16) -톨스토이-

16 성당에서 돌아오자 네플류도프는 고모들과 함께 금식을 끝낸 다음, 연대에서 익힌 습관에 따라 화주와 포도주를 마신 뒤 방으로 돌아와 옷을 입은 채로 잠이 들었다. 그러다 그는 노크 소리에 잠이 깼다. 그 노크 소리가 카추샤의 것임을 깨닫고 그는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났다. "카추샤야? 들어와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녀는 살며시 문을 열었다. "식사하러 나오시랍니다."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역시 같은 흰옷을 입고 있었으나 그 빨간 리본은 머리에 없었다. 네플류도프의 눈을 흘깃 보고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무슨 반가운 소식을 전할 때처럼 갑자기 빛나 보였다. "곧 가지." 그는 대답하면서 머리를 빗기 위하여 빗을 집어들었다. 그녀는 잠시 동안 주춤거리고 서 있었다. 그는 그녀..

<R/B> 부활 (15) -톨스토이-

15 네플류도프에게 있어 일생을 통해 가장 빛나고 강렬한 추어그이 하나가 그때의 새벽 미사였다. 군데군데 눈 때문에 훤하게 비치는 캄캄한 밤길의 물웅덩이 속을 철버덕거리면서 네플류도프는 성당으로 갔다. 교회 주위에 있는 흐린 불빛들을 보자 귀를 쫑긋거리기 시작한 말을 몰면서 그가 교회 안으로 들어셨을 때 이미 미사는 시작되고 있었다. 농부들은 네플류도프가 마리야 이바노브나의 조카임을 알자 마른 땅으로 인도하여 말에서 내리게 하고 말을 끌어다 매는 수고까지 하면서 성당 안으로 안내했다. 성당은 축제 기분에 들뜬 군중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오른편에는 남자 농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노인네들은 집에서 짠 띠가 달린 긴 소매옷에다 인피 짚신을 신고 때묻지 않은 하얀 각반을 두르고 있었고, 젊은이들은 새 나사 외..

<R/B> 부활 (14) -톨스토이-

14 네플류도프가 고모네 집에 들르게 된 것은 그들의 영지가 전방의 자기 연대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거소가, 고모들이 부디 꼭 한 번 들러 달라고 간청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 자신이 한 번 더 카추샤를 만나고 싶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어쩌면 이 때 이미 마음속 깊숙이 그에게 야수적 욕정이 꿈틀거리고 있어서 카추샤에 대한 이런 좋지 못한 의도를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뚜렷이 의식하지는 못했다. 그저 예전에 즐거운 나날을 보냈던 곳에 들러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포근한 애정과 칭찬의 분위기 속에 그를 감싸 주고 좀 익살맞긴 하지만 선량한 고모들도 만나고 그지없이 즐거운 추억을 남겨 준 귀여운 카추샤도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는 3월 말, 성 금요일(부활절 금요일을 말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