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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부활 (3) -톨스토이-

3 먼 길을 걸어오느라고 완전히 지쳐버린 마슬로바가 호송병들과 같이 지방 재판소 건물 가까이 이르렀을 무렵, 때마침 그녀를 유혹하여 타락의 길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자 대모의 조카인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네플류도프 공작은 아직도 자기 집에서 보료가 깔린 폭신폭신하고 두툼한 스프링이 아주 좋고 높직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는 앞가슴에다 주름이 잘 잡힌 깨끗한 흰 리넨 잠옷 깃을 펼친 채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고 있었다. 그는 무심히 허공을 바라보면서 오늘 해야 할 일과 전날에 있었던 일들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부호이고 사회적 명망이 높은 코르차긴 일가의 딸과 결혼하리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일과, 그 집에서 지낸 간밤의 일을 곰곰 생각하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 탄 담배 꽁초를 내던졌다. 그리고는 ..

<R/B> 부활 (2) -톨스토이-

2 여죄수 카추샤 마슬로바의 과거는 지극히 평범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예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시골에서 살고 있는 두 자매 지주의 소유인 영지에서 일하고 있는 농노의 딸이었다. 결혼도 못한 이 여자는 남편도 없는 처지이면서도 해마다 아기를 낳았다. 그런데 보통 시골에서 그러하듯이 영세만은 받게 했다. 그러나 바라지도 않았는데 생긴 필요 없는 자식이라 해서, 또 일에 방해나 되는 자식이라 해서 젖을 통 먹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내 굶어 죽곤 했다. 다섯 명의 어린애가 이렇게 해서 죽었다. 모두 영세는 받았으나 젖을 먹이지 않았기 때문에 굶어 죽고 말았다. 그러던 중에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어떤 집시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번째 아기는 계집아이였다. 이 아이도 똑같은 운명에 빠질 뻔했으나, 때마..

<R/B> 부활 (1) -톨스토이-

부활 (1) 톨스토이 이철 譯 제1부 1 아무리 많은 사람이 조그마한 땅덩어리인 지구 어느 한구석에 몰려서 일부러 기름진 땅을 못 쓰게 하려고 해도, 또 땅 위에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게 돌을 깔아 덮어 씌운다 해도, 또한 그 돌 틈새로 비집고 싹트는 풀을 깡그리 뽑아 버린다 해도, 아니면 석탄이나 석유의 매연으로 그 땅 위의 공기를 탁하게 오염시킨다 해도, 그러고도 모자라 온갖 나무를 모조리 잘라내고 거기 깃들인 새나 짐승을 샅샅이 찾아낸다 해도-북적거리는 도시 한복판에서도 역시 봄은 봄일 수밖에 없다. 싹튼 초목이 정말 송두리째 뽑혀 버리지 않는 곳이면 햇볕이 따사로이 비쳐서, 가로수 옆 잔디밭이 있는 좁은 길은 물론 보도에 깔린 포석 사이사이에 파릇파릇 싹이 돋아 마냥 푸르렀다. 자작나무와 포플러..

<R/B> 탁류 (78, 完) -채만식-

계봉이도 형의 어깨 너머로 내다보고, 그러나 불빛이 희미해서 피차에 얼굴의 변화는 세 사람이 다 같이 알아보지 못했다. 승재는 둘레둘레 망설이고 섰다가 그로서는 좀 대담하리만큼 대뜰로 해서 마루로 성큼 올라선다. 건넌방의 아우 형제는 시방 승재가 그리로 들어올 줄 기다리고 있는데, 승재는 마루에서 잠깐 머뭇거리더니 쿵쿵 발소리를 내면서 안방께로 가고 있다. 계봉이도 의아했지만, 초봉이는 숙였던 고개를 번쩍 소스라치게 놀라서, “아이머니 저이가!” 하면서 기색할 듯 목소리를 짓누른다. 그러나, 승재는 벌써 미닫이를 뒤로 닫고 들어갔고, 계봉이는 비로소 번개같이 머리에 떠오르는게 있어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형더러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우루루 마루로 달려나간다. 초봉이는 일순간의 격동 끝에 어깨를 추욱 처트리..

<R/B> 탁류 (77) -채만식-

맷돌을 내려치는 바람에 초봉이는 중심을 놓치고 앞으로 형보의 시체 위에 가서 꼬꾸라질 뻔하다가 겨우 몸을 가눈다. 몸을 고쳐 가진 초봉이는 또다시 맷돌을 안아 올리려고 허리를 꾸부리다가, 피 밴 형보의 가슴을 보고서 그대로 멈춘다. 맷돌에 으끄러진 가슴에서 엷은 메리야스 위로 자리 넓게 피가 배어 오른다. 팔을 쭉 편 손끝이 바르르 보일락말락하게 떨다가 만다. 초봉이가 만일 그것까지 보았다면 아직도 설죽은 것으로 알고서 옳다꾸나 다시 무슨 거조를 냈겠는데, 실상은 잡아 놓은 쇠고기에서 쥐가 노는 것과 다름없는 생명 아닌 경련이었었다. 뒤로 고개를 발딱 젖힌 입 한쪽 귀퉁이에서 검붉은 피가 가느다랗게 한 줄기 흐른다. 초봉이는 굽혔던 허리를 펴면서, “휘유.” 깊이 한숨을 내쉰다. 피의 암시로 하여 다시 ..

<R/B> 탁류 (76) -체만식-

이윽고 형보는 초봉이게로 힐끔 눈을 흘기고는, “배라먹을 것! 사람 귀가 따가워…….” 씹어 뱉으면서 아이를 저 자던 자리에다가 내던져 버린다. “이잇 천하에!” 초봉이는 아드득 한마디 부르짖으면서 새끼 샘에 성난 암펌같이 사납게 달려들다가 마침 돌아서는 형보를, 되는 대로 아랫배를 겨누어 꿰어지라고 발길로 내지른다. 역시 암펌같이 모진 그리고 날쌘 일격이었으나, 실상 겨누던 배가 아니고 어디껜지 발바닥이 칵 막히는데 저편에서는 의외에도 모질게 어이쿠 소리와 연달아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우디고 뱅뱅 두어 바퀴 맴을 돌다가 그대로 나가동그라진다. 엇나간 겨냥이 도리어 좋게 당처를 들이 찼던 것이고 당한 형보로 보면 불의의 습격이라 도시에 피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방바닥에 나가동그라진 형보는 두 손으로 ..

<R/B> 탁류 (75) -채만식-

이것이 일시 절망되던 자살이 서광을 발견한 경위다. 독단이요, 운산(運算)은 맞았는데 답(答)은 안 맞는 산술이다. 아마 식(式)이 틀린 모양이었었다. 계집의 좁은 소견이라 하겠으나, 그건 남이 옆에서 보고 하는 소리요, 당자는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턱도 없고 상관도 없이 그 답을 가지고서 곧장 제이단으로 넘어 들어간 지 이미 오래다. 오늘 아침에 산술을 풀었는데 시방은 저녁이요, 벌써 사약으로 ×××까지 샀으니 말이다. 물론 이 ×××이라는 약품이 형보의 목숨을 (초봉이 제 자신이 자살하는 데 쓰일 긴한 도구인 형보의 그 목숨을) 처치하기에는 그리 적당치 못한 것인 줄이야 초봉이도 잘 안다. 형보를 굳히자면 사실 분량이 극히 적어서 저 몰래 먹이기가 편해야 하고, 그러하고도 효과는 적실하고 빨리 나타나..

<R/B> 탁류 (74) -채만식-

계봉이는 정녕코 형 초봉이가 죽었거니, 이 짐작이다. “아이! 어서 좀 들어가 보세유! 안에서 야단이 났나 베유!” 계봉이는 식모가 하는 소리는 집어내던지듯 우당퉁탕 어느새 대문간을 한걸음에 안마당으로 뛰어든다. 뛰어드는데 그런데 또 의외다. “언니!” 어떻게도 반갑던지, 고만 눈물이 쏟아지면서 엎드러지듯 건넌방으로 쫓아 들어간다. 꼭 죽어 누웠으려니 했던 형이, 저렇게 머리 곱게 빗고 새옷 깨끗이 입고, 열어 논 건넌방 앞문 문지방을 짚고 나서지를 않느냔 말이다. 또 송희도 아랫목 한편으로 뉜 채, 고이 자고 있고……. “왜? 누가 어쨌나요” 승재는 계봉이의 뒤를 따라 들어가다가 말고, 잠깐 거기 모여 섰는 사람들더러 뉘게라 없이 떼어놓고 묻던 것이다. 계봉이와 마찬가지로 승재도 초봉이에게 대한 불길한..

<R/B> 탁류 (73) -채만식-

“그건 좀 박절하잖나! 동기간에…….” “딴청을 하네! 동기간의 정은 또 다른 거 아니우? 미워해두 동기간의 정은 있는 거구, 남의 집 아이면은 정은 없어두 이뻐할 순 있는 것이구…….” “그럼 그 앤…… 머, 이름이 송희” “응, 송희…… 송흰 내가 이뻐두 허구, 정두 들었구, 두 가지루 다아…… 그러니깐 글쎄 그걸 알구서, 언니가 그 앨 날만 믿구, 자기는 죽는다는 거 아니우” “허어!” 승재는 새삼스럽게 감동을 하면서, 우두커니 섰다가 혼자 말하듯, “쯧쯧!…… 그래, 필경은 그 애를, 자식을 위해선 내 생명까지두 아깝덜 않다! 목숨을 버려 가면서라두 자식을! 응, 응…… 거 원, 모성애라께 그렇게두 철두철미하구 골똘하단 말인가!” “우리 언닌 사정이 특수하기두 하지만, 그런데 참…….” 계봉이는 ..

<R/B> 탁류 (72) -채만식-

“정말이우” “아냐, 아냐. 오해하지 말라구, 해해.” “내, 시방이라두 집에 가서 언니 보내 주리까” “아냐! 난 계봉이가 무어래나 보느라구 그랬어.” “이거 봐요, 남서방!…… 머 이건 내가 괜히 지덕을 쓰는 것두 아니구 아주 진정으루 하는 말인데…… 난 죄꼼두 거리낄라 말구서 그렇게 해요!…… 언닌 아직까지 남서방을 못 잊는 게 분명하니깐 남서방두 언니한테 옛 맘이 남았거들랑 다 그렇게 하는 게 좋아요…… 머 아무 걱정두 할라 말구서…….” “아니래두 자꾸만!” “글쎄, 아니구 무어구는 두구 봐야 하지만, 아무튼지 내 이야긴 참고삼아서라두 들어 봐요, 응…… 난 왜 그런고 허니 ‘오올 오어 낫싱’, 전부가 아니믄 전무(全無), 응? 사랑을 전부 차지하지 못하느니 조각은 그것마저두 일없다는 거,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