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시앗 세월이 묵은 담 모양으로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는 장독대는 마당보다 두어 단이나 높다. 자잘하고 반드러운 돌자갈을 쌓아 도도록이 채운 장독대에 즐비한 독아지와 항아리, 단지들이 기우는 석양의 붉은 빛을 받아 서글프고 정갈하게 타오른다. 여름날이었다면 이런 시간, 장독대를 에워싸고 피어나는 맨드라미의 선홍색 꽃벼슬이며, 흰 무리, 다홍 무리 봉숭아꽃들, 그리고 옥잠화의 흰 비녀가 주황에 물들 것이지만, 분꽃의 꽃분홍과 흰 꽃들도 저만큼 저녁을 알리며 소담하고 은성하게 피어날 것이지만. 지금은 꽃씨가 숨은 껍질이 땅 속에 묻힌 채 터지지 못하고 있으니, 노을은 저 홀로 주황의 몸을 풀어 어스름에 섞이면서 장독대를 어루만져 내려앉는다. 그 장독대에 선 네 여인의 흰 옷과 검은 머릿결 갈피로도 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