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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1)

13. 지정무문  혼인하면 반드시 따르는 것이 사돈서였다. 이는 일생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부녀자로소 각기 그여아와 남아를 성혼시키고 난 후에, 서로 얼굴도 모르지만 시 세상에서 제일 가갑고도 어려운 사이가 된 안사돈끼리, 극진한 예절을 갖추어 정회를 담은 편지를 서로 주고 받으면서 양가의 정의를 더욱 두텁게 하고, 자식들의 근황이며 집 안팎 대소사를 마치 같이 겪어 나가는 것처럼 이야기로 나누는, 정성과 격식이 남다른 편지였다. 허물없는 친구에게 흉금을 털어놓는 사신이 아니면서도 자식을 서로 바꾼 모친의 곡진한 심정이 어려 있고, 그런 중에도 이쪽의 문벌과 위신에 누가 되지 않을 만큼 푹격을 지녀야 하는 사돈서는, 조심스러우나 다감하였다. 궁체 달필로 문장을 다하여 구구절절 써내려 가는 이 편지..

혼불 5권 (55, 完)

그는 정말로 허우적이듯 두 팔을 벋는다. 발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것이다. 마음이 다급해진다. 이윽고 뜬걸음에 오류골댁 살구나무 검은 둥치 이만큼 당도한 그는. 거짓말처럼 눈앞에 흰 달빛을 받으며 흰 그림자같이. 사립문 곁에 붙박인 듯 서서 하염없이 고샅을 내다보고 있는 강실이를 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뜻밖에도 그네가 밖에 나와 서 있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아니 이거이 헛거이냐. 참말이냐. 내가 가새 눌링 거 아니까? 어쩐 일이여. 이날 이때 문밖에는 시암질에도 안 나간다는 작은 아씨가 어쩌자고 이 밤중에 사립문ㅇ에 나와 섰이까. 달마중을 헐라고 나와 섰능 거잉가. 아디 먼 디로는 못 나강게? 그런디 시방 집안에는 아무도 없능게빈디. 저렇게 씻은 디끼 죄용헌거이 인기척도 없고 헤기는 오류골양반 동산..

혼불 5권 (54)

그리고 그 비석의 뒷면에 적혀 있는 그리운 문자들은 "공으로부터 거슬러 올라 사 대에서 세 분의 정승의 났으니 공은 본디 겸허한데가 또 가문이 융성한 때문에 그 마음은 더욱 벼슬에 나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아경(참판의 별칭)의 열에서 의직을 원하여 절라부백(전라관찰사)이 되었으나, 얼마 후 그만두고 돌아와 향리에서 여생을 보낸 지 십여 년이 되었다. 금상(임금)이 자헌의 품계를 특별히 더하여 형조판서를 제수하자 공은 받지 않고 상소하여 사양하니, 비답한 말씀이 특별히 많았고 공을 부르는 전지가 잇달아 고향으로 내려왔다.는 말씀을 적고 있다. 청빈하고 용모가 아름다워 보는 이에게 감화를 주며, 그 행실이 단정하고 학문이 높았던 그 선조의 한평생 살아온 흔적이, 한 집안은 물론이요, 향리와 나라에 빛..

혼불 5권 (53)

살아서는 유명이 달라 명부의 그림자를 좇아갈 수 없었으나, 이제 죽어 가벼운 혼백이 되었는데도 바로 가서 만나지는 못하고, 아직도 더 기다릴 일 남아서, 가슴에 맺힌 애를 다 삭히고 썩이어 온전히 씻어 내고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사람. 이승에서 만났던 단 사흘의 인연으로 한세상을 다하여, 오직 그가 남긴 시간을 살고, 죽어서도 한 삼 년은 더 기다려야 갈 수 있는 이 사람의 그 무엇이 그토록 컸던 것일까. 청암부인은 이승을 벗어 놓고 저승으로 가면서, 이 어린 신랑 준의가 써서 보낸 달필의 혼서지를 신발로 만들어 신고 갔다.  時維孟春(시유맹춘) 尊體百福(존체백복) 僕之長子俊儀(복지장자준의) 年旣長成(연기장성) 未有沆麗伏蒙(미유항려복몽) 尊玆(존자) 許以(허이) 令愛(영애) 항室(항실) 玆有先人之禮..

혼불 5권 (52)

"핫다, 자네 참 무선 사람이네." "누구는 용해 빠져 갖꼬." "헤기는 나쁠 거이사 없겄제. 혼백 되야 합방을 해도 음양이 만났잉게 내우 합장헌 거이나 머 달를 것도 없고, 생각허기 나름일 거이여." "그렇당게요. 나는 재미가 나 죽겄소. 응골지게 그런 자리가 날라고 그렇게 애가 말르게 지달렀등게비여." "어차피 도적질?" 만동이는 백단이의 말을 되뇌었다. 그리여. 어차피 의지헐 빽다구 못 타고난 설움으로 한세상 스산허게 살다 간 인생이 원통해서, 좌청룡 우백호, 실허고 아늑헌 무릎 빽다구 속으로 들으가 자리잡고 싶었던 것이닝게, 헐라먼 큰 도적질허제, 기왕. 아조 그 음기끄장. 그러서요, 아부지 거그서 좋은 아들 하나 낳으시오. 실허고 좋은 놈으로, 양반 중의 양반이요, 천골 중의 천골인, 두 유골이..

혼불 5권 (51)

물론 누구네 집으로 굿을 하러 가거나, 어디서 문복하러 오는 사람들한테서도 사람들 소식은 가랑니야 서캐야 들을 수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비오리네 주막에 떨어지는 소식이 제일 빨랐다. 그리고 제일 정확했다. 그것은 여러 갈래 여러 골의 여러 사람이 하는 말을 한자리에서 모아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탓에 백단이는 고리배미에 갈 일이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렇지 않을 때도 유난스럽지 않을 만큼 비오리네 주막에 들러 비오리와 그 어미를 만나는 척하면서 요령껏 소문을 흡수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백단이보다는 만동이가 주막에는 이무러워. 틈만나면 그는 마치 일없이 막걸리나 한 사발 마시러 온 것처럼 혼연스럽게 평상에 앉아 있곤 하였다.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생김새 곱상하고 자세에 태깔이 있어 반드롬..

혼불 5권 (50)

일부러 그렇게 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어찌 편안하리오. 여름 지나 가을 오면 서리 내리고 상로지사, 아비의 무덤에 찬 서리 시리게 덮이는 그 냉기가 흙 속으로 뻗치어 스미듯, 제 뼛속으로 끼치는 서슬은 만동이의 무릎을 더욱 여위게 하고 떨리게 하였다. 쑥대강이 같던 봉분의 잡초들이 누렇게 말라 시들어지며 하루아침에 짚북더미로 쓰러지다가 그나마 얼어붙어 저절로 죽어 버리는 겨울. 엄동설한의 심정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추위에 이빨이 부딪치는 것처럼 딱. 딱. 마주치게 시린 두 무릎을 베고. 이 허하고 하찮은 무릎을 베고. 어린 아들은 이토록 달고 깊게 자고 있는가. 아무 근심도 없이 모든 것을 아비에게 맡기고. 아부지도 이 귀남이맹이로 우주와 천지의 어린애로 돌아가서. 비..

혼불 5권 (49)

지달르시라고 간곡히 작별을 하고는, 자기가 공부했던 그 절을 찾어 또 질을 떠났단다. 여러 날을 걸려서 가고 가다가 어느 만큼에 다다라 잔등이를 넘는디, 아차, 여그가 바로 거그여, 그 동네. 어린 머이매한테 도시락 얻어먹고 즈그 아부지 묏자리 하나 써준 곳. 그 순간에 정신이 펀뜻 들었제. "그 아는 시방 잘 되얐능가 어쩠능가. 묘소나 한 번 들러 봐야겄다." 그런디 아 거그를 찾어가서 봉게 이놈의 묘소가 쑥대밭이 되야 부렀네. 풀이 엉크러져 우거져 부렀어. 봉분도 무너지고, 누가 언제 사람이 왔다 간 자취도 안 뵈이는, 임자 없는 무덤이 분명허드란 말이여. "참으로 괴이헌 일이로다. 내가 그때 공부헌 원리대로 자리를 잡었는디 이럴 리가 있능가. 설령 다소 빗나갔다 허드라도 이 지경에 이르다니. 이럴 ..

혼불 5권 (48)

"익어야제. 익어서 저절로 꼭지가 빠져야제. 설익은 재주에 코 깨지느 법이니라." 그런디도 야가 한 번 먹은 맘이라 들떠서 주저앉들 못허고 기어이 질을 떠났드란다. 금강산으로 들어갈 적에는 여나무 살 소년이었는디, 그새 구 년이나 세월이 흘러서 인자 의젓한 총객이 되야 갖꼬, 큰시님 밑에서 멩당 풍수 공부를 헌 사램이라 생김새도 점잖허니 보기 좋게 갖춰져서,절에서 떠날 때는 차림새 갠찮었는디, 강원도서 전라도 땅이라는 게 험허고 멍게로 걸어걸어 고향 찾어가는 질이 쉽들 안히여, 어쩌겄냐. 천리 질을 가는디 아는 사람 아무도 없고 수중에 가진 돈도 없응께, 비렁비렁 빌어먹음서 밤에는 한뎃잠을 자고 낮에는 찌그러진 동냥치 다 된 꼴로 질을 걸었드란다. 그러다 하루는 어뜬 잔등이를 넘을라고 기진맥진 배가 고파..

혼불 5권 (47)

"아무나 죽어 갖꼬 멩당을 간당가?" "아 긍게 죽어도 심있는 양반 죽기를 지달를랑게 쉽들 안헝 거 아니요오. 송사리사 냇갈에 가먼 짝 깔렸지마는." "휘유우." "한숨 쉬지 마씨요. 부정타게 맘을 질게 묵어야제 그렇게 한숨으로 토막을 치면 쓰간디. 신명이 돌아보먼 방정맞다 그러시겄소." "저어그 대산면 한울리 이딘가는 시암 속에도 멩당이 있다고 허드마는. 그게 있을라면 그렁게도 있는 거인디." "헤기는." "아 그 왜 새비 자리 쓴 이얘기도 안 있소?" "그것도 그리여." 내외 마주앉아 한숨 섞어 하는 말을 곁에서 듣고 있던 귀남이가, 꼭 만동이 어렸을 때 아비 홍술이를 올려다보고 묻던 모습으로 "새비 자리가 머이당가?" 고개를 반짝 치켜들며 물었다. "그렁 거이 있어." "있다고만 말고오." "이얘기..